감리교신학대학교(이후정 총장)가 6일 오후 2시 서울시 서대문구 소재 감리교신학대학교 웨슬리채플관 제1세미나실에서 제1회 감리교신학대학교 개교 기념 아펜젤러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개회예배에서 설교를 맡은 이후정 총장(감신대)은 ‘민족의 등불을 밝힌 분’(벧후 1:19)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 총장은 “기독교가 한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한국 역사엔 어두움, 시련과 고난이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비추신 등불이 있었다. 이 등불은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말하며, 어두움은 지나간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김창식 목사와 김기범 목사는 감리교 최초 목사 안수를 받으신 분이다. 그리스도의 빛을 등불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며 기다리던 그분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임했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민족과 어두운 역사 속에 그분들의 마음을 빚췄던 그리스도의 빛을 다시 전하고 살았던 것”이라며 “교회가 흔들리고 영적으로 암울한 이때에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새로운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으며, 은혜 받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예배 후 1부 강연 순서에선 ‘한국인 최초 목사 안수의 의미’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덕주 박사(전 감신대 한국교회사)가 ‘한국인 최초 목사 김창식과 김기범 목사 안수와 그 역사적 의미’라는 주제로, 서영석 박사(협성대 한국교회사)가 ‘한국 최초 김창식, 김기범 목사 안수의 의미’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먼저, 이덕주 박사는 “1884년 6월 24일 미감리회 일본 선교사 매글레이 내한하여 외부를 통해 고종으로부터 ‘미국인이 들어와 학교와 병원을 해도 좋다’는 승인을 받음으로 한국의 문이 열렸다”며 “이에 따라 미감리회 해외선교부는 아펜젤러(H.G. Appenzeller)와 스크랜턴(W.B. Scranton), 그리고 스크랜턴의 어머니 스크랜턴 부인(M.F. Scranton)을 한국 개척 선교사로 임명하였고 이들은 1885년 4~5월 서울에 도착하여 정동에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시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고 했다.
이어 “선교사들이 시작한 학교와 병원을 통해 기독교 복음에 관심을 표명하는 구도자들이 나왔고 이에 아펜젤러는 1887년 7월 24일 배재학당 학생 박중상에게 첫 세례를 베풀었다”며 “이후 장경화와 유치겸, 노병선(노광옥) 등 배재학당 학생들이 계속 세례를 받음으로 아펜젤러는 서울 남대문 안에 한옥집을 사서 ‘벧엘예배당’이라 명명하고 한국인 주일집회를 시작했다(정동제일교회의 출발)”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한국 감리교회의 신학교육은 벧엘예배당에서 토착인 집회가 시작된 시기에 함께 출발하였다”며 “아펜젤러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배우려 찾아온 배재학당 학생들을 중심으로 1887년 가을 배재학당 안에 ‘신학부’(theological department)를 개설하고 방과후 시간에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토착인 목회자 양성과 신학교육의 출발(감리교신학대학교의 출발)”이라고 했다.
그는 “1901년 5월 김창식과 김기범이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건의 역사적, 신학적 의미를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며 “첫째, 한국 토착교회 목회자의 지도력에 대한 확증을 의미하였다. 한국에서 첫 토착인 목사가 배출된 것은 개척 선교사들이 들어와 본격적으로 선교에 착수한 지 16년 만이었다. 주변의 다른 아시아 국가들에 비하면 상당히 빠른 진척이었다. 이는 그만큼 한민족이 기독교 복음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는 점을 보여주며, 급속한 교세 성장과 부흥이 그 결과였다”고 했다.
특히 “김창식은 1894년 평양선교 개척과정에서 선교사를 도왔다는 이유로 평양관찰사에 체포되어 모진 매를 맞으며 배교를 강요당하는 중에도 신앙을 지킨 일로 선교사들을 감동시켰다”며 “홀은 그를 ‘예수님을 위한 신실한 순교자’라 표현하였고 홀 부인은 ‘조선의 바울’이라 불렀으며 스크랜턴은 ‘큰 믿음 안에서 인내와 기쁨으로 견뎌 낸 신실한 종’이라 극찬하였다”고 했다.
또한 “김기범도 원산에서 선교사 없이 원산에서 홀로 사역한 일에 대해 존스는 ‘고되기도 하였지만 시련을 잘 견디며 낙심하지 않았다’고 기록했고, 인천에서 함께 사역했던 케이블은 김기범의 ‘충성심과 능력 있는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를 ‘한국에서 그리스도 사역을 위한 영광스런 기념비’라고 칭송하였다”며 “이런 선교사들의 칭송과 극찬은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뛰어난 신앙과 지도력을 지적한 것으로 김창식과 김기범은 이를 대표하여 최초 목사로 안수를 받았던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 박사는 “둘째, 목사 안수를 받기 전과 받은 후,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회의 전형적인 ‘순행 목회자’의 본이 되었다.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 직제 상 ‘본처 전도사’였다. 즉 자기 고향에 머물러 생업에 종사하면서 목회를 돕는 이를 본처 전도사라 하였다”며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실제로는 감독이나 감리사의 파송을 받아 임지를 옮겨야 하는 ‘순행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개종 전 ‘전국 8도를 유랑해본’ 경험이 있던 김창식은 목사 안수를 받기 전부터 평균 3년 미만으로 임지를 옮겼다는 것이 그의 증언”이라고 했다.
이어 “순행 목회를 통해 ‘교회를 내 것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피할 수 있으며 순종을 통한 겸비를 체득할 수 있었다”며 “그런 점에서 김창식과 김기범은 ‘감리교 전도자’의 원형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셋째, 김창식과 김기범의 목사 안수를 계기로 한국 개신교회 목사 안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며 “1901년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로 예정되었다가 ‘집안 상사’로 안수를 사양했던 최병헌 전도사가 1902년 5월 연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이어서 1903년 전덕기와 강인걸, 1907년 손승용과 홍승하, 권신일, 김우권 등이 계속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했다.
또 “장로교 첫 목사가 나온 1907년부터 미감리회는 종래의 신학회를 발전시켜 남감리회와 연합으로 ‘협성성경학원’(후의 협성신학교 및 감리교신학교)을 설립한 후 체계적인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과정을 시작하였다”며 “이처럼 1901년 미감리회의 첫 번째 한국인 목사 안수는 한국 감리교회 뿐 아니라 한국 개신교회 전체의 신학교육과 목회자 양성과정을 한층 발전시킨 요인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두 번째 강연을 맡은 서영석 박사는 “한국 최초의 목사 안수의 의미로 첫째는 자립적이고 토착적인 리더십 형성에 기여했다”며 “1901년 6월호 신학월보에 한국인목사의 의의를 잘 설명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둘째는 한국인의 기독교복음 수용의 전반적인 확대를 의미한다”며 “한국인 목사가 안수 받아 활동함을 계기로 한국 교계에 한인 지도자들이 많이 나타나고 한국의 기독교 선교에 상당한 활성화가 나타난다”고 덧붙였다.
또 “셋째는 김창식, 김기범 목사의 안수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선교의 주체로 나서게 된 점”이라며 “한국 감리교목사 1호인 김창식, 김기범 목사의 안수로 인해 이후 한국인 신자들에게서 보다 더 헌신적인 전도자나 목회자가 배출 되었다. 이들의 안수 후 계속해서 신학교육을 받은 한국인 목회자들이 배출 되었고, 그리하여 김창식, 김기범 목사의 안수의 의미는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들이 속속 출현되는 계기를 열게 되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민족운동과 계몽운동을 주도하는 인물이었다”고 했다.
아울러 “120년 전 한국 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초기 선배 목사님을 공부하면서 21세기에 부름받아 신학 공부를 하는 우리에게 어두움의 시절 복음을 밝히는 등불,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상기해야한다”며 “우리는 두 목사님이 복음을 위해 전 생애를 바쳤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한 진정한 사도적 역할을 하였음을 기억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잊지 말고 세상으로 달려 나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편, 이후에는 2부 강연으로 ‘목사란 누구인가?’라는 주제로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 담임)가 ‘목사란 누구인가? - 목사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지형은 목사(성락성결교회 담임)가 ‘목사란 누구인가? - 뉴노멀 시대의 목사 전망’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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