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의인 노아와 노아 후손들 그리고 인간의 죄성
21 세기 비극의 현장이 된 두 나라가 있다. 바로 아프가니스탄과 시리아다. 이 두 나라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모두 종교와 관련된 내전이 국가와 민족의 비극이 된 경우다. IS와 탈레반이라는 극단적 무슬림들은 이들 문화적 자부심이 강한 두 나라의 극단적 이슬람문화에 반하는 모든 문화유산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였다.
시리아(아람족)는 예수께서 친히 지명한 최초 이방 선교사 사도 바울의 최초 이방 선교지였으며 아프가니스탄은 예수님의 사도 가운데 예수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 최초 고백했던 도마의 선교지였다. 도마는 12 사도 가운데 지리적으로 가장 먼 인도까지 선교한 열정적 선교사였다. 그랬던 이 두 나라가 21 세기 가장 서글픈 아픔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에 마음이 저려온다.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역사적 역설을 짐작한다는 것이 얼마나 난해한 것인지, 두 나라를 통해 목격하게 된다. 홍수 이후, 의인 노아의 후손들은 왜 홍수 이전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일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 작은 실마리만 알려 줄뿐이다(창 8: 21-22).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만이 아니다. 인류는 세상 종말까지 이 신정론적 역설과 모순에 대해 묵상하며 살아갈 것이다. 코로나19와 21세기 두 나라의 비극은 기독교의 근원과 본질 속에서 그 바른 길이 무엇인지 교회와 신학에게도 다시금 묻고 있다.
필자는 이 인류 문제의 근원이 인간의 죄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본 “노아 후손들 경로”를 통해 지속적으로 설파하여 왔다. 이제 이 “노아 후손들 경로” NEW시리즈도 마감할 때가 되었다.
시리아든 아프가니스탄이든 성경 속 인류는 모두 노아 부부의 후손들이다. 이제 노아의 16 후손 가운데 마지막 손자인 아람을 마지막으로 “노아 후손들은 어디로 갔을까?” 시리즈를 마감하려 한다.
아람어와 유대인 그리고 성경
아람어는 주전 8세기까지 아카드어와 경합해오다가 주전 5세기 아케메니아 왕조(Archaemenian monarchs)의 공용어가 되었고, 주전 2세기 초까지 인도에서 애굽에 이르는 제국(특히 바사 제국)의 국제어로 사용된 셈어였다. 따라서 동방계 셈어(아카드 방언)나 남방계 셈어(에티오피아 및 아랍어 방언)와 구별되고, 북서방계 가나안어(히브리어, 페니키아어, 우가릿어)와도 구별된다. 하지만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많은 유사함을 보인다. 히브리어와의 뚜렷한 문법적 차이는 히브리어가 정관사를 명사 앞에 붙이는 데 반해 아람어는 명사 뒤에 두는 특징이 있다. 비록 아람 족이 중동의 강대국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그 지리적 특성상 언어를 통한 문화적 매개 역할을 충실히 감당한 민족이 되었다.
주전 6세기경 바벨론의 포로가 된 유대인들도 70년 동안 바벨론 지역에 살면서 조상들의 고유 언어인 히브리 언어의 표기에 당시 중동 지방의 공용어였던 아람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후에도 일상생활에서 아람 방언의 사용은 빈번하였다.
36년 동안 일본에 합병되었던 우리 민족 언어에도 일본식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것과 많이 닮았다. 일본어는 사실 반도의 고구려, 가야, 백제, 신라어가 많은 영향을 끼쳤기에 한국과 일본어는 오랜 기간 문화적 호환이 이루어져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만엽집(萬葉集)조차 고대 반도어로 해석해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연구들이 최근 속속 등장하고 있으니 그 질긴 문화적 교류와 관계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가인과 아벨, 이삭과 이스마엘, 에서와 야곱처럼 가까운 형제가 갈등과 충돌이 많은 것에서 역사적 한일 관계의 숙명을 느끼게 된다.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아람어와 히브리어가 유사한 것도 그 때문인 것이다. 이 같은 영향은 예수님 당시까지 이어져 당시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아람 방언이 통용어였다. 아람어 성경 탈굼(Targumim)이 만들어 진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람어에 능통한 분이었다. 제자인 요한의 아들 시몬(‘갈대’라는 뜻)에게 지어주셨던 "게바"(‘반석’ 또는 ‘바위’라는 뜻)라는 이름도 아람어였다. 후에 그 이름의 뜻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베드로"(반석)로 부르게 된 것이다(요 1:42 참조).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 죽음에서 살려내실 때 말씀하신 "달리다굼"이라는 말도 직역하면 "귀여운 소녀야 일어나거라"라는 아람어였다(마 5:41).
두로와 시돈을 지나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에 이르신 예수님 앞에 사람들은 귀먹고 어눌한 자를 데리고 와 안수하여 주시기를 간구한다. 이 때 예수님은 조금 낯선 방법을 사용하신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라 하셨다. 이 말은 "열리라"는 의미의 아람어였다(막 7:33∼37).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을 호칭한 "랍오니"도 "선생님"이라는 뜻의 아람어였다.
몸에서 분리된 신기한 손 하나가 바벨론 왕 벨사살의 왕궁 연회장 벽에 기록한 “세고 세었으며 무게를 달고 나누었다”라는 뜻을 가진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단 5:5; 24-25)이나 십자가상 예수께서 부르짖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도 아람어였다. 시편 22:1절의 인용인 이 구절은 마태복음 27:46절과 마가복음 15:34절에 기록되어 있다. “겟세마네”(기름짜는 틀), “골고다”(해골) 등도 모두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였다. 우리말의 아빠와 유사한 압바(Abba, 롬 8:15; 갈 4:6)도 아람어요 마라나타(Maranatha, 고전 16:22)도 아람어이다. 성경 에스라서 일부(4:8-6:18; 7:12-26)와 예레미야서의 한 구절(10:11), 그리고 다니엘서 일부(2:4 하반절-7:28)는 아예 아람 방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성경 여러 곳(창 31: 47; 막 5:41, 14:36 등)이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다행스러운 건 위에서 언급했듯 성경의 아람어 역본인 아람어 ‘탈굼’이 있어 히브리어와 비교하면서 고대 아람어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이다. 성경과 역사는 이렇게 아람족과 아람족이 사용하던 아람어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왔다.
아람어가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은 주후 7세기 이슬람교의 중동 정복 활동 때문이었다. 중동 지역을 이슬람이 장악한 이후 아람어는 급격하게 쇠퇴되어갔다. 아람어 사용 지역들은 대부분 아랍어로 대치되었고 오늘날 아람어는 겨우 쿠르드족과 일부 시리아인(수천 명)들에게서만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바울의 기독교 최초 선교지, 시리아(아람)의 미래
아람 땅은 놀랍게도 이방인 선교에 사명을 받은 사도 바울의 최초 선교지였다.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던 사울은 죽일 기세로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의 여러 회당으로 보낼 공문을 요구하였다. 그것은 예수 믿는 사람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는 대로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기 위해서였다.
사울이 길을 떠나 다메섹 가까이 갔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그에게 비쳐 왔다. 그 순간 사울은 땅에 쓰러져버렸다. 그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괴롭히느냐?”라는 음성이 들려 왔다. 바로 예수님의 음성이었다. 사람과 동행하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이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지 못했다. 주님은 사울에게 네가 할 일을 알려줄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일어나 다메섹 시내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였다.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던 사울은 동행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한 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했다. 회심하고 눈이 먼 그가 도착한 곳은 다메섹의 직가라는 거리였다.
다메섹에는 다소 사람 바울의 회심 사건을 환상으로 보았던 주님의 한 제자가 있었다. 바로 아나니아였다. 그는 눈이 먼 바울에게 안수(按手)하여 그가 눈 뜨는 것을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바울에게 세례를 주고 다메섹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를 소개해 주었다(행 9: 10-18). 이렇게 사울(‘큰 자’라는 뜻)은 바울(‘작은 자’라는 뜻)이 되었으며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다(행 9장). 바울은 훗날 아나니아를 주 안에서 경건한 사람이라 칭찬하고 있다(행 22:12-16). 이렇게 전통적으로 아람 땅은 최초의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은 땅이었다. 지금의 시리아와 이라크가 이슬람의 핍박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은 그 선조들의 뜨거운 신앙과 피 값이 있다.
잔인한 지도자로 인해 최근 시리아(아람 땅)은 다시금 세계가 주목 하는 땅이 되었다. 하지만 아람 땅은 본래 하나님의 땅이었다. 문둥병자였던 수리아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여호와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를 의지하여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몸을 씻고 문둥병을 고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예수님은 이 사건에 대해 하나님의 자비는 이방인들에게도 차별이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눅 4:27). 예수님은 아람어를 즐겨하셨다. 예수님은 “한국인들이 보는 일본” 같은 “이스라엘이 보는 아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부르고 계신다. 셈의 후손 아람은 말할 것도 없다. "사도 바울의 아람(시리아)", "사도 도마의 아프가니스탄"에 다시금 복음의 은총과 평강이 함께 하기를. (끝)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신앙과 과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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