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조상 벨렉과 바벨탑 사건
성경은 에벨(Eber)의 후손 벨렉-르우-나홀-데라-아브람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통해 아브라함의 직계 조상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창 11:16~26; 대상 1:19-25; 눅 3:35). 이 가운데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누어졌다고 성경은 전하고 있다(창 10:25; 대상 1:19). 오직 성경 계시에서만 확인이 되는 자료다. 즉 바벨탑 사건 이전 인류는 구음(口音)이 하나요 언어도 하나였다(창 11:1,2).
그렇다면 홍수 이전 인류는 어떤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홍수 이후 최초 언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비알파벳) 문자(쐐기 문자와 상형문자)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나왔다는 점에서 주로 고대 셈어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예측할 수 있다. 언어의 혼잡이 일어난 바벨탑이 위치한 곳도 이곳 메소포타미아 지방이었다.
그 셈어 가운데 주로 히브리어에 태초 언어의 원형이 많이 남아있을 것이다. 히브리인들이야말로 최초 문자 탄생지였던 애굽(상형문자)과 메소포타미아(쐐기문자) 문명을 모두 체험한 세계 유일 민족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고유 명사 등 특정한 언어자료에 있어 홍수 이전 언어와 홍수 이후 바벨탑 사건 이후 흩어진 언어 사이의 변동 폭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말 혈통이 신라어-> 고려어-> 조선어-> 현대 국어로 계승된 이유로 오늘날 문장 파악이 어려운 부여·고구려어나 백제어들을 추적하는 사학자들이 당시의 벼슬 이름이나 왕과 귀족들에 대한 칭호와 이름, 성씨, 지명, 숫자 개념들에서 그 흔적을 추적하는 방식고 유사하다.
이 태초 언어의 원형은 언제나 회복될 수 있을까? 성경은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때 일어난 놀라운 언어 통합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어떤 암시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렇게 바벨탑 사건 이후 인류가 온 땅으로 흩어진 때를 성경은 벨렉 시대부터 였다고 알리고 있다(창 11:8-9).
벨렉 시대 이후 인간은 빠르게 세속화되었다. 사람들은 홍수 교훈을 쉽게 잊어버렸으며 참 하나님보다 하나님의 피조 세계와 그 양상을 섬기기 시작했다. 신은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대치되었으며 여호와 하나님은 인간과 세상의 중심에서 배제되었다. 이렇게 에덴동산 추방 이후에도 사단의 미혹이 은밀하고 지속적이라는 것을 인간은 간과하였다.
이때 영육 간에 남보다 뛰어났던 함족 니므롯은 영웅이 되었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세속화된 지도자를 중심으로 멋지고 거대한 탑이 구상되었다. 탑은 영적이면서도 문화적이며 어떤 홍수도 이겨낼 만한 견고한 당대 최신 과학이 동원된 건축물이었다. 강림하신 하나님은 이 바벨탑을 보시고 사람을 모두 흩으셨다(창 11:5-9). 하나님이 사람을 흩으신 방법은 바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신 방식이었다. 홍수 이전 언어의 원형은 셈의 일부 후손들에게만 남겨 졌으며 언어는 다양해졌다. 인류는 그 흩어진 언어를 따라 민족과 나라를 구성하면서 온 세계로 흩어졌다.
아브라함 조상 벨렉보다 번성한 욕단의 후손들
벨렉이 30세에 낳은 아들 르우는 아브라함과 예수님의 선조였다(창 11: 18-21; 대상 1:25; 눅 3:35). 반면에 에벨의 다른 아들인 욕단(Joktan)은 13명의 아들들이 있었다(창세기 10:26~30). 알모닷, 셀렙, 하살마웻,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이 그들이다. 이들이 사는 땅은 메사(Mesha)에서 동쪽 산간 지역 스발까지 였다.
이들 종족이 지금의 어느 민족을 말하고 이들이 거주하던 지역이 현재의 어디를 말하는 지 명확히 밝히는 것은 어려우나 성경은 이들이 종족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별로 흩어져 살았다고 했다(창 10:31). 금으로 유명한 오빌과 사베안족과 연관된 스바의 지명을 참고할 때 많은 학자들은 이들이 아마도 오늘날 아라비아 땅에 주로 정착했다고 본다.
성경이 벨렉의 후손들과 달리 욕단의 후손들 이름을 이렇게 상세하게 거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경은 분명 욕단의 형 벨렉도 르우 말고도 많은 자녀를 낳았음을 우리들에게 알려준다(창 11:18-19). 239세를 살았던 벨렉은 아마 조상인 셈-아르박삿-에벨처럼 지금의 우리들보다 훨씬 많은 자녀들을 양육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성경은 르우 이외 벨렉의 자녀들 이름은 생략하고 동생인 욕단의 자녀들만을 소개하고 있는 걸까? 그 구체적 진실은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창세기 기자가 성경을 기록할 당시 욕단의 자녀들은 벨렉의 다른 자녀들과 달리 많은 이들에게 익히 알려진 족속이었을 것이다.
우리 민족이 셈족 욕단, 단 후손?
우리 민족을 셈족으로 비정하는 주장에는 세 줄기가 있다.
먼저 심정적으로 막연히 셈족으로 보는 경우이다. 아시아인인 이스라엘 민족이 셈족이요 한때 페르시아제국을 이루었던 오늘날 이란의 조상인 엘람족이 셈족이요 지금의 이라크 땅의 주인이었던 대제국 앗수르의 주인공도 셈족이므로 같은 아시아 민족인 우리 민족도 당연히 셈족일 거라고 여기는 심정적 셈족설이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어떠한 성경적, 인종학적 결정적 증거가 전혀 없다. 오히려 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는 우리 한 민족을 함족으로 비정한다. 물론 이것도 성경적 근거가 있는 주장은 아니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단 지파를 우리 민족의 조상이라고 보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단군”과 “단”지파의 언어적 유사성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단 지파의 오랜 무대는 가나안 땅이었다. 야곱의 다섯 번째 아들이요 야곱 아내 라헬의 종 빌하가 낳은 첫 번째 아들이 단이었다. 출애굽 시 성막 제조를 도왔던 아히시막의 아들 오홀리압(출 31: 6)이 단 지파였으며, 사사 삼손도 단 지파였다(참조: 삿 13-16장). 야곱의 축복 예언 가운데 단은 독사로 말의 발굽을 물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다(창 49:16-17). 이 예언을 통해 단 지파는 싸움에 능하고 싸움에 직면할 처지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모세는 단을 ‘바산에서 뛰어 나오는 강한 사자 새끼’(신 33:22)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예언처럼 단 지파는 요단강 동편에 있는 바산 부근의 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처음 단 지파는 유다와 에브라임과 베냐민 사이의 한 지역과 해안 평야 지대를 분배 받았다. 가나안 정착 이후 왕국 시대 이전까지 단 지파는 이렇게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있었다(수 19:40-47). 이렇게 야고보가 모세의 예언대로 단 지파는 늘 블레셋과 아모리 족속과 충돌하면서 전쟁에 노출된 지파로 살게 되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스라엘의 12 지파 가운데 오직 단 지파만이 하나님의 종들 144,000명의 명단에서 누락된 것을 볼 수 있다(계 7:4-8). 단 지파는 여로보암 왕 시절 우상 숭배에 열심이었던 지파였다(왕상 12:29). 단 지파는 에브라임 중심의 북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우상의 미혹을 뿌리치지 못한 지파가 되었다. 에브라임 중심의 북 10개 지파가 사마리아인으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단 지파는 더욱 하나님 눈 밖에 나게 된다.
그렇게 단 지파는 신약의 요한계시록에 와서 12 지파 명단에서도 탈락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사라진 그들 단 지파가 우리 한 민족 조상 단군이 되었다는 것은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너무 큰 비약이다. 설령 단군이 단 지파라 하더라도 그것은 명예가 되기는커녕 우리 한 민족이 비운의 민족이라는 멍에를 덧입을 뿐이다. 일부 일본인들조차 자기들이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비운의 단 지파의 후예들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참으로 애처롭기만 하다. 우상 숭배로 인해 12 지파 가운데 요한계시록에서도 제외되고 하나님 공동체와 멀어진 비운의 단 지파가 그리도 좋을까?
마지막으로 욕단을 언어적 유사성으로 인해 우리의 단군에 비정하는 주장도 있다. 이것도 우리 민족을 셈족 욕단 후손이라 전제하고 억지로 모든 것을 거기에 맞추려는 위험한 접근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게 억지로 우리 민족이 셈족 가운데 언약의 사람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닌 곁가지에 불과한 욕단 후손이라는 황당한 꿰맞추기 주장이 민족사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자부심이 될까?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할례자는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 마음의 할례가 참 할례가 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달신(月神)을 섬기던 우상숭배자들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마엘과 에서도 야곱의 후손들과 달리 여호와 하나님과 멀어졌다. 심지어 육적 아브라함 후손들은 오늘날 대부분 그리스도 예수를 메시아로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셈의 후손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는 민족이나 국가는 없다. 지극히 소수의 개인만이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육체적 셈족이 영육 간에 복을 받는 다는 신화와 착각에서 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다. 아무 근거도 없이 굳이 우리 민족을 아브라함 반열도 아닌 욕단의 후손이라 복을 누린다는 착각과 신화와 집착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아브라함과 달리 욕단에게는 육체적 할례 언약조차 없었다. 더구나 할례 언약이 중요한 언약이기는 하나 이것이 언약의 전부도 아니다. 육체적 할례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 후손들(유대, 이스마엘, 에서 등)조차 신앙과 멀어진 현실을 보라!
지금까지 노아 후손들 행로를 추적해 볼 때 우리 민족의 큰 줄기는 셈의 계열이 아닌 야벳 족의 흐름을 따라왔다고 본다. 역사는 신앙이 오히려 이방 야벳의 땅에 씨가 뿌려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육체의 할례가 중요한 것이 아니요 믿음의 할례가 필요하다. 이방인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욕단의 육적 후손이라는 명확한 증거도 없을 뿐더러 설령 욕단의 후손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아르박삿 후손들의 미래
모든 셈의 후손들이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아니다. 또한 모든 아르박삿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아니었다.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도 아니다. 명목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일 거라는 착각도 버려야 한다.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권능을 행하며 거짓 선지자 노릇하는 이단, 사이비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마 7)! 명목상의 아르박삿 후손이나 이스라엘 민족이 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만 전도하면 종말이 온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은 차별 없이 오직 하나님의 참 자녀를 찾고 계신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신앙과 과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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