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영성 논의의 배경
1)은혜의 방편들에 대한 사람들의 다양한 요구
근자의 활발한 ‘영성’ 논의의 한 배경은, 풍요로운 신앙생활을 위한 다양한 은혜의 방편들에 대한 욕구 때문으로 보입니다.
특별히 교육학, 사회학, 심리학 등과 신학의 연계적 발달과 그에 따른 포괄적인 인간이해, 21세기 ‘지식정보화 사회’라는 특수한 환경과 ‘심성의 사막화(the desertification of the mind)’ 등이 더욱 그것의 필요를 심화시켰고, 막연하나마 영성이 그런 갈망을 채워줄 것이라는 기대를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켰습니다.
물론 인간의 본질은 바뀐 것이 없고, 은혜의 방편이 ‘말씀, 기도, 성례’임은 개혁주의 교회의 불변의 고백이나, 성경이 그 중요성을 역설하고, 인간 경향성이 요구하는 다양한 필요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우리는 그동안 ‘믿음’은 강조하면서도 믿음의 좌소(seat)요 생명의 근원인 ‘마음’엔(잠 4:23) 무관심 했고, 특별 계시(special revelation)인 성경은 중시하면서 일반 계시(general revelation)로서의 자연(롬 1:20,)을 자원으로 활용하는 일엔 소홀했습니다.
소리 언어로서의 ‘말과 언어적 경건’은 중시하면서도, 전능자에 대한 경외심의 발로요(합 2:20), ‘무언의 경건’의 표현(약 1:26, 합 2:20)으로서의 ‘침묵(로마천주교의 관상의 일종과는 다른 말의 절제)’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노동을 생산, 축복, 소명(召命)으로까지 격상시키면서도, 경건의 방편으로까지는 그 의미를 확장시키지 못했습니다.
또한 ‘기도의 당위성’은 강조하면서도 기도의 다양한 응용, 실천 방법에 대해선 많이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이제껏 우리는 경건 지침에 ‘기도’, ‘말씀’ 같은 본질적인 은혜의 방편들만을 포함시켰고, 위에 언급된 것들을 어디에 소속시킬 것 인지에는 어정쩡했습니다.
이는 일반적으로 써 오던, ‘경건(piety)’이라는 용어가 이런 가벼운 것들까지 담아내기엔 너무 무겁고 성별된 용어였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영성(spirituality)’이라는 용어가 이것을 맡아주었습니다. ‘영성’은 본질적, 비본질적인 것, 중심적인 것 주변적인 것, 무거운 것 가벼운 것들 모두를 갈등 없이 아우를 수 있는 포괄적인 용어로 자리 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2)경건 생활의 다양한 패턴을 담아내는 영성
시대를 불문하고 ‘경건의 본질(the essence of piety) ’은 불변이지만, 시대 상황에 따라 ‘경건의 패턴(the patterns of piety)’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왜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와 같은 본질적 물음과 답변은 시대를 초월하여 항상 유효하고 또한 일치합니다만, 그것을 실현하는 ‘경건의 패턴’은 시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컨대 육체활동을 중심으로 하던 농경시대의 경건 패턴과, 두뇌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21세기의 경건 패턴이 다를 수 있고, 풍요와 여유로움을 구가하는 서구인들의 경건 패턴과 가난한 제 3세계인들의 경건 패턴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건강한 사람과 매일 침대에 누웠어야 하는 환자의 경건 패턴이 다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기도를 예로 든다면, 정신집중을 크게 요하지 않는 단순 육체노동자들에게는 ‘쉬지 않는 기도’ 가, 정신집중을 요구하는 과학자나 정밀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에겐 틈틈이 하는 ‘집중기도’가 선호될 만합니다.
그리고 활동이 많고 늘 시간에 쫓기는 분주한 사람들에게는 분산된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소리기도(通聲祈禱)가 적합합니다. 그들에겐 유유자적이 기도할 시간적, 마음적 여유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시도하는 것은 그들에게 잠을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에겐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는 한 많은 기도를 하고, 남는 시간에 밀린 일을 하는 것이 주된 관심사며, 이런 이유로 통성기도는 그들의 선호할 만한 기도 형태가 됩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가 통성기도 일변도로 나갔던 것은 경제적인 상황과도 무관치 않아 보입니다.
근자에 들어, 경제적인 풍요, 시간적 여유는 기도 형태에 다양한 변화를 필요로 하는 것 같습니다. 기도의 목적 또한 응답 일변도에서 내면의 영적 풍요를 추구하는 것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경건(piety)’이 다만 기도해야 할 당위성 같은 원론적인 것을 말하는 것에 그쳤다면, ‘영성(spirituality)’은 시대와 사람에 따른 다양한 기도 패턴(the pray pattern)과, 그리고 그것들을 일상에서 실천하고 응용하는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아우릅니다.
물론 ‘영성’의 이런 의미 규정에 대한 제안과 합의를 누가 도출했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회고 신조어(新造語)는 사전적(辭典的)인 의미 규정 후에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통용된 후에 후속적으로 의미규정이 이뤄지는 것이 통례임을 비추어 볼 때, ‘영성’이라는 용어 역시 그런 관점으로 보면 좋을 듯합니다.
3)종교다원주의의 대안으로서 개혁주의 영성
20세기에 들어 구미(歐美) 기독교 제국(諸國)들의 성적 타락, 마약, 폭력 등 부정적인 이미지가,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의 빛과 소금’이 못될 뿐더러, 사람들을 행복하게도 못하는 실패한 종교라는 인식을 낳았습니다.
얼마 전 한 조사에서 나타났듯이,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게 나타난 나라가 기독교를 표방하는 부유한 구미 제국(諸國)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은 기독교인들을 부끄럽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기독교의 메마른 ‘주지주의(intellectualism)’ 혹은 ‘열광주의(maenadism)’의 양극단은 기독교에 대한 매력을 더욱 약화 시켰습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보다 내면적이고(internal), 신비적인(mystic) 동양 종교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양인들 중에 동양종교에 심취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근자에는 벽안(碧眼)의 미국인이 국내 사찰의 주지가 되는 일까지 생겨났습니다. 기독교에서 채우지 못한(?) ‘내면적인 것들(inner things)’을 동양 종교들에서 채우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그 일환으로 흰두교(Hinduism)의 요가, 명상이나 불교의 참선(參禪) 등을 기독교에 도입하는 종교혼합주의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로마 천주교의 종교혼합주의(syncretism)는 도를 넘은 지 이미 오랩니다. 일부 신부(神父)들은 공공연히 지적 만족은 성경에서 얻고, 내면의 체험은 참선에서 얻는다고 말하며, 참선을 통해 말할 수 없는 평안을 얻었다고 떠벌이기 까지 합니다. 오죽했으면 근자엔 바티칸(Vatican)에서 신부들의 지나친 불교 심취에 우려를 표명하기까지 했습니다.
오늘 개신교 역시 서서히 신·구교(新舊敎)의 벽을 헐려는 종교혼합주의 현상들이 눈에 띕니다. 이름을 대면 알만 한 교회들 중, 예수회의 익나시오 영성수련(the spirituality Exercises of ignacio, 천주교 관상기도수련의 일종), 트레디아스 훈련(Tres Dias, 세계 2차 대전 후 스페인의 천주교 수도사들에 의해 일어난 영성 훈련의 일종으로 전쟁 중 시간적 여유가 없어, 3일 동안에 마칠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된 영성훈련) 같은 것들을 공개적으로 목회에 도입하는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염려스러운 상황들은 근본 목회자의 ‘신학 정체성(the Identity of theology)’의 문제에서 기인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에 대한 복음적 확신의 결여, 완전 충족적인 하나님 말씀에 대한 확신 부족, 개신교의 전통 속에 숨겨진 경건 소스(the sources for piety)에 대한 무지에 그 원인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복음의 재발견, 영성의 전인성, 은혜의 방편들에 대해 포괄적인 이해 등은 성도들에게 풍요한 경건 소스를 제공해 주고 신비주의(mysticism)와 종교혼합주의(syncretism)의 유입을 차단하는데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 이 글은 이경섭 목사가 쓴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2005년)’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목사의 저·역서는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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