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가장 주목받는 목회자 중의 한 사람인 티모시 켈러가 쓴 "자유"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상태를 진단한다.
1)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자아는 공허한 상태에 있다. 키에르 케고르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하는 것이 전형적인 인간 마음의 상태"라고 말한다. 사람은 자기의 자존감을 높여주고, 스스로를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게 해주고, 어떤 목적의식을 갖게 해주는 그 무엇을 찾는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기 정체성의 토대로 삼으려고 한다. 결과가 어떨까?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공허함을 느끼게 된다.
2)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아는 그 자체로 고통 덩어리다. 우리는 자주 상처를 받는다. 상처를 자주 받는 이유가 뭘까? 상처를 잘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이런 사람은 항상 관심의 중심에 자기가 있기를 원한다. 하루라도 인정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하면 견디지 못한다.
3)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아는 늘 분주하다.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사람들의 관심을 끌다보니 두 가지 일로 분주하다. 남과 비교하고 자랑하는 일이다. 남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자랑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공허함과 불안을 계속해서 해소하려고 한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교만은 본질상 경쟁적이라고 말한다. 교만의 중심에 경쟁심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엇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 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생긴 것을 뽐낸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남보다 더 돈 많고, 더 똑똑하고, 더 잘생긴 것을 뽐내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돈 많고 똑똑하고 잘 생겼다면 교만할 거리가 없다". 무엇을 말해 주는가? 우리는 많은 경우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자랑하기 위해서 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자아는 공허함과 고통 가운데 있다. 분주하고, 허약하다. 그렇다면 복음이 주는 자유, 복음 안에서 우리는 어떤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5장 1절에서 말한다. 1절은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의 요약일 뿐만 아니라 갈라디아서 전체를 요약해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1절) 기독교의 복음이 말하는 모든 것은 자유다. 예수님이 하신 모든 사역은 해방작전이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공허함과 분주함과 허약함에서 자유롭게 되었다고 선언한다. 복음이 주는 참 자유를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첫째, 양심과 동기의 자유가 생겼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이 우리에게 주는 자유는 크게 두 가지다. 1) 먼저 양심의 자유다. 양심의 자유는 죄의 형벌에서 자유케 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죄를 지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아무리 작아도, 하나님 앞에서 반드시 형벌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눈감아 줄 수 없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내가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대신 받게 하셨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고 선언했다. 무엇을 의미할까? 내 과거의 죄, 현재의 죄, 미래의 모든 죄까지 다 갚아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받아야 될 죄의 형벌과 심판에서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8:1). 이것이 복음이 주는 자유다.
복음이 주는 또 다른 자유는 2) 동기의 자유다. 복음을 알기 전에 우리의 행동은 의로움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 우리가 선하게 살고 열심히 살았던 것은 남보다 의롭게 보이고, 다른 사람의 인정과 평가를 통해 내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행동의 동기였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알고 나서 내 행동의 동기가 바뀌게 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자격이 없고, 공로 없어도, 우리를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 인정해 주시고 받아 주신다. 어떤 사건에 대해 대법원에서 평결을 내리면, 그것이 최종적인 결정이 된다. 더 이상 번복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은 나에 대한 최종적인 평결을 내리셨다. 최종적인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것은 결코 변화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한 일 때문에,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가치있는 존재로 여기신 것이다. 이것을 알면 우리 안에 자유함이 생긴다.
이 복음을 깨달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전처럼 사람들에게 좋은 평가받고,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나를 사랑해 주시고 불의하고, 경건하지 못한 나를 의롭다고 여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는 것이다. 동기의 자유함이 생기는 것이다.
최철준 목사(나주글로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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