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돈 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목회사회학)가 12일 기윤실(기독교윤리실천운동) 홈페이지에 ‘독일 교회 재통합 30주년을 보며’라는 제목에 글을 올렸다. 조 교수는 “지난 6월 28일, 독일 교회는 동서독 교회의 통합 30주년을 기념했다”고 했다.
이어 “1991년 6월 28일에 동독 교회와 서독 교회는 통합 총회를 개최하여 두 교회의 통일을 만들어 냈다”며 “독일이 정치적으로 통일을 이룬 지 약 8개월 후였다. 뿌리는 같지만, 전혀 다른 국가 체제 아래서 수십 년 동안 다른 길을 걸었고, 나름 다른 전통을 만들어 낸 두 교회가 연합을 이루어낸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1945년 독일의 패전으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이후 독일은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등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듯이, 이후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두 체제에 의해서 독일은 두 지역으로 나뉘었다”며 “그래서 소위 동독과 서독이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나라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각각 다른 체제 추구하는 두 국가로 나뉘었는데도 교회는 분단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했다.
또 “두 국가 아래서 이들은 독일개신교연합(Evangelische Kirche in Deutschland)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며 “이런 체제는 1969년 6월 10일 독일민주공화국개신교연합(der Bund der Evangelische Kirche in der DDR), 즉, 동독개신교연합이 설립되어 독립하기까지 유지되었다”고 했다.
그는 “동독 교회는 사회주의 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교회를 유지해 나갔다. 이후 분단이 점점 실제가 되며 교류는 점차 끊어지고, 정보기관과 정부의 박해와 감시는 교회의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교회 체제의 분단은 공산국가의 감시와 공작으로 더 공고해졌다”며 “그리고 결국 체제의 분단이 교류의 단절로 이어졌다”고 했다.
이어 “그런데 독일 교회는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서독교회연합과 동독교회연합의 교류는 어려워졌지만, 개 교회 간의 교류는 포기하지 않았다. 연합체의 교류가 어려워지자 양측의 교회는 지역교회별로 1 대 1 자매결연을 했다. 그래서 서독의 교회가 동독의 한 교회를 책임지는 구조를 만들었다. 상대편 교회와 파트너십을 가지고 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동독 정부의 방해가 이어졌다. 그래서 이 파트너십 관계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며 “그러자 독일 교회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 단위를 개인 수준으로 낮추었다. 즉, 동서독의 파트너십 교회의 교인들끼리 결연하는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명절인 교회 기념일에는 서독의 교인들이 동독의 교인들에게 소포를 이용하여 선물을 보냈다. 특히, 성탄절이 되면 선물 보따리를 개인적으로 만들어서 보내는 운동을 펼친 것은 역사에 길이 남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조 교수는 “이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이들은 독일을 갈라놓았던 장벽이 무너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의 통합을 준비했다. 1990년 1월, 즉,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겨우 3개월 정도가 지난 후, 그해 10월에 이루어진 독일 통일보다도 훨씬 전에, 동서독의 교회 지도자들은 서독 지역인 로쿰에서 한자리에 모였다”며 “더 놀라운 것은, 이 모임이 독일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부터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실은 이 모임은 동서독 교회 분단 20주년을 기억하자며 준비했던 모임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하면서, 분단을 기억하려는 모임이 통일을 준비하는 모임이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아울러 “그리고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치고 결국 1991년 6월, 동서독 교회는 통일을 선언했고 다시 명실상부한 독일개신교연합(EKD)을 이루었다”며 “이러한 교회 통합이 이제 30년이 되었다. 이제 이들은 그때를 돌이켜 보며 ‘체제는 나뉘었어도 우리의 길은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독일 장벽을 넘어 우리 교회는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