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의 아들 앗수르(2)
인간의 역사는 늘 권력과 생명이 무한할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진행되어 왔다. 그만큼 인간은 교만하면서도 어리석다. 유럽 최고의 신, 아테네의 제우스 신전 터를 가보면 정말 앙상한 폐허만 남아 인간의 유한함과 허무함을 암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플루타크 영웅전은 “법과 정의는 제우스 신과 나란히 앉아 있다. 권력을 가진 이가 하는 모든 일이 곧 그대로 법이고 정의일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오늘날 소위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 휘두르는 “마초”형 지도자들이 하는 행태가 아닌가. 앗수르의 흥망이 그랬다. 앗수르는 강력한 권력을 바탕으로 잔인하고 교만하며 문화와 문명과 종교적 우상이 그득한 영원히 만세를 누릴 것 같은 자신만만한 사회였다. 그러나 제우스 신전처럼 앗수르도 석조 유물만 남기고 형해화(形骸化) 되어 버렸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창조주 하나님의 경고다.
앗수르와 대면한 이스라엘
성경은 먼저 아브라함의 자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앗수르 지역까지 나아가 아브라함의 다른 자손들과 적대감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한다(창 25:18). 디글랏-빌레셀 1세(Tiglath-Pileser 1, 주전 1115-1077) 시대 지중해의 시돈과 비브로스, 아르밧까지 영향력을 넓히고 조공을 받던 앗수르는 아람의 강한 저항과 내부 문제로 잠시 주춤한다. 주전 1100년과 900년 사이에 일어난 앗수르, 바벨론, 엘람의 동시 권력 쇠퇴에 따른 중동 지역 권력의 힘의 균형 현상은 절묘하게도 다윗과 솔로몬 치하의 이스라엘 민족의 융성기를 가져왔다.
이후 앗수르 제국이 본격적으로 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 왕국 유다와 북 왕국 이스라엘로 갈라진 시대였다. 이 분열도 결국 원로들의 충고를 조롱하던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교만 때문이었다.
아람왕 하사엘이 가드를 점령한 후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오자 요아스는 선왕들과 자기가 하나님께 바쳤던 예물과 금을 몽땅 털어 하사엘 왕에게 예물로 보냈다. 성경은 하사엘이 자기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서 물러났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2:17-18).
하지만 요아스가 예물로 구원 받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요아스가 인간적 생각으로 하나님께 바친 예물을 함부로 자기 목숨 보전을 위해 아람왕에게 바친 것은 큰 죄악이었다. 역사는 앗수르의 아나드니나리 3세(주전 810-782)가 주전 804년 다메섹의 하사엘을 공격함으로 이스라엘이 구원 받았음을 알려준다. 당시 아나드니나리를 섭정한 삼무라마트(Sammuramat)는 훗날 그리스 전설에 아름답고 현명한 앗수르 여왕으로 알려진 세미라미스(Semiramis)였다.
북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은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 3세(주전 745-727)에게 은 34톤을 주고 그의 도움을 받아 자기 권력을 견고히 하려 했던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왕하 15: 19). 불(Pul)이라고도 불린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은 아나드니나리 3세의 아들이었다. 앗수르의 통치자 불은 우상 신들을 섬기던 므낫세 동쪽 반지파들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 할리, 하복, 하라 그리고 고산 강가에 분산 수용하였다.
이 사건은 이 세 지파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공동체와 영원히 멀어지고 결별하는 슬픈 역사적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므나헴은 자기 권력 강화를 위해 앗수르를 끌어들였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앗수르의 불왕은 북아람을 점령하여 한 도(道)로 편입하였으며 유대인들도 독립 국가가 아닌 앗수르어로 “울루부"(Ullubu)라 부른 지역에 기거하고 있는 포로로 취급할 뿐이었다. 그리고 불의 뒤를 이은 살만에셀 5세(주전 727-722)는 호세아왕이 애굽을 의지하며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은 일을 핑계 삼아(왕하 17:4) 사마리아를 포위, 공격하여 결국 함락시켜버렸다.
사마리아 성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프라테스 강 상류 지역과 메디아로 끌려갔다(왕하 17:6). 이때 함께 사마리아를 점령한 사르곤이 살만에셀 왕을 이어 왕위에 올라 앗수르의 마지막 왕조를 창건하게 된다. 주전 722년 북이스라엘은 이렇게 앗수르의 두 왕에 의해 영원히 멸망당하고 말았다.
앗수르와 남왕국 유다
이때 남왕국 유다는 어땠을까? 풍전등화와 같았던 남 유다는 당시 히스기야의 치하에 있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며 열강 제국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히스기야는 눈물로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사르곤 2세의 뒤를 이은 아들 산헤립(주전 705-681)도 선왕들처럼 전쟁을 즐긴 왕이었다. 산헤립은 앗술을 거쳐 니느웨를 앗수르의 수도로 삼은 왕이기도 했다. 그는 바벨론, 갈대아, 엘람인들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므로닥 발라단이 앉았던 바벨론 왕의 자리에 자기 측근을 앉혔다.
므로닥 발라단(“마르둑이 한 아들을 주었다”는 의미)이 히스기야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왕하 20:2-19). 산헤립은 주전 701년 아람으로 진격하여 시돈을 공략하고 아스글론을 거쳐 라기스를 정복한다(왕하 18:13,14). 그리고 남은 예루살렘을 집요하게 공격하기 시작했다(왕하 18- 19장; 대하 32장; 사 36-37장). 히스기야는 새장의 새처럼 갇혀버렸으며 히스기야는 앗수르에 공물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다(왕하 18:14-16). 인간의 권세란 얼마나 허망한 것이던가.
약소국의 슬픔은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 시대에도 이어졌다. 므낫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산헤립의 아들 에살핫돈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는 한때 앗수르의 영역 안에 있던 바벨론에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대하 33:11). 에살핫돈의 뒤를 이은 왕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앗수르바니팔(주전 669-633, 성경의 오스납발)이었다. 애굽으로 진격하여 테베를 약탈하고, 애굽 왕 바로 느고를 죽인 앗수르 왕이 바로 앗수르바니팔이었다.
앗수르 족의 종교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중심에 자리 잡은 앗수르는 지정학적으로 민족적·문화적·종교적 혼합의 성격을 가질 잠재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앗수르와 바벨론의 잡신 문화가 별 차이가 없는 것도 이 같은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다.
수메르 문명으로부터 기인한 이곳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다원론적이었다. 판테온(Pantheon, 온갖 신들을 모신 만신전)이 발달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수메르의 판테온에는 3천 내지 4천여 신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 가운데 수메르의 바람의 신 ‘엔릴’(Enlil)과 바벨론의 말둑(마르둑, Marduk, 렘 50:2)과 앗수르의 앗술은 민족 신인 동시에 최고의 신들이었다. 엔릴은 수메르의 하늘의 신 '아누'와 땅의 신 '키' 사이에 태어난 '니풀의 신'이었고 벨(Bel, 사 46:1; 렘 50:2; 51:44)은 말둑의 다른 이름이었다.
고대 앗수르 지역까지 진출한 수메르인들은 '앗술'에 '엔릴'을 위한 지구랏을 건설할 만큼 이 지역은 고대부터 종교적, 문화적 소통이 활발하였다. 니느웨의 앗수르바니팔 도서관에서 발견된 주전 7세기 중엽 쓰여진 유명한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와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가 성경 창세기 기사나 대홍수 이야기와 유사하면서도 성경과는 상이하게 다른 다신론적 창조 신화인 것도 이 같은 지역적 특성과 문화적 배경을 반영한다. 유명한 월신(月神) '신'(sin)이나 전쟁과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Ishitar), 지혜와 문필의 신 ‘나부’(Nabu) 등도 모두 앗수르 땅의 신들이었다.
유일신을 섬기던 이스라엘과 우상 잡신을 섬기던 앗수르는 같은 셈족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에 있어 이렇게 판이하게 갈라졌다.
앗수르 족의 미래
오늘날 셈의 아들로서의 앗수르와 그 후손들은 앗수르 제국과 그 백성들의 이름 속에만 남아있다(민 24: 22, 24; 호 14:3). 그들이 숭배하던 신(神)의 이름조차 ‘앗술’이었다. 앗수르 제국이 융성할 때 앗수르인들의 지식과 예술과 문명의 불꽃은 크게 타올랐다.
반면에 앗수르의 황제는 교만하고 잔인하였다(사 10:11-12). 하나님은 이런 앗수르 왕의 교만을 가만히 두고 방치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 인간의 자랑과 위세란 허망할 뿐이다(사 10: 16-19). 이제 과거의 제국들은 사라지고 오늘날 앗수르와 바벨론의 옛 땅인 이곳은 지금 주로 이라크의 땅이 되었다. 그리고 21세기 들어 그들의 유적은 이슬람국가(IS)로 인해 무참히 파괴되었다.
이라크는 독재자 후세인 통치 시절 그나마 절묘하게 종교적 균형이 이루어져 왔었다. 한때 후세인 시절 부통령이 기독교(시리아정교회)인이던 시절도 있었다. 후세인 시절 모술의 시리아 정교회 소속 기독교인은 전체 모술 인구의 25%에 달하였던 적도 있었다. 이라크 전쟁 결과 후세인의 철권 정치는 종언(終焉)을 고했으나 안타깝게도 이 지역은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과 위협이 점증하는 땅으로 바뀌어버렸다.
악은 악을 불러올 뿐이다. 과거 앗수르 제국 시절 신들의 상과 조각이 넘쳐 나던 이 지역에 과연 참 하나님의 진리는 언제 뿌리를 내릴 수 있을까?
우리는 주전 759년 경 갈릴리 출신 선지자 요나가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니느웨 성에 가 성의 멸망을 예고하며 회개를 촉구한 사실을 알고 있다. 놀랍게도 니느웨 백성들과 왕은 함께 회개하였다. 성경에 나타난 집단적 회심의 놀라운 보기였다. 문제는 지속성이다. 니느웨 성 백성들의 회심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앗수르는 앗수르바니팔 왕과 그의 아들 앗수르에틸일라니의 치세 때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선 줄로 알 때 넘어지는 게 인간이다.
나훔 선지자의 예언대로였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니느웨(앗수르)를 향한 요나의 외침과 니느웨 백성들의 대응은 작금의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남기고 있다.
복음은 움직인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요나처럼 복음에 반응하고 행동할 것을 지금도 요구하신다. 이런 가운데 유엔 평화유지군 자격으로 대한민국 자이툰 부대가 모술에 진출한 일은 이라크와 쿠르드(야벳의 아들 마대 후손들)인들에게 세상에 대한 원망만이 아닌 사랑과 소망의 틈새도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앗수르 땅의 제 2의 요나는 누구일까? 21세기의 요나여! 21 세기의 니느웨여! 함께 일어나라! 지금은 마치 무슬림 국가처럼 변해버린 이곳에 복음의 빛이 다시 스며들기를 기도한다.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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