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에 4회에 걸쳐 연재한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도 탐방기’를 마무리하며, 피터스와 그의 가족을 기억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피터스의 부인 엘리자베스 캠벨(Pieters, Elizabeth Campbell)에 관한 글을 소개한다. 성서번역위원회 위원으로 피터스와 함께 활동하던 레놀즈(Rev. W. D. Reynolds)가 그의 동료 부인인 엘리자베스 캠벨의 장례식 후 『The Korea Mission Field』에 피터스 부인에 대한 추모의 글1)을 기고한 것이다.
아무쪼록 세상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그의 가족을 기억하고, 병마 가운데서도 헌신적으로 선교사역에 매진한 피터스 선교사의 부인 피터스 캠벨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고, 한국교회에 고마운 선교사로서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란다. <편집자 주>
피터스 부인을 추모하며 / Mrs. A. A. Pieters.
레놀즈 목사 씀 / by Rev. W. D. Reynolds, 李訥瑞2)
엘리자베스 캠벨은 시카고 근처의 농장에서 30여 년 전(1873년)에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건강하게 야외 활동을 많이 하고 지냈으며, 밝고 야심 찬 소녀 시절을 보냈고, 노스웨스턴대학에서는 헌신적인 학창 생활을 했다. 신학교를 마칠 즈음 그녀는 대한국에 선교를 지원했으나 인도로 발령이 났다.
파송을 기다리고 있는 기간, 그녀는 1902년 가을, 피터스와 결혼하고 학생선교운동에 대단한 열성으로 성공을 거두고 선교사 파송을 받아 필리핀으로 출항했다. 그때까지 피터스 부인은 약값으로 단 1달러를 쓴 적도 없었다; 그녀의 진단서는 아무 이상이 없이 완벽했지만, 항구를 출발한 지 일주일이 되지 않아 열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필리핀 항구에 도착한 지 3일 후에 장티푸스로 판명되었다. 엘리자베스 캠벨은 첫 질병인 장티푸스로부터 서서히 회복하며, 의사의 조언으로 중국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필리핀으로 돌아오자마자, 피터스 부인은 미션 스쿨에서 매우 즐겁게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마을의 젊은 상류층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반을 조직했다.
하지만 뎅기열의 발작이 그녀를 완전히 쓰러뜨렸고, 골치 아픈 기침이 계속되었다. 그녀의 지속적인 건강 악화로 기후 변경을 해야 했기에 피터스 부부는 대한국으로 출발해 1904년 9월에 도착했다. 온화한 기후를 기뻐하던 중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한파가 그녀를 공격했다. 그녀는 심한 독감에 걸렸고 명백한 폐병 증세가 나타났다. 그녀는 실망하고 병에 위축되기는커녕 침착하고 조용하게, 심지어는 의사의 말을 듣고는 단번에 쾌활하고 용감하게 오랫동안 패배한 싸움에 대비했다.
그녀의 남겨진 짧은 인생이야기는 친근하다. 어떻게 그녀가 무서운 질병을 조금씩 물리치고, 교외에서 살며, 의사의 지시에 충실히 따랐는지를…. 그렇게 5월이 되자, 그녀의 삶은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처럼 보였다. 평범하게 생활하던 그녀는 더운 장마철이 다가오면서, 병마가 너무 심하게 그녀를 공격하여 일주일 만에 회복한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지난가을과 겨울에 긴 비행을 준비해 왔는지, 1월 5번째 날 일출 직후 그녀는 순수한 영혼을 아버지의 집으로 옮겼다. 그녀는 그것을 죽는다고 부르지 않았다. 긴 시간 동안 피곤한 기다림 속에서 그녀는 가끔 “아, 오늘 밤, 천국 집에 갈 수 있다면!”이라고 말하곤 했다.
필리핀, 중국, 한국은 그녀에게 모두 낯선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천국을 고향이라 불렀다. 미국을 떠나기 직전 송별회에서 피터스 캠벨 여사는 자신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을 미쳤던 성경말씀 세 구절에 대해 말했었다.
그리고 그녀의 서면 요청으로, 이 유명한 구절들이 그녀의 장례식에서 쓰인 추도사의 본문에 사용되었다. 그녀가 한국을 뒤로하고 ‘천국 본향’을 향하며 남긴 작별 메시지들이다. 그래서 피터스 캠벨은 소천했으면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성경 말씀들은 예레미야 45장 5절, 마태복음 6장 33절, 마가복음 8장 35절 말씀이다.
1. “네가 이제 큰일을 찾고 있느냐? 그만 두어라. 이제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재앙을 내릴 터인데 너만은 내가 보호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의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 나 주의 말이다.”
2.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구할 것이다.”
마무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세상 큰일을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구하는 일
둘째, 하나님의 나라에 전념하기
셋째,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일
이와 같은 삶의 메시지를 문자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데, 감히 누가 “그녀는 삶을 헛되이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 애도의 성명서는 그녀가 소천한 날 오후에 유니온교회(Union Church)3) 교인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유니온교회 신도들은 우리의 자매 피터스 캠벨(A. A. Pieters) 선교사가 세상의 오랜 병마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녀가 짧은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녀의 숭고한 용기와 강인한 정신, 그리고 그녀가 병마 속에서도 어떻게 우리의 부담스러운 마음에 기쁨과 위안을 주려 했는지를 기억할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인내심이, 진흙의 연약함에서 벗어나고 고통이나 짐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의 나라에서 기뻐하는 그녀의 영혼을 생각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그녀를 유산의 소유로 불러들인 것을 생각하며 경건한 마음으로 ‘아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슬픔과 사별의 절정에 이른 이때, 우리 모두의 심심한 애도를 표하며 나아가고자 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날까지 앞으로 며칠 동안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자기 곁에 내려오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포근함과 위안을 느끼며, 그의 발걸음이 매일 평안의 길로 인도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C. G. 하운셀(C. G. Hounshell, Pastor)4) 목사의 서명
비서 허스트 (J. W. Hirst, Sec’y.)
피터스 여사는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이 ‘여성가정저널 12월호’의 발췌문을 읽어달라고 요청했었다: “예수님은 부드럽게 몸을 숙이시고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윗방에 있는 그의 학교에 초대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님이 먼저 가셨으니, 우리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안전하게 그 길을 걸을 것입니다. 본향의 천사가 우리를 위해 오고, 그녀의 부재 기간이 끝날 때까지 1주일, 1개월, 또는 1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 기간에 피터스 부인이 남긴 마지막 교훈을 따라가기를 바란다.
인내!
전심!
헌신! <끝>
[미주]
1) 이 글은 『The Korea Mission Field』 1906년 1월호 49~50.p.에 라는 제목으로 실린 레놀즈의 글이다.
2) 레놀즈의 한국명 이눌서(李訥瑞). 구약성경 번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904년 10월 17일 이후 1910년 4월 2일 레놀즈는 밀러 총무에게 ‘번역 완료’를 전보로 알렸다. 특별히 번역자회 서기로 봉사하며 구약번역을 완성한 레놀즈는 성경번역의 가장 큰 공로자이다.
3) 개화 초기 대한국의 기독교 전파의 금지령이 사문화(死文化)되기는 했지만, 법률적으로는 성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복음 전도는 신중해야 했다. 주한 외국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안전한 방법이어서 전도를 했고, 1885년 6월 28일 주일에 첫 예배를 드렸다. 유니온교회의 처음 예배 처소는 미국 공사관 사무실로 했고, 이후 유니온교회 설립에 공헌한 아펜젤러가 배재학당을 교회 처소로 개방했다.
4) 미남감리교회 선교사, 목사. 한국명 한운설(韓雲雪). 미국 밴더빌트대학 출신으로, 1901년 겨울에 부인과 함께 내한. 1902년부터 서울구역 협동 목사 및 배재학당 겸직으로 전도와 교육에 힘쓰다가 1908년에 귀국하였다. 자골교회(현 종교교회) 제3대 담임(1904~1907) 역임.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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