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D.C 소재 워싱턴트리니티연구원 원장인 심현장 박사는 2014년부터 조나단 에드워즈와 C.S. 루이스 콘퍼런스를 한국에서 개최해왔다. 올해 콘퍼런스는 팬데믹 상황으로 인해 온라인 줌을 통해 개최될 예정이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C.S. 루이스의 신학 사상이 코로나19 팬데믹을 관통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현재 미국 워싱턴D.C에 체류 중인 심현찬 박사와 서면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음은 그와의 일문일답.
- 조나단 에드워즈, C.S. 루이스 콘퍼런스를 추진하게 된 취지나 계기는?
콘퍼런스 출범 당시 한국교회는 세상에서 빛보다는 지탄의 대상이 돼가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으로부터 12년 전 이곳 워싱턴에서 목회자 및 교회 리더들을 교육하고 있던 저희 콘퍼런스 관계자들은, 8년 전 한국 방문을 계기로 한국교회를 섬기려는 소박한 마음에서 1차 에드워즈 콘퍼런스를 남서울교회(담임 화종부 목사)에서 시작했다. 당시 ‘일그러진 한국교회’에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데 일조하기 위해서 목회자의 모델로 에드워즈, 평신도의 모델로 루이스를 선정하고 소개함을 목적으로 했다.
- 조나단 에드워즈와 C.S. 루이스가 말하는 건강한 기독교 영성이란?
물론 두 사람은 신학적인 색깔이 서로 다르다. 한 사람은 개혁주의 목사, 한 사람은 영국 성공회 평신도다. 하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순전한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주의, 교회와 성도를 세우는 신앙, 실천성, 그리고 평생 시종여일한 신앙과 희생적 삶을 건강한 영성이라고 했다. 건강한 신학이란 삶과 유리되지 않은 신행일치적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에드워즈는 교회의 신학적 건강성을 위해 헌신한 대가로, 20여 년 동안 사역했던 교회에서 파면당했다. 루이스는 옥스포드대에서 기독교적 저술을 했다는 이유로 20여 년 동안 봉직한 대학에서 학문적 왕따를 당하고 정교수직에 임명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 다 슬퍼하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사람인 에드워즈는 스탁브리지란 인디언 선교촌에 가서 8년을 선교하고 4권의 주옥같은 저술을 남겼다.
또 한 사람인 루이스는 결국 캠브리지대학으로 전근해 석좌교수직을 받고, 계속적인 기독교 저술 활동을 이어가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기독교 인물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한 사람은 목회자로서, 한 사람은 평신도로서 둘 다 평생 최선의 (신앙) 경주를 한 모델들이었다. 한 마디로 이 둘은 건강하고 깊이 있는 복음주의적 신학 아래, 초월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었으면서도, 동시에 현실에 뿌리박은 실천적 신앙을 평생 보여줬다.
- 한국교회가 양 극단주의로 쉽게 치우쳤던 원인과 이로 인해 드러난 현상은 무엇인지? 가령 반지성주의 부류의 은사주의와 극단적 이성주의로 흘렀던 냉랭한 보수주의를 중심으로 말씀을 부탁드린다.
이 문제는 기본적으로 신학 교육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계의 신학 교육은 재고돼야 한다. 지성과 은사의 균형을 이루는 총체적 신학은 신학교에서 철저히 교육 받아야 한다. 문제는 제도권 신학교는 재정 문제로 무분별한 인원 충원을 해 신학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비인가 신학교들에서는 이런 균형 있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 결과 반지성주의와 반은사주의라는 양 극단으로 나아가고 그 결과 한국교회가 건강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생각하고 성찰하는 신앙’의 필요성도 요구된다. 성경에서 베뢰아 사람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것처럼(행17:11), 성찰하는 신앙, 질문하고 생각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이런 성찰적 신앙의 기초 위에, 건강한 지성과 신앙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에드워즈의 표현대로, 빛과 열 곧 성경지식과 성령의 역사라는 양 날개를 힘입어,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이 균형을 갖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거룩한 지식이 없이는 참된 성령의 은혜 없고, 성령의 은혜 없이는 거룩한 지식은 없기 때문이다.
- 위 두 명에 대해 탐구해왔던 콘퍼런스가 이번엔 ‘팬데믹 시대’를 주제로 내세웠다. 이유는?
이번 콘퍼런스에 팬데믹 시대를 내세운 이유는, 건강한 신학과 신앙은 주님께서 지적하신대로 ‘시대의 표적’을 정확히 독해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마16:4). 물론 콘텍스트에 종속되기보다는, 시대의 표적을 정확히 독해함으로써, 개혁주의적이고 복음적인 신학을 적용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 콘퍼런스는 좀 넓은 의미에서, 팬데믹 시대의 부흥론, 섭리론, 고통의 문제, 창조의 목적을 한국교회에 제시하고, 루이스 콘퍼런스는 우정과 사랑의 문제, 우정 공동체인 잉클링스를 통해, 팬데믹과 포스트 팬데믹 시대에 대한 대안으로 ‘우정과 사랑의 신학/신앙 공동체’를 제시하려는 것이다.
- 조나단 에드워즈가 살아있다면, 팬데믹 시대의 해법으로 교회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말했을지 궁금하다. 단순히 정치나 사회가 요구하는 ‘모이지 않음’, ‘비대면’을 너머 병든 사회에 어떤 이정표와 역할, 그리고 치유를 줄 수 있을지?
에드워즈에게 있어, 팬데믹이나 고통의 문제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성도의 삶을 결정짓는 요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팬데믹과 고통을 경험할지라도 그런 환경의 폭군에 함몰되거나 뒹굴지 않고, 하나님의 거시적 관점, 즉 구속사적이고 섭리적이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관점에서 나아가 하나님 영광의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읽어내고 겸손히 순종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가 살아있다면 이번 팬데믹으로 인해 수많은 인명 피해와 비대면·사회적 거리두기·자발적 감금 등의 어려움에 깊이 공감하는 눈물의 영성을 강조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믿고 담대히 일어나는 부활의 신앙·섭리의 신앙·구속사적 신앙·하나님 영광의 신앙을 외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 그렇다면 C.S. 루이스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루이스는 지금의 코로나19 팬데믹처럼 당시 영국에서 겪은 전쟁 시기에 옥스퍼드 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자신도 프랑스 전선에 참전하고 전상으로 귀교했다. 이런 그가 가진 팬데믹에 대한 태도는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첫째, 잉클링스처럼 우정의 공동체를 통해, “믿음의 동역자들과 신앙 안에서 우정과 사랑으로 서로 격려하고 이겨라.” 나아가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고통을 함께 격려하고 극복하라.”
둘째, ”환경에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 소명을 따라, 순례자로서 매일 성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이는 유명한 그의 ‘전시의 학문’(Learning in War-time)이란 글에서 잘 드러난다. 이 글에서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두더지는 땅을 파야하고 수탉은 울어야 한다… 그리고 대학생은 학문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루이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린 이런 팬데믹 시대에 먼저 우정 공동체를 통해 서로 동역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교회/공동체의 역할을 회복해야 한다. 동시에 환경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순례자로서 자기 일을 통해 하나님의 소명인 줄 확신하고, 성실히 임하는 태도가 절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 최근 한국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도 극단적 분열, 대립, 사건 사고 등의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코네티컷에서 강, 계곡 등지에서 경험했던 영적 대각성 이전의 미국의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는가?
사실 에드워즈 시대의 부흥 이전도 우리나라의 현실과 유사하다고 할 정도다. 마치 ‘애가의 시대’(교회에서 당시 신앙 상태에 대한 탄식의 설교가 넘침)였다. 이런 영적 침체의 상황에서 하나님께선 미국 대각성 운동의 부흥을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갑작스런 역사로 주셨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 나라도 현재 교계 상황이 슬픈 탄식의 애가의 시대라고 할지라도, 주께서 때가 되면 우리에게도 부흥과 은혜의 시기가 오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가 부흥을 그저 기다리기보다, 먼저 성도나 목회자 개인이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자기를 돌아보고, 교회들도 다시 하나님과 성경 앞에서 본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게 요구된다. 나아가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 한국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 각 분야에서 힘쓰면서, 겸손히 부흥의 때를 기도하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 한국도 교회뿐만 아니라 사회가 위와 같은 강력한 영적 대각성을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교회에 영적 대각성 여부는 철저히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달렸다. 때문에 우리 인간은 결코 이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기대해야겠다. 부흥의 시기는 단순히 교회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개혁을 가져왔기에, 우린 주님께서 주실 한국교회 부흥을 위해서 함께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한편 주의할 사실이 있다. 바로 부흥에 대한 관점의 변화다. 부흥은 각종 은사가 반드시 충만해야 하고, 대규모로 인원이 증가해야만 한다고 재단해선 안 된다. 참된 부흥은 불신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이 주 앞에 돌아오는 역사, 곧 회심의 역사가 부흥의 핵심 요소임을 알아야 한다. 결코 대규모나 요란한 은사집회 등으로만 부흥을 정의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물론 이런 은혜가 넘쳐서 대규모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성도의 회심에 힘쓰는 목회, 이것이 바로 부흥의 시작이자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부흥은 꼭 대교회나 대도시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다. 이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이고 또한 초자연적으로 일어난다. 따라서, 우린 언제 어디서나 겸손히 주 앞에서 신앙생활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우리에게 겸손히 기도하고, 동역하고, 무엇보다도 신앙의 본질(성경 중심, 하나님 중심, 교회 중심, 실천적 신앙)에 생명을 거는 인생을 살아가라고 조언할 것 같다.
- 앞서 조나단 에드워즈나 C.S. 루이스가 신앙을 토대로 신행일치를 강조했다고 했다. 이들이 복음의 영광을 어떻게 인지했는지, 또 어떻게 현실의 어려움을 감내하고 복음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는지, 그 원동력이 궁금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들은 존경받는 목회자요 교수였지만, 개인적인 엄청난 고통을 경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시 자신들의 소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계속적인 성경을 통한 자기 점검, 그리고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였다고 생각한다.
하나님 말씀은 상황을 초월하는 능력을 주신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을 통한 초월적이고 거부할 수 없는 은혜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 복음의 영광을 체험하고 확신한 사람은 다른 말로 예수 그리스도에 붙들린다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부흥을 경험한 사람은 상황이라는 폭군의 노예가 되기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극복하는 능력을 경험한다. 이것이 참된 신앙의 모습이자 신앙인의 모습이다.
이런 점에서, 참된 신앙과 경건, 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고난 등 그런 환경 가운데서도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인생을 산다. 하지만 거짓 신앙과 경건은 자기 자신에게 맡기는 인생이며, 결국 자멸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점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최고 작품인 ‘신앙정서론’에서 던진 핵심적 통찰이다. 참된 신앙이란 일시적이거나 현상적이거나 인간중심적이지 않고, 철저히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그리스도와 성경에 기초하며, 하나님 중심성을 줄곧 유지하는 것이다. 참된 신앙은 소나기 신앙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과 같이 언제나 지속적인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관점에서 성도란 팬데믹 같은 고통 중에서도,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그리고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겸손히, 그리고 변함없이 의지하며 그분께 사랑과 영광을 돌리는 신앙과 성도가 돼야 한다.
- C.S. 루이스는 신학자가 아닌 영문학자다. 일반 학문 분야 등에서도 선한 그리스도인의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오늘날 사회에서 신앙적으로 살아내는 게 쉽지 않는 상황에서, C.S. 루이스가 크리스천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우리가 루이스 콘퍼런스를 하게 된 결정적 동기는 평신도에게 롤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자기 분야에서 분명한 신학과 복음의 관점을 갖고 최선의 삶 곧 실천적 삶, 희생적 삶, 베풀고 배려하는 삶, 그리고 자기 직업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광과 영국 복음화의 소명을 위해 힘썼던 삶, 평생을 시종여일 경주한 인생을 소개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순전한 복음을 위해 변호하고 살아갔던 그의 인생을 모델로서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한국교회 성도들이 루이스의 저작을 천천히 읽고, 그의 삶의 궤적과 동행하면서 배운다면 한국교회에 아직 부족한 ‘생각하고 실천하는 소명의 성도’의 모습을 회복하리라 생각된다.
- C.S. 루이스 콘퍼런스의 주제가 ‘팬데믹 시대, 우정과 사랑의 신학, C.S. 루이스’다. C.S. 루이스가 말하는 우정과 사랑이란? 그리고 한국교회가 우정과 사랑이 두터운 공동체로 변모하기 위해 C.S. 루이스가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 궁금하다.
루이스의 사랑과 우정은 ‘네 가지 사랑’이란 저서에서 잘 드러난다. 지면상 다 이야기할 수는 없어 간략히 얘기하자면, 사랑은 곧 하나님이요 사랑이 ‘신이 되려고 하면 악마가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랑의 하나님 중심성을 강조한 것이다. 나아가 우정론의 핵심이란 우정의 왕적 위엄이라고 불린 벌거벗은 인격의 만남 곧 인격 중심적인 태도다. 친구의 신상에 대해 무관하고, 오직 친구의 인격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인격 우선주의와 평등의 공동체가 바로 ‘잉클링스’의 모습이다. 교수와 일반인이 함께 어울렸다. 평생 동역자들이었다. 공동의 관심사인 기독교와 문학에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평생 상호 산파적인 역할을 한 우정과 사랑의 신학·신앙·인생 공동체였다. 그리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도구적 역할을 감당했다.
우리가 이번에 잉클링스를 소개하는 이유도 그렇다. 이 모델을 통해서, 한국교회가 지나친 개인주의, 개교회주의, 교단주의를 넘어 구속사적 관점에서, 함께 동역하고 독려하고 채찍질하는 우정과 사랑의 공동체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아가 한국교회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증거하는 우정·사랑의 공동체라는 본연의 역할을 회복하고 감당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결정한 것이다. 동시에 이런 신앙·신학 공동체를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를 섬기는 차세대 리더를 격려하는 데 있다.
한 마디로, 잉클링스와 루이스의 우정의 공동체를 통해서 한국교회가 팬데믹 시대에 기독교적 우정과 사랑을 회복하고, 서로 격려하며 동역하면서 고통을 극복하기를 바란다. 나아가 평생의 동역자로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공동체를 회복하길 바란다.
- 끝으로 더 하실 말씀이 있으실지?
일부 사람들이 에드워즈와 루이스는 미국과 영국의 사람들이라 한국 상황에 모델로 적합하지 않다, 그리고 수입 신학에 불과하다고 폄하하는 분들이 있다. 일부 그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견해는 하나님의 거시적 관점 곧 구속사적 관점을 읽어내지 못한 다소 근시안적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셔서 그 복음이 흘러넘치고, 결국 우리에게 왔다. 이처럼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사적 관점을 단순히 에드워즈나 루이스가 외국인이란 이유로 결코 예단하거나 폄하해선 안 된다. 저희가 에드워즈와 루이스를 목회자와 평신도의 모델도 세웠다. 하지만 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을 높이려는 노력이 궁극적 목적이다. 이 둘은 일종의 세례 요한처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존재다. 저희 콘퍼런스 또한 세례 요한적 가치에 불과한 것이다(요3:30). 우리 콘퍼런스를 통해, 궁극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아울러 저희 집회는 신학의 공동체적 축제와 신학으로서 모든 성도를 위한 것임을 회복하고자 한다. 신학이 성도와 목회자 그리고 신학자 모두가 누리는 축제로 인도하는 것이다. 동시에 신학과 성경 연구는 성도 모두가 소명처럼 평생 진지하게 해야 할 생사의 문제다. 이점은 물론 에드워즈나 루이스의 저작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동시에 모든 개혁주의 전통의 핵심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