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리교신학대학교 오광석 교수가 웨슬리 회심 283년을 맞아 웨슬리 회심의 의미를 전하는 강의를 온라인으로 전했다.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웨슬리의 회심'은 웨슬 리가 1738년 5월 올더스게이트 거리(Aldersgate Street)의 한 장소에서 모라비안들과의 한 작은 집호에서 마음이 뜨거워진 경험을 하였던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웨슬리의 사역은 기존의 교회중심주의에서 복음중심주의 그리고 선교중심주의로 바뀌게 된다.
오 교수는 웨슬리의 회심이 기존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극적인 삶의 변화는 아니었다"고 하였다. 바울 사도와 같이 예수 믿는 자들을 찾아 잡아서 핍박하다가 예수 앞에 고꾸라진 회심이나, 혹은 방탕하게 살다가 그리스도교를 만나 이름 앞에 '성'이 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와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웨슬 리가 회심 전에도 신실하고 경건한 크리스천이었음을 강조했다. 웨슬리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에게 경건한 생활을 배웠고, 학생 시절에도 영국의 엄격한 수도회의 규율을 적용하는 학교에서 누구보다도 모범적으로 살았으며, 스스로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여 신성회(Holy Culb)을 따로 조직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모임 멤버들은 엄격한 규칙과 규율대로 생활하여 외부에서는 이들을 가리켜 '메소디스트(methodist)'라 부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웨슬리는 회심 전 미국 선교도 나갔다. 그러나 2년간의 미국 선교에서 웨슬리는 실패의 맛을 보았고, 낙담한 상태로 영국에 돌아왔다. 이 가운데 모라비안들과의 집회에서 내적 회심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회심 사건이 일어난 날 웨슬리는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거기서 어떤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강해 서문을 읽고 있었다. ... 그 낭독자가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변화를 가져 오시는 일을 묘사하는 말을 듣는 중에 나는 내 마음이 이상스럽게 뜨거워짐을 느꼈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고 있음을 느꼈고,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고 느꼈다."
오 교수는, 웨슬리의 회심으로 인하여 웨슬리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 번째는 웨슬리의 칭의 신앙과 구원 신앙에 보다 큰 확신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 오 교수는, 혹자는 웨슬리에 대해 칭의만 강조한다고 오해하기도 한다고 전하면서 그러나 "웨슬리는 성화가 구원의 한 축임을 간과한 적이 없다. 회심 전의 성화 신앙은 회심 이후에도 그에게 중요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그 근거로 오 교수는 웨슬 리가 믿음과 더불어 '행위'를 강조했음을 들었다. 오 교수에 따르면 웨슬리는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믿음은 성결과 사랑과 선행의 열매를 맺게 되어있다는 이해를 가졌다.
올더스게이트 회심이 웨슬리에게 가져다 준 두 번째 변화는, 이전에는 엄격한 교회주의자였던 웨슬 리가 회심 후에는 보다 복음적이고 열정적인 전도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오 교수는 "회심 이전의 웨슬리라면 야외 설교나 평신도 설교를 받아들여 활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실제로 웨슬리는 미국 조지아 선교 시절 영국국교회에서 세례받지 않은 교인은 성찬이나 장례를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교회 예전에 엄격했다. 회심 이후 웨슬 리가 야외설교나 평신도 설교 등과 같이 영국국교회 입장에서 일탈해우이로 보여지는 행위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회심 이후에 그가 영혼구원에 가장 우선성을 두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오 교수는 회심 이후 복음전도 열정이 얼마나 뜨거웠는가를 전했다. "웨슬리는 회심 후 52년 동안 말을 타고 외진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는 88세의 나이에 사망 5일 전에도 32km나 떨어진 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던 열정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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