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등학교 아이들의 시를 몇 편 읽었다. 풋풋하고 신선한데다가 색다른 시선이 너무 좋았다. 그 중 몇 개만 소개해보자.
“누군가 나를 던졌다. 기분이 좋다. 오랜만에 여행 간다.”
- 도순초등학교 5학년 김민우
[2] 제목은 ‘돌멩이’이다. 누군가가 땅바닥에 놓여있는 돌멩이를 던진다. 순간 돌멩이 입장에선 두려움 그 자체일지 모른다. 우리 인생은 어떤 면에서 세상에 던져진 돌멩이가 아니던가? 그것을 ‘숙제’로 받아들이느냐 ‘축제’로 받아들이느냐는 각자 선택의 몫이다. 그런데 이 아이는 우리의 삶을 부담스런 ‘미완성의 숙제’가 아닌 모험을 위해 떠나는 ‘즐거운 축제’로 받아들인다. 덕분에 읽는 사람들까지 덩달아 신나게 만들고 있다.
[3] 길을 지나다니면서 늘상 보게 되는 돌멩이 하나에도 세심한 마음과 배려가 담겨 있는 아이는 천상 시인이 틀림없다. 다른 작품을 보자.
“고기는 이상하다.
물속에서 숨을 쉰다.”
- 안동 대성국교 2년 박주극
[4] 어른들 입장에선 전혀 신기하지 않다. 물고기는 아가미가 있어서 우리와는 달리 물속에서 숨을 쉰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기에는 사람은 물 속에서 숨을 못 쉬는데 물고기는 숨을 쉬니까 이상하다는 게다. 지식과 경험으로는 절대 안 보이는 건데 원초적 순수함으로는 보이는 거다. 하나만 더 보자.
[5] 의성 이두국교 5년 박희영의 작품이다.
“비가 그렇게 내리고
눈이 그렇게 내리고
또 강물이 그렇게 흘러가도
바다가 넘치지 않는 건
물고기들이 먹어서이겠지.”
[6]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연중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아이의 눈에는 이상하기 짝이 없다. 그렇게 많은 물이 쏟아짐에도 바다는 넘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물고기들이 다 먹어버린 데서 찾았다. 어른들에겐 절대 떠오르지 않는 발상이다. 동심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정교한 그림을 그리는 건 힘들지 않았지만, 다시 어린아이가 되는 데는 사십 년이 걸렸다’고 말이다.
[7] 우리나라 교육현실로 봤을 때 초등학교 때까진 순수함과 창의성이 유지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인위적인 지식이 쌓여가면서 점점 어린아이의 장점이 상실되는 걸 본다. 우리나라에는 여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신동들이 많이 나왔다. 그렇다면 세월이 꽤 지난 지금 그들 중 적어도 한 사람만이라도 노벨상을 받았어야 정상이다.
[8] 그런 그들이 지금 다 어디 갔을까? 이름도 없이 하나둘씩 다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게도 탁월하고 출중했던 신동들이 지식과 기술을 배우면서부터 천재성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 교육의 심각한 문제점들이다. 오스트리아에 한 음악학교가 있다고 한다. 그 학교는 음악학교인데도 어린아이들에게 악기연주를 시키지 않는 대신 애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자연의 음들을 들려준다고 한다.
[9] 바닷가에 가서 파도가 밀려올 때 자갈과 자갈이 부딪쳐 서로의 모난 부분을 가는 소리, 고동을 귀에 대고 바다가 노래하는 온갖 신비로운 노랫소리, 대나무 숲에서 나무끼리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말하는 소리의 의미를 듣고 파악하는 훈련을 한다. 이렇게 음에 대한 순수한 감각들을 깨우게 하는 작업이 중요한데, 우리는 틀에 박힌 고정된 기술만 가르치고 있으니까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10] 아이들 시, 하나만 더 보자.
“이슬은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눈망울을 가지고 있다.
그 눈만 팔면 부자가 되는데,
마음 착해서 안 판다.
-안동 대성국교 5년 손후남
[11] 시인을 제외한 어른들 눈에는 이슬 속에 들어 있는 보석 눈망울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 증자가 지은 <대학(大學)>의 정심장(正心章)에 ‘시이불견 청이불문’(視而不見 聽而不聞)이란 말이 있다. ‘보는 것이 보는 것이 아니요, 듣는 것이 듣는 것이 아니다’란 말이다. 그런데 앞의 ‘視’와 뒤의 ‘見’, 그리고 앞의 ‘聽’과 뒤의 ‘聞’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앞의 ‘視聽’은 ‘흘려 보고 듣는 것’이고 뒤의 ‘見聞’은 ‘깊이 보고 듣는 것’이다.
[12]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서 그저 따분하다고 하는 것은 시청을 하는 것이고, <사계>의 한 대목에서 소름이 돋는 건 견문을 한 거다. ‘그랜드 캐년’(Grand Canyon) 앞에서 ‘얼른 사진 찍고 가자!’는 시청을 한 거고, 그 자리에 얼어붙는 건 견문을 한 거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흘려보지 않고 제대로 깊이 볼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헬렌 켈러는 이렇게 얘기했다.
[13] “내가 대학교 총장이라면 ‘눈 사용법’이라는 필수과목을 만들겠다.” 보지 못하는 자신보다 볼 수 있는 우리들이 더 못 본다는 것이다. 전부 다 ‘시청’만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미 에세이 50선에 헬렌 켈러의 에세이 <삼일만 볼 수 있다면>이란 작품이 나온다. 헬렌 켈러는 책 첫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숲을 다녀온 사람에게 당신은 뭘 봤냐고 물었더니, 그가 답하길 ‘별 것 없었어요’(Nothing special!)라고 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14] 자기가 숲에서 느낀 바람과 나뭇잎과 자각나무와 떡갈나무 몸통을 만질 때의 전혀 다른 느낌과, 졸졸졸 지나가는 물소리를 왜 못 보고 못 들었냐는 것이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뭘까? 탁월한 사람과 평범한 이들의 차이는 뭘까? 책을 읽고 사색을 하면서 매일 스쳐지나가는 일상에 대한 감지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어린 아이들은 창의성과 상상력이 풍부하다.
[15] 하지만 어른이 되어 갈수록 교육과 과학과 경험이 가르쳐준 지식과 상식으로 산다. 자기가 직접 느끼고 발견하고 감지하고 경험하는 새로운 시각이 죽어 있다. 그걸 깨워야 한다. 다시 살려야 한단 말이다. 어릴 때 살아 꿈틀대다가 지금은 말라비틀어지고 죽어버린 천부적인 감지력과 상상력을 어떻게 하면 다시 살릴 수 있을까? 어린아이로 돌아가는 것이다. 동심으로 말이다. 그런데 그게 생각만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16] 그게 자동으로 이뤄지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방법이 없는 걸까? 그에 대한 좋은 힌트를 나는 야고보서 1장 23~25절에서 찾았다. 거기 두 종류의 사람이 소개되고 있다. 한 사람은 성경을 읽기는 하는데 쉬 잊어버려서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읽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대로 잘 살아서 선한 열매를 맺는 사람이다. 두 사람에게 어찌 이리도 큰 차이가 나타나는 걸까?
[17] 전자는 성경을 읽기는 하는데 그저 한 번 슬쩍 읽고 마는(視聽) 경우이다. 따라서 읽은 내용이 제대로 기억에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이 자기 삶에 선한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후자는 성경을 읽되 주의를 기울여서 깊이 읽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계속 머물러서 깊이 되새김질하고 또 묵상하는(見聞) 사람이다.
[18] 그런 사람에게 선한 열매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게 비정상이 아니겠는가? 성경을 읽든 무엇을 하든 마찬가지이다. ‘대충 슬쩍 보고 지나치는 것’(look at)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지속적으로 뭔가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는 것’(look intently and abide by it)에 차이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수와 하수의 차이가 뭐라 했나?
[19] 일상의 삶 속에서 만나는 것들에 대해 그냥 지나치고 마느냐, 아니면 남다른 관심과 애정으로 깊이 관찰하고 묵상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린아이로 돌아갈 수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과 설교자들이여, 어린아이로 돌아가자! 동심으로 말이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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