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여자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는 최재천 교수님이 있다. 교수님은 순수한 자연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원래 자연은 다양한 것이란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에 취약한 이유는 사람이 돼지를 잘 사육하도록 만들기 위해 특별한 종만을 남겨 놓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종에 바이러스가 들어가면 다 전염되어 죽는 것이다. 조류독감도 마찬가지란다. 닭을 최단 시간에 사육하기 위해서 간격을 좁혀 놓고 똑같은 종으로 사육한다. 그러다 보니 바이러스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신은 원래 자연을 다양한 종으로 만들어 놓았다. 무당벌레만 해도 4500여 종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교수님은 인간의 탐욕이 코로나를 불러왔다고 말한다. 본래 자연은 바이러스가 와도 잘 견딜 수 있도록 다양하게 만들어져 있는데, 인간의 탐욕이 코로나 팬데믹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강의를 들으면서 하나님의 창조 순리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인간답고 행복한 삶을 사는 비결이라고 생각했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 삶의 많은 것이 변하게 되었다. 뉴노멀,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모든 것이 바뀌어 가는데, 붙잡아야 할 진리는 무엇일까? 어떤 환난도 견딜 수 있고, 넉넉히 이기는 힘이 복음 안에 있다고 믿는다. 본문에 보면 안디옥에서 대사도인 바울과 베드로가 정면 충돌한다. 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사건 속에 변하지 않는 복음의 위대한 진리가 숨어있다.
복음을 살아내는 영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먼저, 외식을 버려야 한다. 외식은 복음에 합당한 삶의 모습이 아니다.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을까? 12절을 보자.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야고보에게서 왔다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 온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들이 오니까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고 있던 베드로가 갑자기 일어난 것이다.
베드로가 왜 그랬을까?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구약에서 하나님께 가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인, ‘정결법’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부정한 음식을 먹거나, 죽은 시체를 만졌을 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다. 왜 정결법이 필요했을까? 죄 많은 인간이 정결함을 받지 않고는 결코 그분 앞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면서 정결법이 필요 없게 되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베드로에게도 환상을 통해서 정결법이 종결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베드로가 환상 중에 먹지 말라고 한 부정한 짐승들이 있는 큰 보자기를 보게 된다. 너무 놀라서 부정한 것을 피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 “잡아먹으라”고 말씀하신다. 베드로가 거부하니까 다시 말씀한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왜 속되다고 하느냐.” 이 일을 통해 베드로는 정결법이 필요 없게 된 것을 깨닫는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다.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는데,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다. 고넬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행 10:34-35). 이 경험으로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탁의 교제를 할 수 있었다. 이방인들과 거리낌 없는 교제를 하고 있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오자, 황급히 일어나 가버린 것이다. 베드로가 외식의 죄, 위선의 죄를 지은 것이다(13절).
그렇다면 베드로가 왜 위선의 죄를 범했을까? 베드로가 외식한 이유는 a. 두려움 때문이었다. 2장 12절에 베드로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물러갔다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믿음만이 아니라 율법도 지켜야 하나님이 받아 주신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비난받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이전에 하녀를 두려워해서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지금은 유대주의자들을 두려워해서 또다시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외식한 또 다른 이유는 b. 인종적인 우월감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우월감을 갖게 된 것은 선민사상 때문이다. 선민사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이방인들은 선택받지 못한 부정한 민족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하게 된다. 베드로와 유대 신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을 알면서도 민족적, 인종적으로 열등한 신자들을 은근히 무시하고 경멸하고 있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은 사실은 너무 귀한 일이지만, 구원받은 사실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특권 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우월감에 빠져서, 은근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복음대로 살지 않고 외식하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13절). 바울의 동역자요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인 바나바조차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된 것이다.
우리가 전도하다 보면 교회에 실망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런 분들을 만날 때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그들이 상처받은 이유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외식 때문이 아닐까? 복음이 내면화되고, 복음적 가치관이 뿌리내리지 못하면 위선적인 모습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사람을 두려워하고 위선의 죄를 범했다면 우리들은 얼마나 쉽게 넘어질 수 있을까? 하나님이 붙들어 주지 않으면 한순간 복음에서 이탈하고 위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하다. 서로 권면하고 서로 붙잡아주고 서로를 견인하고 도와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공동체 없이 홀로 설 수 있는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신앙성숙은 공동체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야 신앙이 건강해지고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최철준 목사(나주글로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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