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며칠 전 유명 인터넷 기독신문 발행인이 페북에 올린 사진과 글을 보았다. 벚꽃 위에 새들이 깃들어 있는 사진이었다. 그 위에 쓰인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꽃이 피니 새가 날아드네요.” 이 글을 보고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게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글의 순서가 맞지 않아 보여서이다.
[2] 꽃이 피어서 새가 날아드는 게 아니라 새가 날아드니 꽃이 피는 게 옳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 온 우주를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과 동물과 식물 등 모든 것들을 창조하신 이유가 뭔가? 사람을 위해서다. 그렇다면 그 모든 것들은 사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새들이 날아들어 꿀을 빨아먹기 때문에 꽃이 존재하는 것이다.
[3] 필자가 연구 목사로 있는 교회건물 위에는 커다란 글귀가 새겨진 플래카드가 두 달째 걸려 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다 볼 수 있을 정도로 크게 보인다. “당신이 꽃이어서 봄이 옵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마다 어떤 표정과 생각을 하면서 지나갈까? ‘내가 꽃이라니 기분 좋긴 하네. 그래도 봄이 오니까 꽃이 피는 건데 순서가 뒤바뀌었네?’
[4]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꽃이 피니 봄이 온다”라 해도 시가 된다. 역발상의 남다른 시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꽃이어서 봄이 온다’고 하면 더 수준 높은 시라 할 수 있다. 봄과 나를 연결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봄이 오니 꽃이 피는 걸까, 아니면 꽃이 피니 봄이 오는 걸까?
[5] 봄이 오니 그 결과 꽃이 핀다고 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내가 꽃이라면 달라진다. 내가 꽃이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게 맞다. 어째서일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의도하셨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이 존재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를 위함이다. 때문에 봄은 나라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을 꽃피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지만 말이다.
[6] 요셉을 고난과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주인공들이 누구인가? 이복형제들 아닌가? 보디발의 아내도 거기 포함되어야 한다. 하지만 요셉이 당대 최고의 나라 애굽의 총리 신분일 때 제 발로 찾아온 형제들과 보디발의 아내에게 원수를 갚았던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어째서 말인가? 그는 자기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섭리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7-8a).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8] 요셉처럼 어떤 괴롭고 억울한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배후에 역사하셔서 선으로 이끄신다는 시선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지역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보고한 내용이 정반대였다. 누구의 보고가 옳은 보고였을까?
열 명의 보고 내용이 전적으로 올바른 것이었다.
[9] 가나안땅을 함께 조사하고 온 열 명의 동료 정탐꾼들이 백성들 앞에서 한 보고의 내용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 그 자체였다. 가나안땅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건 맞지만, 거기 사는 가나안 족속들이 워낙 강해서 오합지졸인 자기네의 힘으로는 정복이 불가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특히 갈렙은 반대로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민 14:9)고 호언장담한다.
[10] 분명 그들의 보고가 틀린 보고인데, 어째서 그들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두 사람 역시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을 때는 정복불능이지만, 자기들에게 가나안땅을 선물로 약속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으로 볼 때는 불가능이 없었기에 다수의 생각과는 다른 보고를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11] 하나님은 열 명의 정탐꾼과 비교했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민 14:24)라고 평가하셨다. 원어로 하면 그들과 ‘영’(nepesh)이 달랐다는 의미이다. 영이 다르니 생각도 다르고 관점도 차이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 사람이 어떤 관점으로 보고 판단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완전히 차별화 된다.
[12] 사람마다 품는 생각과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누가봐도 틀리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식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으로 봤을 때 옳은 것이라면 옳다고 외쳐야 한다. 그렇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분이 보라고 하시는 관점으로 보고 평가해야 한다. 오늘 나부터 세상 사람들이 보는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과 성경적 관점으로 남달리 사색하고 판단하는 창조적 소수가 되었으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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