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의 아들 미스라임의 후손 블레셋
블레셋은 누구인가
역사의 라이벌 민족들은 참 많다.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이 그랬고, 그리스와 터키가 그렇다. 우리 민족과 일본은 또 어떠한가. 하지만 성경 속 블레셋과 이스라엘처럼 역사 속 적나라한 관계가 있을까?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볼 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중심의 유대 역사관을 가지고 접하게 된다. 그러면서 독자들은 블레셋에 관한 편견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다. 그런데 왜 성경은 블레셋 민족을 경멸의 대상처럼 취급하는 것일까? 예수를 버린 유대인들은 그렇다 치고 팔레스틴의 눈물은 누가 닦아줄 수 있을까?
블레셋이라는 이름은 일찌감치 성경에 등장한다(창 10:14, 21:32,34; 26:1-18; 출 13:17; 15:14; 23:31). 이들은 오늘날 아랍 민족이 주장하는 아브라함 후손인 셈족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었다. 블레셋은 가나안 해안가에 살던 7 부족 가운데 하나였다. 이들은 함족 미스라임의 후손이었다. 이들은 애굽과 크레타 섬 등을 떠돌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가나안 땅으로 들어왔다.
이들 블레셋 민족은 아브라함 일행과 일찌감치 조우(遭遇)한다. 블레셋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가나안의 북서부 욥바로부터 가사 남부까지 좁다란 해안 평야를 따라 정착한 민족이었다(창 21:32,겔 16:57).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가드, 에그론 등이 이 지역의 주요 5대 성읍이었다. 이들은 함의 자손으로 일찍이 지중해의 그레데(갑돌) 섬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하여(렘 47:4; 암 9:7) 원주민 아위 족속을 멸망시키고(신 2:23) 가나안 원주민 역할을 했던 강력한 해양 민족이었다.
성경 역사 속 아브라함과 이삭은 가데스와 술 사이 곧 지금의 가자 지역 근처 그랄 땅을 다스리던 블레셋 왕 아비멜렉(Abimelech, ‘아버지는 왕<멜렉>이시다’는 뜻)과 대면하였다. 아비멜렉은 아마 애굽의 바로(Pharaoh)나 로마의 가이사(Caesar)와 같은 블레셋 통치자의 명칭이었을 것이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누이로 알고 그 미모에 반해버렸다. 아비멜렉은 그녀를 취하려 했으나 꿈에 현현한 하나님의 경고를 받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라 칭하면서 그가 아비멜렉을 위해 기도하는 자라 소개한다. 창조주 하나님이 블레셋 통치자 앞에 직접 현몽하여 대면하였다는 것은 대단히 미스터리한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모든 세상과 모든 인간의 창조주 아니신가.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자기중심으로 사람들을 편 가르기 해왔던가. 하나님은 블레셋의 하나님이기도 한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그녀를 돌려주며 자기 땅에 거하도록 허락한다(창 20:1-18).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에게 양과 소와 노비뿐 아니라 은 천 개를 주며 블레셋 땅 어디든 아브라함 보기에 좋은 곳에 거할 편의를 베풀었다. 이때 아브라함이 기도하매 하나님은 막혀있던 아비멜렉의 집 모든 태(胎)를 열어 출산의 은혜가 임하게 하였다. 이 사건 속에서 아비멜렉은 자기 목숨을 위해 아내 사라를 블레셋 통치자에게 바치려던 졸장부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너그러운 인물로 묘사된다. 이후 자기 종들과 아브라함의 종들이 우물로 인해 분쟁이 생기자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고 그곳을 ‘브엘세바’라 했다(창 21:22-34).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운명적 갈등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뿐 아니라 미스라임의 또 다른 후손인 블레셋과도 역사 속에서 끈질긴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블레셋 지역은 악과 우상이 가득한 곳이었다. 하나님은 잡신과 우상과 악으로 가득 찬 이 땅을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겠다 약속한다. 여기서부터 블레셋 민족과의 끈질긴 악연이 이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스라엘은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빼앗기기도 했으며(삼상 4장) 블레셋은 사울과 다윗의 주요한 대적 상대였다. 소년 다윗이 용감하게 상대한 온 유대 군사를 벌벌 떨게 만들었던 유명한 거인 골리앗 장군도 바로 블레셋 사람이었다. 다윗과 다윗의 용사들은 이들 블레셋과 끈질긴 전투를 벌이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삼하 21:16-22, 23:8-19).
원래 거인족인 아낙 자손들은 헤브론에 살고 있었으나(수 11:21; 14:12-15) 블레셋의 가드와 가사와 아스돗으로 피신한다(수 11:21-23). 아낙의 세 아들인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의 후손들을 헤브론에서 쫓아낸 사람은 백전노장 갈렙이었다(수 14: 12-15; 15: 13-14). 골리앗도 블레셋 가드 사람(삼상 17:4; 삼하 21: 16-22)이었는데 마지막 아낙 자손이라는 설도 있다. 결국 세력이 약해진 아낙 후손들은 블레셋에 동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무엘 시대, 블레셋 우상 ‘다곤’(물고기 우상) 예배의 중심지는 아스돗(Ashdod)이었다. 본래 아낙 자손이 땅이었던 이곳은 ‘견고한 곳’, ‘요새’, ‘성채’란 뜻을 가진 블레셋의 대표 성읍이었다(수 11:22; 수 13:3; 암 3:9). 블레셋 족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빼앗아 이곳에 있는 다곤 신당에 두었다가 재앙을 경험하고는 곧 돌려보내게 된다(삼상 5:1-8). 아스돗 북쪽으로 에그론이, 남쪽 약 16㎞ 지점에 아스글론이, 남서쪽 29km 지점에 오늘날의 가자가 있었고 내륙으로 가드가 있었다. 삼손이 눈을 뽑힌 후 끌려가 옥에서 맷돌을 돌린 곳은 가사(가자, Gaza, 삿 16:21)였고 가드는 아스돗에서 법궤가 옮겨간 곳이었다(삼상 5:8). 이 언약궤는 다시 에그론 성에 잠시 보관되었다(삼상 5:10). 하지만 독종 재앙에 놀란 블레셋 사람들은 7개월 후 이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된다. 이곳은 가나안 정복 전쟁 후 유다 지파의 영토가 된다(수 15:46-47).
역대기는 유다 10대 왕 웃시야가 가드 성과 야브네 성과 아스돗 성을 헐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아스돗이 다시 블레셋 땅이 되었다가 재탈환되었음을 알 수 있다(대하 26:6), 선지자 아모스는 이곳의 멸망을 예언하기도 했다(암 1:8; 3:9-10). 결국 이곳은 앗수르의 사르곤 2세에 의해 함락되었고(사 20:1), 주전 163년 유다 마카비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이스라엘 적대 세력의 중심이었으며. 주전 147년 로마의 폼페이우스에 의해 자유 도시가 되었다가, 주전 30년 헤롯 대왕의 통치하였다.
포로기 이후 느헤미야 당시 아스돗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려 한다(느 4:7-9). 예루살렘 성벽이 완공된 후 느헤미야는 개혁을 단행하였는데, 특히 바벨론 포로 시 이스라엘 남자들이 아스돗 여자들과 결혼해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들이 유다 말은 하지 못하고 아스돗 말만 하는 상황을 목격한 느헤미야는 통분히 여겨 크게 책망하였다(느 13:23-27). 신약 시대 이곳은 ‘아소도’라 불려졌다(행 8:40)
솔로몬 시대 잠시잠간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평화를 되찾는다(왕상 4:2!). 하지만 이후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으로 인해 함께 정복당하고 유사한 유랑의 민족으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이 두 민족은 다시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틴의 이름으로 나누어져 그 끈질긴 운명적 갈등과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미스라임 후손들의 미래
애굽과 블레셋으로 대표되는 미스라임의 후손들은 성경적으로 분명 이스라엘 민족과 끈질긴 인연을 맺은 민족이다. 블레셋은 늘 이스라엘과 긴장 관계에 있었으며 애굽 왕 바로도 이스라엘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었다(출 14:17; 롬 9:17, 18). 애굽은 거짓 신을 섬기는 대표적인 나라였을 뿐 아니라(출 12:12), 성경에서 애굽은 늘 거만하며 정욕적이고(출 23:19-21) 행음의 지역이었다(겔 23:3). 또한 애굽은 상징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영적 소돔이었다(계 11:8).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던 국가가 세상에 어디 있었던가? 이스라엘도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의 초기 시대를 빼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국가요 민족이 되어버렸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차별이 없으시다는 점이다. 정말 놀라운 일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는 이 애굽과 앗수르에게도 은총을 베풀고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사 19:25).
비록 일부 이질적 교리를 가졌지만 애굽은 오늘날 콥트 기독교를 유지하고 있다. 콥트 교회는 세계 교회 중에서 아주 역사가 오래된 교회 가운데 하나다. 교회사가 유세비우스(주후 260-340경)에 따르면 전도자 마가가 애굽의 알렉산드리아로 와서 기독교를 전파하고 교회를 세웠다 한다. 즉 마가가 말년 이집트로 건너와 기독교 복음을 전하면서 콥틱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콥트’란 명칭은 아라비아 반도로부터 들어온 무슬림들이 7세기 이집트 지역을 정복했을 때 이집트인들을 헬라어로 아이굽토스(ai“gupt”ios)라 부른데서 기인한다.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핍박과 박해를 피해 피신했던 남쪽 이집트 도시 ‘쿱토스’(오늘날 쿠프트, 구브탄)에서 주로 살고 있었다. 콥트란 용어는 초기 이집트인을 순전히 인종적 차원에서 지칭한 것에서 이집트인 중 기독교인을 일컫는 인종-종교적인 의미가 되거나 콥트 교회의 예배의식을 일컫는 순전히 종교적 용어로 변한 것이다.
애굽은 유아 시절 예수님께서 헤롯의 박해를 피해 부모와 더불어 긴급 피신한 지역이기도 했다. 콥트 교회는 지금도 그 흔적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콥트 기독교인들은 세찬 핍박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유적들을 지켜온 것이다. 마가의 전도로 애굽의 대도시 알렉산드리아는 기독교 도시로 변했다. 이곳은 일찌감치 하나님이 예비하신 도시였다. 바로 주전 2-3세기 중요한 성경 헬라어 역본인 칠십인 역(Septuagint)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콥트 교회는 자신들의 교회 원년을 서기 284년으로 한다. 이 해는 디오클레시안(Diocletian)이 로마 황제로 즉위한 해였다. 교회 역사에서는 이 황제의 통치 기간을 ‘순교자의 시대’라 부른다. 극심한 교회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콥트 교회는 이 핍박을 견뎌냈다. 콥트 교회는 또한 수도원 운동이 시작된 교회이기도 하다. 이들 콥틱어로 번역된 신약성경은 오늘날 성경사본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트 교회는 세계교회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서기 451년 칼케돈(오늘날 터키지역)에서 개최된 제 4차 기독교공회의에서 콥틱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콥틱은 삼위일체는 인정하나 기독론에 있어 단성론(單性論)을 주장하여 세계 교회와 갈라졌다.
중동에 불어 닥친 민주화의 바람과 이슬람의 압박 속에서 미스라임의 후손인 이들 애굽과 팔레스틴과 이들 속의 소수 기독교인들의 미래는 어떠할까? 과연 이들 소수 기독인들이 우리들 신앙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지금도 이들은 온갖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세상의 불의와 불신과 악함에 대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다시 말하건대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신 것이 어디 있는가? 우리 민족 반만년 역사도 우상과 함께한 역사였음을 기억하자. 하나님은 놀랍게도 함족 미스라임을 셈족 이스라엘, 앗수르와 더불어 나의 손으로 지은 “나의 백성”이라 부르면서 사랑하신다(사 19:24-25). 놀랍고 충격적 계시가 아닌가! <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전 김천대·안양대·평택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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