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가 31일 오전 ‘한국사회형성과 기독교 사회복지’라는 주제로 제25회 영익기념강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가 ‘한국전쟁 전후의 월드비전 창립과 활동’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1950년 미국의 복음전도자 밥 피얼스에 의해서 한국의 어려운 선교기관을 돕기 위해 시작된 월드비전은 아동 후원 프로그램을 점차 발전시켰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기독교 자선단체가 되었다”며 “월드비전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인 연구는 해밀톤(John R. Hamilton)에 의해서 진행되었다”고 했다.
이어 “그는 특별히 피얼스의 기록영화를 중심으로 월드비전을 연구하였다. 월드비전의 전반적인 역사에 관해서는 킹(David P. King)에 의해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연구되었는데, 특별히 미국의 복음주의의 흐름, 선교단체들의 성향, 국제사회의 변화를 살펴 보면서 월드비전의 전반적인 모습을 가장 학문적으로 다루고 있다”며 “2019년에 책으로 출판된 이 연구는 월드비전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한다고 본다. 최근 월드비전에 대한 연구 동향은 어떻게 작은 복음주의적인 선교단체가 세계 최대의 자선단체로 발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밥 피얼스의 월드비전은 먼저,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의 복음주의의 산물”이라며 “이 복음주의는 한편으로는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주의와 같지만 변화하는 시대에 복음을 설득력 있게 전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융통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이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복음을 새로운 스타일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후 복음주의는 대중오락 매체의 전달방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특별히 밥 피얼스는 필름을 그의 사역에 크게 활용하였다”며 “다른 하나는 전후 미국 복음주의의 주요 사명은 기독교를 공산주의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였다. 이것은 전후 냉전시대의 미국의 방향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둘째, 밥 피얼스는 복음주의 가운데서도 부흥운동적인 성결운동의 전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라며 “밥 피얼스는 나사렛교회에서 자랐고, 그의 장인은 A.B. 심프슨의 기독교연합선교회에 속해 있었다. 이런 그의 배경은 아시아에서 이들과 같은 신앙을 가진 동양선교회(OMS)와 깊은 관계를 갖게 만들었다. 이런 피얼스의 신앙은 한국과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전통에서 자기의 동역자를 찾게 하였다. 피얼스의 이런 체험적인 신앙은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웃는 사람과 함께 웃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적인 배경이 된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그는 “피얼스의 사역의 출발점은 바로 이런 체험적 신앙을 강조하는 부흥집회였으며, 보켈과 같은 다른 전통의 선교사들도 여기에 함께 참여하여 온건한 복음주의를 확산시켰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 밥 피얼스는 중국과 한국에서의 위와 같은 전통의 선교사들이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 복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돕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하였다. 피얼스는 처음에 자신이 새로운 선교단체를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으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선교사들의 사역을 미국교회에 알려 그들을 도우려고 생각한 것”이라며 “피얼스는 중국과 한국에서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보았고, 이들에게 큰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이들의 신앙을 미국사회에 알려 미국교회를 각성시키려고 하였고, 아울러서 그들의 헌신을 통하여 선교단체를 도우려고 하였다. 이것은 1950년 초대 월드비전의 창립정신에 잘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후, 월드비전은 아동 후원 프로그램을 통해서 고아들을 직접 돕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고, 점점 선교단체를 돕는 것 보다는 고아를 돕는 것이 주 사업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넷째, 월드비전은 한국의 선교단체를 돕기 위해서 1950년 미국에서 시작되었고, 한국에서 선교사역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1953년에 한국지부가 만들어졌다”며 “중국의 공산화로 위기의식에 빠진 미국인들에게 1950년 6.25전쟁은 한국을 공산주의에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공감하는 계기가 되었고, 월드비전은 많은 후원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또한 “북한 공산정권의 위협에 직면한 한국 기독교는 기독교와 반공의식으로 무장한 밥 피얼스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것은 월드비전이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며 “피얼스와 함께 사역한 동양선교회, 북장로교선교회, 한경직 목사 등은 중국과 북한에서 실제로 공산주의의 위협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피얼스는 한국 기독교의 주류세력인 북장로교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지도자인 한경직 목사와의 협력을 통해서 한국 기독교에 깊숙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다섯째, 월드비전은 미국 내에서는 냉전체제를 이끌어 나가는 정치 지도자들과 연대했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반공을 중심으로 하는 장개석과 이승만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며 “이 점에서 미국 국내에서는 진보적인 기독교가 공산주의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면서 미국 주류사회에서 점점 그 영향력을 잃어갔고, 아시아의 지도자들과 의견의 불일치를 경험했지만, 복음주의 기독교는 미국 내에서 점점 그 세력을 얻어가고 있었고, 아시아에서 종교의 자유와 반공이라는 국가적 과제와 일치함으로서 상당한 정치적인 입지를 확보하게 되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이상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월드비전에 대해서 다음 몇 가지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다. 먼저, 월드비전은 복음주의 가운데 성결운동의 토양에서 자랐으며, 둘째로 월드비전은 선교기관들을 돕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업이었으며, 이것을 통하여 고아들을 도왔다”며 “셋째로 월드비전은 비록 미국에서는 작은 비주류 단체였지만 한국에서는 한국교회의 주류세력인 북장로교회와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한경직 목사를 파트너로 삼았다”고 했다.
이어 “넷째로 한국교회사학계는 밥 피얼스가 한국에 처음 온 것은 1949년 9월이고 알려졌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며 그가 처음 온 것은 1950년 3월”이라며 “다섯째로 월드비전은 다양한 선교단체를 도움으로 교파를 뛰어넘어 폭넓은 지지를 얻게 되었고, 여섯째로 아시아의 국가 지도자들과의 협력을 통하여 월드비전의 국제적인 위치는 점점 확고하게 발전했다”고 했다.
아울러 “많은 학자들은 월드비전의 성공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변화하는 사회에 잘 적응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며 “밥 피얼스는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지만 변화하는 상황에 따라서 그 시대와 장소의 필요를 잘 파악하고, 거기에 대처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월드비전의 적응력은 월드비전의 창시자인 밥 피얼스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이후 박창훈 교수(서울신대)가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활동과 그 의의’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발제가 이어졌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명수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서울신대 #제25회영익기념강좌 #월드비전 #밥피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