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신학자 다마스쿠스의 요한(676-749)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내재와 상호교제의 삶을 페리코레시스(περιχορησις)의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페리코레시스는 상호침투와 상호내재를 의미하는 헬라어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각 위격은 하나의 신적 인격이면서도 동시에 자신 안에 다른 신적 인격을 포함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대체할 수 없는 주체로서 위격들 사이의 구별은 포기하지 않으시면서도 각각의 모든 신적 인격 속과 다른 인격들 속에 상호적으로 온전히 스며들고 침투하고 둘러싸여 존재하신다. 성자는 오직 성부와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할 때만 성자가 되고 이러한 관계는 성부와 성령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삼위일체의 위격은 이러한 페리코레시스적 교제 안에서 진정한 위격이 된다. 이것은 서로를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과 교제의 공동체적 삶을 보여주는 존재방식인 것이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의 사랑과 연합의 관계는 세상을 창조하시고 세상과 관계를 맺는 하나님의 방식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삶이 사랑과 교제의 공동체적 삶인 것을 믿는 것이고, 그 하나님이 우리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시고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삼위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의 삶은 모든 피조물들의 공동체적 삶의 원형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의 자취는 그 분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삶에서도 드러나야 한다. 페리코레시스의 원형을 이해할 때 인간은 공동체적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영위할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 삶의 방식을 이해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물과 연합된 관계를 맺고 그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끼리도 공동체적인 샬롬의 삶을 이루어가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공동체성이 속절없이 무너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계화와 지구촌이라는 어휘가 무색하게 사회마다 인종간, 계층간, 문화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가족 공동체는 사랑의 근력을 잃고 주저앉고 있으며, 개인 역시 내면의 통합이 와해되어 은둔형 외톨이로 전락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는 어떤가? 사회와 동떨어진 외딴섬으로 존재하며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린채 비틀거리고 있다. 이 시대의 위기는 공동체성의 상실이다. 희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적인 관계성 속에서 공동체적 삶의 원형을 발견하는 일이다. 공동체성의 회복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며, 샬롬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랑의 관계의 회복인 것이다.
고난주간이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통해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합하며, 그 연합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낙원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마저 잃어버리고, 이 땅의 삶 자체가 저주요 고난인 인생들에게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셨다. 고난은 고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부활로 반전된다. 그것은 깨어짐이 하나됨으로, 반목이 서로 돌아봄으로 변화할 수 있는 실제적 근거가 된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의 연약함과 무능이 하나님의 지혜로 반전되기를, 인간의 무자비와 이기심이 하나님의 긍휼로 반전되기를, 무엇보다 피조물의 분열과 고독이 하나님의 페리코레시스와 샬롬으로 반전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최윤정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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