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창세기 4장 25-26절, 5장 1-8절
성경을 관통해서 흐르는 질문이 있는데 바로 ‘누가 왕이냐?’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하나님이 왕이시다’, 그리고 둘째는 ‘인간이 왕이다’이다. 이 두 가지의 해석에 따라서 인류는 두 부류로 나누게 했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대립과 갈등을 빚어왔다. 그 싸움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삶의 방식이 완전 다르다. 따라서 그 결말도 극명하게 나뉘게 되었다.
성경에서 ‘누가 왕인가?’를 묻는 첫 번째 사건은 인류의 조상 아담에게서 있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행복을 보장해 주셨다. 그러나 아담은 그만 범죄 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이 인간이 왕이 되고 싶어 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단의 유혹에 만약 아니다 하나님만이 왕이시라고 인정했다면 결코 먹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고,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는 분이시다. 아담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다. 범죄한 아담에게 가죽옷을 입혀 주셨고, 후손 가인과 아벨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훗날 가인과 아벨은 그들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셨다. 그때 자신의 제사가 거절당한 가인은 심히 분노했다. 그리고 그만 아벨을 죽여 버렸다. 이유가 무엇인가? 가인 또한 자신이 왕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사건을 말할 때 순간 충동적으로 동생을 죽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는 가인이 하나님을 죽인 사건이다. 가인은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은 하나님께 분노했다. ‘당신이 뭔데 내 제사를 받지 않냐고’ 그래서 하나님을 죽이고 싶은데, 보이지 않으니까 분풀이로 보이는 아벨을 죽은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왕이 되고자 하는 자들의 삶은 잔악함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든다. 왕이 되고자 하는 인간과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가인은 이기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아벨은 죽음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4장 25절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역사를 쓰셨다. 누구를 통해서인가? 셋을 통해서이다. 셋은 어떤 자인가? 3절에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들을 통해서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자이다. 그런데 가인의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은 다시 파괴되었다. 하나님의 역사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담의 형상을 닮은 셋을 다시 낳게 하셨다. 아담의 형상을 닮은 셋을 낳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아들을 통해서라는 말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류의 역사를 볼 때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삶은 비참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이 왕이라고 여겼고 세상이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니다. 하나님은 왕으로 여전히 계셨다. 죄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가셨다. 마치 가인이 아벨을 죽이면 자신이 왕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셋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이 왕이심을 드러나게 하셨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의 나라가 이기는 것 같이 보인다. 불의가 정직을 이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길 바란다.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써 내려 가실 것이다. 누구를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들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시길 축복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예배하는 자들을 통해서이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26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셋의 자손 에노스는 예배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예배는 창조의 목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는 과정이다. 타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가? 육체의 욕망을 끊고 거룩의 길로 나갈 수 있는가?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정직과 공의를 지킬 수 있는가? 예배할 때이다. 우리 모두가 예배를 타협하지 않고 예배자가 되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상을 승리하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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