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번역 선교사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고, 그 길을 가기로 결정했던 때가 기억납니다. 선교사의 삶이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니 하나님께서 그 길을 마련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의 길을 걷는 것만으로 내 인생의 나머지 길이 순풍에 돛을 올린 배처럼 순항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선교사로서 살아가는 길목의 고비고비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 지 선택해야 했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선택은 여전히 낯설었으며, 밀려오는 압박감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지요.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지 몰랐거든요. 그래서 고민하게 되고, 방안을 찾아보려 이곳저곳을 정신없이 뒤졌습니다. 뭐, 사람마다 나름대로, '아, 이것을 선택하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믿는 구석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확신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었지요. 혹 있다 하더라도,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데는 단기간에 이룰 수 있는 속성 과정이 없다는 겁니다. 어떤 특별한 영적인 경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이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는 속성 과정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더라구요.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을 알아가는 영적 내공이 차근차근 쌓일 때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기준이 더 명확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의 연륜을 무시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이 지시하신 대로, 정든 고향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아브람이 고향을 떠나는 과감한 선택을 했던 것은 자식을 주겠다고 자기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신이 아브람을 찾아오셨다는 겁니다. 그 이전에 자기를 찾아온 신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전부 다 아브람이 찾아갔었지요. '여호와'라 불리는 이 신만이 유일했습니다. 그리고 이 신은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겠다는 것만 아니라, 그 자식의 후손이 매우 대단한 민족이 될 것이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람이 자신에게 아이가 생긴다는 것과 그 아이의 미래가 매우 밝을 것이라는 이 희망찬 약속을 여호와 신으로부터 들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확연하게 알아챘을까요? 불가능한 얘깁니다. 아브람에게 당장 가장 중요한 이슈는 '자식 얻기'였을 것입니다. 다른 것은 아이를 얻고 난 후의 일입니다. 자신에게 너무나도 절실했던 '자식 얻기'가 가능하다는데, 어찌 고향을 떠나라는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런 아브람이 어찌 처음부터 단단한 믿음의 소유자였겠습니까? 그는 이제 막 하나님을 알아가는 첫 걸음을 뗀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브람이 고향 땅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향한 것을 두고 히브리서에서는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믿음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고 칭찬한 것을 보며, 여기에 어떤 영적인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내가 처음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배웠을 때는 아무도 나를 대단한 믿음의 소유자로 보지 않았지요. 그러다가 선교사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한 것을 알았을 때부터는 다들 '대단한 믿음'을 가진 자로 나를 쳐다보았답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른 '특별한 믿음'을 가진 자로 여겼지요. 나의 믿음은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별볼일 없는 믿음이었는데도 말입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는데, 다만 내가 선교사가 되기 결정한 것밖에는 없는데 말입니다. 아무도 내가 그런 믿음의 상태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나의 불안정한 믿음을 알고 계셨을 것이 뻔합니다. 그럼에도 이런 나를 선교사로서 자격이 없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불완전한 믿음을 선교지에 있는 동안에 좀더 온전한 믿음, 좀더 흔들림이 덜한 믿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이 바로 나와 같은 믿음의 소유자였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브람이 처음에 가졌던 믿음은, 자기를 찾아와서 자식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무작정 떠날 만큼 자식에 대한 절박함 때문에 생긴 믿음이었지요. 자기를 찾아온 여호와라는 신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그 신뢰감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아브람이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의 그의 행보는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아브람이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이집트 왕 바로에게 넘겨버린 것은 정말 비호감이지요. 여성을 짐짝 취급했던 그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는데, 오늘 이 시대에는 더더욱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대목입니다. 아무리 그 당시에 있을 법한 문화라 하더라도, 같이 살던 남편이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보내는 것이 가당키나 한 짓일까요?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이 통할 수가 있을까요?
한편, 이런 일을 당한 아내 사래 자신의 자존감(심)은 어땠을까 싶네요. 그것도, 남편이란 작자가 하는 말이,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또 당신 덕분에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라니 말입니다. (12:13) 이 어찌 비루한 인간의 본보기가 아니라 할 수 있겠는지요! 개역개정에는 자기 자신이 안전하고 목숨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설득하고 있는 것으로 나옵니다. 고대 시대를 조명한 영화 속에, 노예나 하층민의 아내를 힘있는 자가 강제로 빼앗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럴 때면, 힘없는 남편의 처절한 절규가 내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곤 하지요. 여자를 빼앗아 가버린 그 작자에 대한 미움에 나도 함께 동참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여기 아브람은 어쩔 수없이 빼앗긴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먼저 자발적으로 아내를 포기해 버린 겁니다. 정말 비루한 모습입니다. 이런 자를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이 내내 마땅치가 않네요.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아브람의 비루함을 하나님께서는 질책하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인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바로 왕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다는 겁니다. 반면에 아브람에게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으셨어요. 아브람도 이해가 되지 않는데, 하나님의 조치는 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아무리 그의 믿음이 초보 수준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조치에 대하여 좋은 방향으로 이해를 해 보려는 시도가 여럿 있습니다. 그 중에서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의 특권으로 이해를 하려는 시도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이기에 때문에 봐주신 것이고, 바로 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징계를 당한 것이라는 해석이지요. 이런 해석은 매우 강한 반발을 일으키게 됩니다. 특히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이런 조치는 부당한 편애로 비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신 이 편애는 기독교를 거부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공평하지 못한 처사라고 보기 때문이지요. 잘잘못을 가리는 데, 자기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을 눈감아 주고, 자기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징계한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도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런 편애를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태도에 대해 나도 비그리스도인과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그러한 배타적인 편애가 그리스도인인 나에게도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공정하지 못한 하나님'이라고 낙인찍어 버리는 빌미를 제공하는 해석이 마음을 언짢게 만듭니다.
한편, 하나님이 공정하신 분이라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조치를 다른 각도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아브람의 잘못을 덮어주고 바로 왕을 징계하신 것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도 있지 않겠나는 생각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을 징계하지 않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에게 어떤 사정이 있었기에 아브람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셨을까요? 이 질문의 단서를 찾기 위하여 아브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와서 이집트 땅에 온 시점까지의 행적을 살펴보았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 땅에 와서 자리를 잡으려고 장막을 친 곳이 세겜 성이었습니다. (12:6) 그는 세겜 성 땅에 있는 모레의 상수리나무 근처에 장막을 쳤습니다. 이 "모레의 상수리나무"는 아마도 일반적인 나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세겜 성과 연관된 신성한 나무로 여겨졌던 나무였을 겁니다. 다른 말로 해서, 이 나무는 세겜 성을 지키는 수호신과 연계된 나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나무에 대해서는, 아마도 옛날 우리 시골 동네 밖에 온갖 색색의 헝겁을 걸어놓은 고목나무를 떠올리면 조금 더 이해가 될 듯싶네요. 그 동네를 지키는 수호신이 있다고 믿는 신성한 나무로 여기고, 그 앞에 제물을 놓고 제사를 지냈던 광경을 떠올려 볼 수 있는 상수리나무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 자리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 땅을 자손에게 주겠다고 하신 겁니다. 세겜 땅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약속하시기를,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12:7) 하십니다. 수호신이 지키는 세겜 땅. 그런데 그 땅을 아브람에게 주시겠다는 하나님. 이는 아브람의 하나님 여호와가 저 세겜 땅의 수호신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대 근동의 세계관에 따르면, 전쟁은 신들 사이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니, 모레의 상수리나무 앞에서 이 땅을 아브람 자신에게 주시겠다고 천명하신 것은 하나님이 세겜 성의 수호신보다 강하다는 뜻이지요. 가나안 땅에 들어와 처음 장막을 친 이주민 아브람이 나중에는 이 땅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이렇게 되려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보호하실 것이며, 그만큼 힘이 있으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당신이 어떤 신인지를 알려주신 겁니다. (계속)
안지영(미드웨스턴 실천신학 교수, 달라스 나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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