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기 전에
아브라함은 나의 인생 속으로 어느날 불쑥 찾아 들어온 인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불신의 불씨가 꺼지지 않는 때였습니다. 고약한 불씨는 시뻘건 혀를 내밀며 나를 태워버릴 듯 내 영혼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도무지 안식을 얻을 수가 없었고,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지나듯 지쳐가고 있을 그 때, 나를 찾아온 손님이 바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위클리프(WBT) 소속으로 파푸아뉴기니에 파송된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사라면 남다른 믿음을 가진 헌신된 사람이어야겠으나, 나는 그러질 못했습니다. 물론 주변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나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았지요. 도리어 선교사로 '헌신'한 일을 두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단하다 여겼답니다. 나의 믿음과 헌신이 그만큼 확실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누구라서 길도 닦이지 않은 마을, 수도가 없고 전기도 들지 않은 저 오지의 숲속 마을로 선뜻 나설 수 있을까요.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어린아이들까지 데리고 말입니다. 열대병이 독감보다 더 흔한 그 땅으로 두말없이 떠나는 것 - 그런 헌신이란 보기에도 쉬운 게 아닐 겁니다. 그러니 내가 그 선택을 했을 때 주변에서 얼마나 대단하게 여겼을까요.
나의 그 잘난 헌신이 허물어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선교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흔들려 버렸습니다. 실은 내가 가졌던 믿음의 정체가 통째로 흔들린 것입니다. 대단한 믿음인 줄 알았으나, 실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금이 간 믿음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 하나님을 따르는 내 삶의 언저리에는 믿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치 열탕과 냉탕을 오가듯 믿음이 흔들렸고, 흔들리는 믿음만큼 나의 삶은 혼미했습니다.
그 혼미한 믿음/인생의 시절에 아브라함이 손님처럼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을 다시 알게 되었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다시 알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인생 이야기를 접하면서, 내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는지, 내가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선교지에서 보낸 나의 삶은 성경을 번역(translating)하는 일보다 내 자신이 새롭게 변화(transforming)하는 삶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교지는 나에게 사역 장소(working field)가 아니라 인생 훈련장(training field of life)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이 뒤집어지고, 다져지고, 다시 살아난 곳이니 말입니다.
지금부터 나는 지난날 내 인생 속으로 뛰어 들어와 지금껏 함께 지내온 손님, 아브라함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을 내 인생의 의미있는 손님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이야기이기도 하니까요.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대단한 인물입니다. 히브리서에는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두말없이 '순종'한 사람이라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자기 고향에서 짐을 쌀 때, 그는 '어디로 가는지'조차 알지 못했노라고 소개합니다(히 11:8).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순종, 히브리서는 그 순종의 이유가 '믿음'때문이었노라고 못박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짐을 꾸려 도착한 '땅'의 현실에는 아직 '약속'이 도착해 있지 않았습니다. 아니, 도리어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창 12:2)는 약속이 무색해 보였습니다. 몇 해가 지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은 까닭입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상심이 크고 풀이 팍 죽어 있었을 겁니다. 상심하고 풀이 푹 죽은 아브라함... 상상이 되겠는는지요? 아무튼 이렇듯 풀 죽은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오셔서 텐트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캄캄한 하늘에 빼곡히 박힌 별들을 보여주시며, "네 자손이 저 별들처럼 세 수 없이 많을 것'이라고 다시 약속해 주십니다(창 15:5). 성경은 아브라함이 그 약속을 '믿었다'고,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고 적어 두었습니다.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바울은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이 유명한 장면을 덧붙입니다(롬 4:3).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른바 '모리아 산 사건'일 겁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가장 압권입니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는, 그리고 거기서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말씀을 듣고 두말없이 '예'라고 순종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힐 사건이지요. 히브리서는 그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기꺼이 바치려 했던 것"이라 했거니와, 그 까닭이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은 사람들 가운에서도 되살리실 수 있다고 생각"한(히 11:19) 아브라함의 '믿음'때문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아무도 그러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아무리 나 스스로, '나도 저런 믿음을 가져야지' 하고 결심해 보지만, 그 경지에 도달한 '나'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도리어 한 겨울 야외 온천처럼 의심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나'를 발견하기가 쉽습니다. 굳건한 망대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원하지만, 현실은 바람 앞에 선 갈대처럼 흔들리는 '의심'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게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칭찬하실 만큼의 아브라함이었지만, 그의 그 대단한 믿음에 걸맞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이고 있습니다. 사라가 자기의 여종 하갈을 내어주면서 자기 대신에 여종을 통해서 자식을 낳으라고 했을 때, 아브라함은 사라의 제안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의심'이 안개처럼 피어났던 것은 아닐까요? 어디 그 뿐이던가요.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함께 동고동락했던 아내를 팔아먹었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건 인간이 할 짓이 아닙니다. 자기 살자고 조강지처를 팔아먹다니 말입니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말입니다. 아마 그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도 하지 않는 짓이지요. '믿음의 조사' 혹은 '믿음의 영웅'답지 않은 모습입니다. 성경은 이런 모습을 여과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의심'의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에게 어두운 '의심'의 그늘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여기셨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지금부터 아브라함의 인생길을 따라가 보면서 그의 여정을 추적해 보고자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에 아브라함을 찾아오셨고, 그와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분은 과연 어떤 '신'이셨을까요? 그분은 지금도 그렇게 우리/나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인 걸까요? 이런 질문을 품고 말입니다. (계속)
안지영(미드웨스턴 실천신학 교수, 달라스 나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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