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해서 조직신학 분야의 인간론을 탐구하고 있다. 기독교 인간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주제는 인간이 본래 하나님의 형상 (imago Dei)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진리이다. 이 진리는 인간의 본질적인 존엄 (human dignity), 생명의 신성함 (sanctity of human life), 인간의 영광스러운 지위 (glorious status of human beings)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와 함께 같은 무게로 강조되어야 할 진리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타락 이후 인간이 처하게 된 비참한 상태에 대한 진리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고전적인 신학에서는 "인간 본성의 전적 타락"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기서 "타락"이란 "부패"를 의미한다. 따라서 영어로는 타락과 부패를 뜻하는 "depravity"와 "corruption" 그리고 오염을 뜻하는 "contamination" 이라는 용어를 함께 사용해 왔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일반적인 생식방법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의 본성은 전적으로 타락된 상태 또는 부패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자연인은 모태에서 잉태될 때부터 죄 가운데 잉태되며, 영적으로 죽은 상태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인간의 영혼과 육체 등을 포함하는 본성 전체가 죄로 물들게 되었고, 오염되게 되었고, 죄의 저주에 처하게 되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말씀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영혼이 죽은 채로 이 땅에 태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했다는 말을 좀 더 상세하게 살펴 보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모든 자연인의 영혼은 죽어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인간의 몸, 육신도 죄의 저주와 오염으로 인해 죄의 노예가 되어 죄의 병기로 사용된다. 또한 생물학적인 생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육신은 연약하고, 병들고, 늙어지고, 끝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인간의 영혼과 몸이 결합할 때 생기는 인간의 마음도 부패하게 되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렘 17:9)이라고 선포했다. 인간의 마음이 이 세상 모든 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는 선언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은 인간의 속 즉 마음에서 온갖 더러운 것들이 나온다고 설파하셨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마 15:18-20).
인간 마음의 부패는 인간의 양심의 부패와 연결된다. 양심은 하나님이 인간 마음에 심어 놓으신 도덕적 감각과 의식과 판단의 기능을 담당한다. 양심이 죄로 인하여 부패하게 됨으로 인간은 선악을 분별할 수 없는 삶, 즉 가치가 역전된 상태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선을 악이라고 하고, 악을 선이라고 하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로마서 1장 32절은 이런 상태의 인간에 대하여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고 고발하고 있다.
죄는 인간의 지성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것을 영어로는 "noetic effect of sin" 이라고 표현한다. 죄로 인하여 인간의 지성은 어두워졌고, 구부러졌고, 왜곡되었다. 타락 전 아담의 지성은 밝고, 빛났고, 포괄적이고, 정밀하고, 예리했지만, 죄는 인간의 지성을 심각하게 훼손했다. 그 결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는 영적인 무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참과 진리는 거부한 채, 거짓을 추구하고, 거짓을 믿고, 거짓을 따라 살아가는 비참한 존재가 되었다.
죄는 인간의 감성에도 엄청난 해악을 끼쳤다. 인간의 감성은 균형감각을 잃었고, 방향을 상실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분노 조절에 실패하게 되었고, 사랑해야 할 것을 미워하고, 미워해야 할 것을 사랑하는 감정적 도착증에 빠지게 되었다. 또한 아름다운 것을 추하다고 하고, 추한 것을 아름답다고 하는 감성적 가치전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감사와 기쁨 보다는 원망, 짜증, 불평이 인간의 감성적 기본 자세가 되었다. 심한 경우 도박과 포르노와 마약 같은 것들에 대하여 극단적인 중독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었다.
죄는 인간의 의지에도 심각한 재난을 가져왔다. 인간의 의지는 역방향으로 질주한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선을 선택하고, 행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의지는 죄에 속박되어, 죄에 사로잡힌 욕망을 따라 악을 선택하고 행하는 죄의 노예가 되었다. 그 결과 타락인이 계획하고, 결심하고,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악한 것으로 정죄 받게 되었다.
죄는 인간의 관계성에도 막대한 해악을 끼쳤다.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야 할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판단하고, 미워하고, 죽이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서로를 높이며 서로의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짓밟으며, 서로를 이기적으로 악용하고 착취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인간관계는 적자생존의 원리에 기초한 극도의 경쟁관계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관계로 타락되게 되었다.
요컨대 하나님을 대항하여 반역하고 범죄한 인간은 전적인 타락의 상태에서 영원한 멸망을 향하여 질주하고 있는 비참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오해를 정리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것은 인간본성의 전적타락이라는 진리가 인간은 통째로 악의 덩어리라는 것을 뜻하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된다.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는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말인가? 교회 역사 동안 일부의 신학자들은 인간에게 선한 것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되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은 훼손된 채로 잔존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필자는 이 견해가 성경이 가르치는 바라고 믿는다.
인간 본성의 모든 부분은 죄로 인하여 심각하게 훼손되고 오염되었기에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결코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어낼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훼손되고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그러하기에 수직적인 또는 영적인 의미가 아닌 수평적인 차원에서 인간은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다. 물론 이 "선한 일" 조차도 영적으로 볼 때에는"더러운 옷" (사 64:6)과 같은 것임은 분명하다.
인간 본성의 모든 부분은 죄로 오염되고 훼손되어 있다. 그의 영혼은 죽어 있으며, 하나님의 원수로서 그는 날마다 악하고 거짓된 것을 의욕하고, 선택하고, 행한다. 인간이 생물학적인 죽음을 경험하는 날 그는 영원한 멸망으로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 비참과 저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 죄값을 대신 지불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다. 장사된지 사흘만에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를 개인적인 주님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모든 자마다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정성욱 교수(덴버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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