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웅 집사(평내교회)
하나가 하나이긴 쉽다. 쉬운 게 아니라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어떠한 어려움도 없고 그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그 하나에게 연합이나 사랑과 같은 개념은 적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럿이 하나이긴 어렵다. 어려운 게 아니라 불가능하다. 피조 세계에 존재하는 그 어떤 것도 결코 여럿이 하나가 될 순 없다. 1+1=1 이 등식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자연의 법칙 안에선 여럿이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여럿이면서도 완전히 하나이신 유일무이한 존재가 있다. 바로 삼위 하나님이시다. 개혁교회가 공통적으로 받아들이는 세 일치신조(Three Forms of Unity) 중 하나인 벨직 신앙고백서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시작하는 제8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이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본질상 단 하나의 본질이시며 그 안에 비 공유적 속성에 따라 실제로 진실로 그리고 영원히 구별되신 세 위격,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계신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고전 8:4-6; 마 3:16-17, 28:19).”(신호섭, ‘벨직 신앙고백서 강해’ 149쪽)
헤르만 바빙크는 하나님의 속성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이름들을 고찰하고 이를 다룬 교부들을 연구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만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갖는 영광은 무엇보다도 이 단일성이, 얼마나 절대적이든 간에,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어떤 추상적 단일성,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바로 최상의 단일성을 전개하는 존재의 충만, 무한한 생명의 풍요함이다.”(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2’ 376쪽)
삼위일체 교리를 떠올린 이유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이 다양성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본질은 영원히 구별되신 세 위격의 완전한 연합이다. 이를 지향하는 지상 교회의 다양성은 서로를 향한 사랑과 연합의 소중한 장이다. 다양하지 않은 곳에서 연합이나 사랑과 같은 개념이 존재할 수 없다. 고로 다양한 교회의 모습이 결코 서로를 향한 정죄의 과녁이 되어선 안 된다. 앞서 인용한 바빙크의 문장에 교회를 넣어 다음과 같이 말해보고 싶다.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지역교회의 다양성을 포함하는 보편 교회의 단일성이 우리에게서 나타나는가?”, “교회는 다양성 가운데 최상의 단일성을 풍요로이 전개하는 곳인가?”
‘기독교 교파 한눈에 보기’ 이 책을 만나며 느낀 점들이 너무 많다. 그것들을 함께 나눔으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꼭 집어 들게 만들고 싶어 이 둔한 글을 쓰게 됐다. 책의 내용은 이 책을 꼭 사서 봤으면 하는 뜻에서 거의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을 만나며 든 몇 가지 생각들을 나눠본다.
먼저는 왜 여태 이런 책이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나의 부모가 내 형제들을 어딘가에 숨겨 놓거나 멀리 떨어뜨려 만나지 못하게 하고 이들의 존재에 대해 오래도록 말하지 않았다고 상상해보자. 너무 이상하지 않은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내 감정은 어떨까. 형제들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보지 못했고 부모가 그들과 나를 이간질해서 내가 그들을 나쁜 존재로 알고 있었다고도 상상해보자. 너무나 슬프고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이웃 교회, 이웃 교파에 대해 한동안은 이런 상태였다고 본다. 심지어 이 책에서 언급하는 어느 교파를 향해 이단이라고까지 배웠다.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 안에서 다른 교단에 대해 배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각 교단의 역사 신학자들은 대체로 자기 교단의 역사만 정리했고 그걸 가르쳤다. 나와도 진작에 나왔어야 할 책이었다.
이 책을 만나며 들었던 또 다른 느낌은 책이 정말 얇다는 점이다. 2000년의 교회 역사를 이렇게 얇게 정리하다니. 지역교회의 성도들이 보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는 분량이다. 수천 페이지의 교회사 책들을 일반 성도들이 모두 읽을 순 없다. 이 책의 분량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 정도는 모든 교회(성도)가 반드시 알고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점을 기준으로 교회를 크게 로마 가톨릭교회, 동방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로 나눈다. 이 부분에서 보편교회의 중요한 기준과 개신교의 분열의 정황을 다룬다. 그 이후 다시 개신교의 8개의 교파를 소개하는데, 이를 역사적-교리적으로 설명한다. 이 책은 이렇게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책의 구조와 흐름이 명확하고 간결하다. 거기에 더해 꼼꼼하고 치밀한 목차도 인상적이다. 저자의 학문적 성실함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어투는 공손하고 정중하다. 이건 너무 당연한 건데 이상하게도 너무 신선했다. 그간 자신의 진영이 아닌 다른 진영을 언급하는 글들이 보이는 공격성에 너무도 익숙했었나보다. 이 책은 얇고 풍성하다. 그리고 참 따뜻한 책이다.
또 하나는 다양성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더욱 긍정하는 측면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이다. 바람직한 선순환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인식하는 주체가 복음적이고 겸손하다는 전제 하에 앞의 명제에 대한 역(逆)도 분명 성립할 것이다. 자신을 겸손하게 긍정한다면 타인에 대해서도 그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오래도록 배워왔고 그래서 겨우 조금 알게 된 개혁신학에 대해 좀 더 겸손하고 진지하게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개혁신학이 최고요 유일무이하다고 외치는 책을 통해선 느끼기 어려운 새로운 경험이었다. 다른 곳을 긍정하고 존중하며 그곳과 나의 지점을 겸손히 비교해 볼 때 생겨나는 선한 의욕은 결코 공격적일 수 없다. 해석의 선순환이 경험되는 순간이었다. 상대방을 통해 나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를 제대로 알아야 상대방을 알 수 있다. 이 당연한 상식을 아이러니하게도 참된 진리를 추구한다는 우리들에게선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린 늘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 있을 뿐이었다.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기독교의 다른 여러 교파들을 살펴보고 관심을 가지게 될 때 오히려 내가 속한 우리 교회를 더 잘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짜릿한 역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2012년도에 부흥과개혁사에서 출간된 ‘일반 은총과 문화적 산물(송인규)’에 보면 그 책의 내용 전반을 딱 표 하나로 정리해놓은 페이지가 있다. 2016년 영음사에서 출간된 ‘언약신학, 쟁점으로 읽는다’에서도 17세기의 다양한 신학자들의 언약 신학에 대한 입장이 한 페이지에 표 하나로 정리되어 있다. 그 표도 거의 그 책의 내용 전부였다. 이 책도 그러한 페이지가 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를 포함한 10개 교파의 주요한 구분점들을 표 하나에 정리해놓았다. 책을 읽은 독자들이라면 그 표 하나로 책의 내용이 아주 깔끔하게 정리될 것이다. 연이어 두어 페이지 정도에 걸쳐 등장하는 연대표도 책의 내용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서점에서 표만 얄밉게 좋지 않은 방식으로 갈무리 할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표는 책을 전부 읽은 이들에게서 빛을 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150페이지도 안 되는 책이니 꼭 구입해서 읽어보시길 권한다.
이 글의 첫 문단을 수정하며 마무리하고 싶다. 자연의 법칙 안에선 여럿이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부분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교회(신자)는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우린 물리적 존재이면서도 초자연적인 존재다. 우린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이 말은 마이클 하이저가 그의 책 ‘보이지 않는 세계’(좋은씨앗, 68-78쪽)에서 언급했다). 우린 육적인 존재이며,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다. 영의 법칙, 즉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사랑하고 주 안에서 하나 될 것을 우리에게 명한다(요 13, 15; 고전 1; 엡 2, 4). 다양한 모습을 지닌 우리들이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우리 역시 분명히 구별되면서도 하나로 존재할 수 있다. 하나 됨을 지향하는 우리는 다양성을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 풍요로움을 누리는 우리는 결국 그 안에 중요한 공통점을 바라보며 하나 됨을 더욱 지향하게 될 것이다. 자유 안에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일치를 경험할 것이다. 교회는 그 장이며, 이 책은 그 장을 우리에게 거의 처음으로 그리고 제대로 또 쉽게 소개한다. 모든 교회가 읽어야 할 필독서로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In Necessariis, unitas; in non necessariis, libertas; in utriusque, caritas!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 사랑을! (17세기 독일 신학자루퍼투스 멜데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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