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1984>는 초인적 능력을 지닌 주인공이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거대 악당을 물리친다는, 히어로물의 관습을 충실히 따른 영화입니다. 이야기는 익숙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향해 진행되기에 특출날 것은 없지만, 여성 캐릭터를 향한 올바른 시각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흔치 않은 미덕을 지닌 영화라고 하겠습니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공정하고 건강한 시각
여성 히어로물은 여성을 투사로 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성적 매력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등 여성 주인공을 남성의 시선이 원하는 볼거리로 손쉽게 다루곤 했습니다. 혹은 막강한 힘을 가졌음에도 단지 남자와의 사랑 때문에 제약을 겪게끔 하거나, 남자와의 사랑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하게 함으로써 ‘힘을 가진 여성일지라도 결국에는 남성에 종속되는 존재일 뿐’이라고 은근히 말하기도 했지요. 또 한편으로는 ‘여자는 자식에게 모든 것을 건다’는 맹목적인 모성애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여성 주인공을 얄팍하게 그려왔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원더우먼 1984>에 이런 식의 관습적인 표현방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인공은 사랑했던 남자의 죽음이라는 슬픔을 안고 살아가던 중, 죽었던 애인이 칠십 년 만에 눈앞에 나타나자 어떻게 된 일인지 분별하지도 않은 채 행복에 겨워합니다. 이러한 설정은 아무리 능력 있고 당당한 여성일지라도 사랑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어쩔 수 없는 여자’라는 낡은 고정관념을 영화가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한 것처럼 여겨지게 합니다.
이 영화의 빌런(영화 속 악당을 지칭하는 말)인 또 한 명의 여성 캐릭터는 원더우먼의 동료였지만 그녀를 향한 질투와 열등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인지 원더우먼은 전투 중에도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유지하는 반면, 치타는 그저 포악스러운 육식동물의 모습일 뿐이죠. 여성 감독조차도 ‘여자들이란 질투하는 존재’ 내지는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걸까요.
이러한 작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원더우먼 1984>는 여성 주인공을 자주적이고 강인한 모습으로 그려낸 좋은 영화임이 분명합니다. 그녀는 실연의 아픔으로 힘겨워하지만 곧 각성하고 영웅다운 능력을 되찾게 되지요. 전편인 <원더우먼>(2017)에서도 그녀가 인간 세계를 구하겠다고 나선 것은 이성애나 모성애 때문이 아닌, 어디까지나 인간들을 구하려는 박애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주체적 결단에 의해서였습니다.
주인공이 날아오는 총알을 막아내거나 올가미를 이용해서 상대를 무력화하는 장면들은 근사할 뿐 아니라 원더우먼이라는 히어로가 갖는 보호의 능력, 나아가 박애의 정신을 상징합니다. 주인공이 번개를 이용해서 하늘을 날 듯이 이동하는 장면은 역동적이고 장쾌한 시각적 쾌감을 제공함은 물론, 그동안 남성 캐릭터의 것으로만 여겨졌던 힘을 여성에게도 부여함으로써 나약하고 의존적이었던 기존의 여성 이미지를 극복하는 좋은 장면으로 평가받을 만합니다.
한편, 여성 중심의 서사에서 남성은 우스꽝스럽게 그려지는 역차별을 당하기 십상이지만, 원더우먼은 이런 오류에 빠지지도 않았습니다. 이 시리즈에서 남자 주인공은 원더우먼과는 별개로 영웅적인 희생을 감내하는 등 영화는 남성을 넉넉한 시각에서 묘사하고 있지요.
그 밖에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TV시리즈(1975~1979)와는 달리 원더우먼의 의상에서 미국을 연상케 하는 문양이 말끔히 사라졌다는 점이나, 그녀의 출생지를 미국이 아닌 제3세계로 설정함으로써 영화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한다는 점 또한 미덕이라고 하겠습니다.
왜 하필 1984년인가?
영화의 제목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떠올리게 하는데, 소설에서 국가는 전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생각까지 통제하려 합니다. 이 영화의 악당 또한 타인의 정신을 통제하는 능력을 얻게 된 후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야욕을 달성하려 들지요.
이러한 영화 속 상황은 지금의 상황과 묘하게 맞닿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전 세계는 전염병의 창궐로 인해 개인의 생활이 싫든 좋든 국가에 의해 속속들이 감시 내지 통제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어쩌면 영화 속 악당을 방불케 하는 강력한 악당이 빠른 시일 내에 우리 앞에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히어로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이라는 이웃 나라의 침략을 당합니다. 그런데 남자들 중에는 그들과 맞서 싸울 용기를 내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바락이라는 장군조차 겁을 내면서 전투에 나가길 주저하지요. 이 때 드보라라는 여성이 앞장을 섭니다. 바락을 이끌고 전투에 나가서 승리를 거두지요. 전투에서 패하고 도주하는 적장 시스라를 처치한 것도 야엘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사사기 4장). 드보라와 야엘은 그저 남성의 연정의 대상, 보호의 대상, 소유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남성 히어로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수동적 입장에 머물지도 않았습니다. 남자의 보호가 필요한, 남자에 의해서 운명이 좌우되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라 자주적이고 진취적이며 강인한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구약시대의 원더우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드보라와 야엘이 활약했던 시대 못지 않게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가 필요한 암울한 시대입니다. 원더우먼처럼 극강의 능력을 지녔으되 박애의 정신까지 갖춘 여성 히어로라면 이 시국에 딱 어울리는 캐릭터가 아닐런지요.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