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 글
한국교회의 교단 중에는 목회자가 교단의 재판을 거치지 않고 세상 법정에 호소(고소, 고발)하는 경우에 제명 등의 중징계를 하는 교단들이 있다. 그런 중징계를 하는 성경적 근거로,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게 성도 간의 문제를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권면한 것을 예로 든다(고전 6:1-8). 목회자가 교회 또는 목회자 간의 문제를 교단에서 해결하지 않고 세상 법정으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 사도의 권면을 인용하여 중징계를 하는 것은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 적절한지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반대한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교회에게는 세상 법정에 호소하지 말라고 권면했으나, 바울 자신이 유대 종교지도들에게 위협을 당했을 때는 로마 법정에 호소하여 위기를 모면했다. 따라서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하고 적용해야지 고린도교회의 단편적인 상황을 모든 경우에 적용하고 세상 법정에 고소한다고 중징계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편협한 몰이해이며, 불순한 목적을 위한 아전인수격 해석이 될 위험성이 높다.
교단에서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목회자를 중징계 하는 법을 만들 정도면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목회자들이 많은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렇지 않은데도 중징계를 한다면 그 교단은 심각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각 교단에 재판위원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목회자들은 왜 교단을 불신하고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가? 먼저 교단마다 상황이 다르고 단편적 사례들이 모든 교단의 상황이라고 장담할 수 없으며, 필자의 주관적 추측임을 전제하고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목회자들의 심정을 헤아려보고자 한다.
목회자들이 세상 법정에 호소(고소, 고발)하는 이유
1. 교단 재판위원의 전문성 결여 때문이다.
어떤 교단들은 1, 2년마다 헌법을 대폭 개정한다. 헌법을 자주 개정한다는 것은 헌법에 대한 전문지식의 부족 때문이거나 불순한 의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목회자들이 헌법을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으니 헌법에 문외한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떤 목회자는 출두했더니, 재판위원이 무슨 죄명으로 고소되었는지를 몰라서 피고인에게 죄명을 묻는 코미디 같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경우들은 교단의 재판을 신뢰하기 어렵게 한다. 차라리 세상 법정에 호소하라고 하는 것이 양심적이지 않을까?
2. 돈 없는 목회자는 재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교단에서 재판을 한 후에 세상 법정에 호소하라는 말은 성경적이고 거룩한 것 같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다. 어떤 교단들은 재판 당사자에게 300-400만 원의 재판 비용을 부담하게 하고, 추가 비용 발생 시 추가된 재판비용 전액을 부담하게 한다. 따라서 항소하면 추가 비용까지 600-800만 원을 내야 한다. 즉 세상 법정에 호소하려면 최소 600 만원 이상을 부담(착취라고 표현해야 할까)한 후에 해야 한다. 이런 현실이니 돈이 없으면 재판도 할 수 없다. 무조건 잘못했으니 용서해달라고 비는 것이 상책이다. 아니면 처음부터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것이 적은 비용으로 공정한 재판을 받는 길이다. 진정으로 바울 사도의 권면을 따르려면 재판 비용을 받지 말고 공정한 재판을 해야 한다.
3. 교단을 상대로 승소할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교단에서 파견된 임시당회장이 교단 반대 편의 장로나 집사를 제명하거나 처벌하는 일들이 종종 세상 언론에까지 보도된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재판위원들을 총회의 총회장(교단 대표)이 임명하고, 총회에서 재판위원들에게 사례(교통)비를 지급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판위원들의 직위와 사례비를 총회장(교단 대표)이 결정할 수 있는데 총회장의 의사를 거스르는 판결을 할 수 있을까? 따라서 교단에서 재판 비용을 받지 않는다고 해도 승소하긴 어렵다. 즉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교단이나 교단의 임원을 상대로 재판하여 승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교단 임원들의 모순된 행동 때문이다.
어떤 교단에서는 비정하게도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 목회자를 세상 법정에 고소했다고 한다. 그 목회자는 고소장을 읽을 수나 있을까? 읽을 수 있다면 충격으로 불행한 일을 당하게 될까 염려된다. 세상 법정에 고소하면 중징계를 내리는 법을 만든 교단의 임원들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모순된 일을 서슴없이 행한 것이다. 더욱이 잔인하게도 사경을 헤매는 목회자에게. 이런 이율배반적인 행태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당당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법을 자신들이 입맛에 맞게 만들다보니 양심이 마비된 것은 아닐까? 이런 사례는 한국교회가 추락하는 있음을 보여주는 단편적 사례인 것 같아서 두렵다.
막대한 돈과 이권이 걸렸기 때문이라고 변명할까? 바울 사도의 권면을 아전인수격으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들에게도 적용해야 맞다.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고전6:7)
자신들이 지키지도 못할 바울 사도의 권면을 이용하기 보다는 차라리 목회자들이 세상 법정에 고소하게 하는 것이 덜 세속적이고 양심적일 것이다. 더욱이 개인 목회자는 재판 비용을 자신이 부담해야하지만, 교단은 총회원(목회자)들이 낸 상회비로 재판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절대 유리하지 않은가?
5. 비상식적인 치사한 재판 때문이다.
어떤 교단의 A 목회자는 총회에서 교단 대표를 비방했다는 비판을 받아서 “그런 사실이 없다. 증거가 있다면 고소하라”고 말하자, 그 말을 근거로 본인(A 목회자)이 본인을 고소했다고 재판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했다고 한다. 교단 대표가 총회 공식석상에서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재판위원회가 취소하지 않고, 또 A 목회자 본인의 취소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실제로 문제될 것이 없자, 교단 관계자는 “계속 재판을 하기도 뭐하고, 그냥 끝내기도 뭐하니 사과만 하면 없던 일로 하겠다”고 해서 그 말을 믿고 사과를 했더니, 사과한 것을 근거로 죄를 인정했다고 징계를 내렸다고 한다.
또 어떤 교단의 B 목회자는 쌍방 합의 하에 재판을 취하했는데 차후에 또 다시 고소하고 재판 비용을 입금하라는 독촉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유사한 사례들이 종종 발생하는 것 같다. 이렇게 비상식적이고 치사한 엉터리 재판이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다니 목회자인 필자가 오히려 낯이 뜨겁고 부끄럽다.
얼마 전에 유명 목사가 “최근 신조어 가운데 하나가 코로나19 독재다… 공무원 피살 항의도 못하고… 정부가 정신차려야 한다”는 등의 비판을 했다. 정부의 수장은 대통령이니 대통령이 정신이 나갔다고 비판한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그 목회자를 징계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수장이 그 정도의 아량이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또한 목사가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선지자처럼 비판한 용기는 박수를 받아야 한다. 모든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하는 이상적인 모습이다.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는 기드온, 다윗, 모르드개, 다니엘처럼 용감하라고 설교하면서 정작 교단의 불의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이율배반적인 비겁한 행동을 하기에 교단이 타락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진리의 파수꾼이다. 나팔을 불지 않는다면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이여! 불의에 맞서는 용기를 회복하라.
교단이나 교단 대표를 비판했다고 재판하고 징계하고 제명하는 것은 세속 통치자보다도 수준이 낮고 속 좁은 유치한 행위이며, 개신교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무지한 것이다. 개신교는 루터가 천주교와 교황의 잘못을 비판하면서 탄생했다. 또한 종교개혁자들 간에도 치열한 비판과 논쟁을 했다. 이런 모습은 어떤 이들의 지적대로 부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보다는 진리를 찾아가는 힘이 되어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자유로운 비판과 논쟁은 교회가 독재와 교권주의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진리를 찾고 수호하고 또 발전하는 힘이다.
세상에 비판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무오한 인간이나 교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황이 비판을 받아야 하듯이 교단이나 총회장(교단 대표)도 비판 받는 것이 마땅하고, 비판 받는 교단과 총회장은 넉넉한 마음으로 품고 또한 자아 성찰의 기회로 삼는 겸손한 미덕을 겸비해야 한다. 그런 아량도 없는 교단은 개신교 간판을 내려놓고, 교단대표는 대표 자리를 내려놓은 것이 한국교회와 자신을 위한 길이라 생각한다.
나가는 글
필자도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저런 비판을 받는다. 아쉽게도 글을 다 읽지도 않고 비판하는 분들도 있고, 심지어 욕설을 하는 분들도 있다. 비판 글은 기분을 상하게 하고 반박 댓글을 달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비판받는 것은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한 필자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고 반성과 발전의 기회로 삼는다. 또한 욕설의 경우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넘긴다. 글을 쓰는 자유가 있듯이 비판하는 자유도 인정한다.
교황의 자리를 넘보는 교권주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면, 교단의 재판을 거치지 않고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목회자들을 비판하고 중징계 하기 전에, 왜 목회자들이 교단의 재판을 기피하고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지에 대해서 스스로 비판하고 목회자들이 세상 법정으로 달려가지 않을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세상 법정에 호소하는 것을 죄악시 하고 중징계 하는 것은 마치 거룩한 척하는 바리새주의이며, 개신교이기를 포기하고 종교개혁 이전으로 후퇴하는 범과일 수 있다.
스스로 내 얼굴에 침 뱉는 것 같아서, 또한 정의로운 교단들과 한국교회 전체가 오해받을까봐 글을 쓰는 내내 부끄럽고 마음이 떨린다. 하지만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고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허무는 것처럼, 목회자를 제명하는 유행이 퍼지면 한국교회가 몰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한국교회의 몰락을 막고 다시 개혁하고 부흥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글을 썼다. 이런 글을 다시 쓸 필요성이 없어지기를 기도하고 또한 한국교회가 종교개혁의 정신을 회복하고 다시 부흥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소망한다.
김영태 목사(참빛순복음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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