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민국에서는 알지 못하는 남성의 정자를 기증받아 출산한 사유리의 비혼모(非婚母) 출산으로 인해 관심이 뜨겁다. 이 문제에 대해 언론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을 바라보도록 하기보다 사회적 조류를 따라 긍정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울러 과거 2007년 방송인 허수경 씨의 비혼모 출산까지 기사화하여 재조명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사유리 씨의 비혼모 출산을 계기로 법제화를 시도하려는 분위기도 만들어지고 있다.
사유리 씨의 말을 들어보면 심정적으로 동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의사가) 자연임신이 어려운 데다 지금 당장 시험관을 하더라도 성공확률이 높지 않다고 했다”는 말에 “눈앞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녀는 정말로 절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기를 갖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 할 수 없었다는 그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문제는 비혼모 출산 문제를 결혼하지 않은 여성 개인의 입장에서만 여론화, 혹은 공론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문제는 모두가 더불어 사는 공동체와 세상에 태어날 아기의 입장도 충분히 고려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더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이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태도는 낙태를 전면 합법화하려는 사고 논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태아의 생존권과 사회 공동체 보존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행복추구권은 중요하다. 그러나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반드시 사회와 아기의 행복추구권도 충분히 균형 있게 고려돼야 한다. 이 고려는 여성이 사회와 아기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비록 여성의 인내를 요구하지만, 여성과 아기와 모두가 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을 가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 이성의 연약한 안목으로만 본다면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순종하면 결국 본인을 비롯하여 모두에게 더불어 복이 되는 현명한 결정이 된다.
사유리 씨로 인해 촉발된 비혼모 출산문제는 이런 차원에서 고려돼야 한다. 아기는 우리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오늘날 낙태와 관련하여 비혼모 출산 문제를 너무 개인의 행복이라는 작은 그림에만 초점 맞춘 논의가 아닌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유리 씨는 기사에서 “요즘 낙태 인정하라 있었잖아요. 근데 그거를 거꾸로 생각하면 아기를 낳는 것을 인정해라 이렇게 하고 싶어요. 낙태만이 아니라 아기를 낳는 것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라고 했다. 이 주장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여성이 아기를 죽일 권리와 마음대로 가질 권리를 주장하는 표현으로 보인다. 이 주장은 심각한 논리적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반대로 태어날 아기, 혹은 뱃속에서 죽어가는 아기들도 자기의 행복과 생존을 위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망각한 주장이다. 행복추구권을 일방적인 방향만으로 생각하는 감성적인 주장이다. 태어날 아이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자랄 권리가 있다. 이 권리는 존중돼야 한다. 어머니라고 해서 이 권리를 빼앗을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는 어머니와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유리 씨가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임신할 수 없기 때문에 정자은행을 통해 임신했다는 주장은 궤변이다. 왜냐하면 사유리 씨가 정자은행을 통해 임신한 아이도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정자라는 차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남자가 없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 누군가의 정자를 받는다는 것은 모순이다. 도리어 입양을 생각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태도가 아닌지 묻고 싶다. 비록 내 유전정보를 갖지 않은 아이지만 이미 태어난 아이를 입양해서 어머니의 삶을 산다면 더 도덕적이며, 사회적으로 모범이 되는 훈훈한 접근이 될 것이다.
이제 성경적인 관점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자. 먼저 성경은 자녀 출산하는 문제를 개인의 행복에 초점 두지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출산 목적은 “경건한 자손을 만들어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말 2:15). 사도 바울이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성경의 가르침 속에는 자녀가 우리 행복을 위한 소유, 혹은 수단이 아니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자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위탁하여 맡긴 영혼이다. 나의 행복에 지장을 준다면 죽이거나 버릴 권리는 없다. 하나님께서 주셨다면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낳고 경건하게 키우는 것이 신자의 도리다. 욥이 사랑하는 자녀들의 죽음에 대한 비보를 들었을 때,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고 고백한 것처럼, 자녀를 주시고 거두어 가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
여자나 자녀를 개인 소유물로 여기는 태도는 야만 시대의 전유물이었다. 문명사회가 되기 전에 야만사회는 여자와 자녀를 존중해야 할 인격으로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고대사회에서 여자와 자녀는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죽이거나 태어나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에게 노예로 파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졌다.
과거 여성이 약자였고 어떤 권리도 존중받지 못하던 때, 남성은 자기의 행복권을 위해 일방적으로 이혼을 요구하거나 학대를 가했다. 복음으로 문명화되지 않은 나라들이나 이슬람 국가에서는 지금도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다. 더 심하게는 여자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살해까지 한다. 우리 대한민국은 복음으로 여자들의 인권과 자기 행복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었다. 그러자 자기가 낳은 아이에게 이런 잔인한 행동을 정당화하려 한다. 자기 행복을 위해 낙태(살인)할 권리를 달라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자기 행복을 위해 아빠 없는 아이를 가질 권리를 달라고 한다. 이 시대 가장 약자인 태아들은 야만시대 처럼 살고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의 행복과 자기 결정권을 위해 생존에 위협을 받을 뿐 아니라, 태어나더라도 아빠와 엄마의 사랑과 보호를 받을 권리도 박탈될 위기에 빠졌다.
이런 주장을 하면 비혼모 합법화를 주장하는 분들은 아빠 없이도 얼마든지 자녀를 행복하게 키울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법을 어기며 자녀의 행복을 장담할 수 없다. 이것은 억지일 뿐이다. 비록 아이가 비혼모 입장에서 행복하게 자란다고 생각하더라도 그 아이 마음 속에 아빠라는 존재(개념)가 채워줘야 할 자리를 상실시킨 거대한 공허는 평생 안고 살게 될 것이다. 그 불행은 비혼모의 이기심이 심어준 결과라는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사람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역할을 통해 건강한 인격(하나님의 형상)과 정서를 소유하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외면할 수 없는 진리다. 억지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외면하려 하면 할수록 사람에게 오는 결과는 나와 너, 그리고 모두가 불행해지는 참람한 재앙을 불러올 뿐이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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