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개그우먼 박지선 씨가 모친과 함께 숨진 채로 발견됐다. 현재 경찰은 그녀의 사인을 자살로 추정하고 있다. 박 씨의 자살소식에 많은 이들이 충격을 받았다.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2019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대한민국에서 하루평균 37.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한민국은 현재 경제개발협력국(OECD) 가입국가 중 15년째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기독교인의 자살소식도 빈번히 들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심리상담학자 이경애 박사(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이화여대 외래교수)와 4일 인터뷰를 가졌다.
그녀는 “보통 자살의 공통점은 타인과 이야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의 본질 곧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공동체로 회복된다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쉼터가 되지 않을까”라며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위로다. 이들을 품어주고 정죄하지 않는 따뜻한 공동체가 지금 이 시대엔 더욱 필요하다”고 했다. 다음은 그녀와의 일문일답.
- 기독교인들이 주로 어떤 문제를 갖고 심리상담소에 찾아오는지 궁금하다.
“상담이 진행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고 새롭게 신앙관을 회복하고 힘을 얻는 긍정적인 경우가 있다. 그러나 강박적인 종교생활을 해왔거나 율법적인 신앙을 갖고 있는 경우엔 과도한 죄책감에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다.”
- 강박적인 신앙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일례로 하나님께 처벌 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런 분들이 겉으로 보기엔 신앙이 좋아 보일 수 있다. 매일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고 드리는 등. 하지만 넉넉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한 경우도 많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신앙의 동기가 확실치 않을 경우, 마음과 신앙에서 악순환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
- 정신건강이 좋지 않아 신앙의 악순환에 빠진 경우엔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편하게 받아들이는 마음 밭이 필요하다. 여기에 기초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는 선순환을 기대할 수 있다. 교회에 다녀도 소용이 없다는 비판적 의식을 버릴 필요가 있다. 2000년에 걸친 기독교 역사는 원래 풍성한 치유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교회만이 정죄하지 않는 공동체를 구축할 수 있다. 이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심적 어려움을 토로하고 ‘그래 나만 그런 게 아니야’라는 공감대를 누린다면 마음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 심리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2000년 교회 역사가 지닌 치유적 자원을 따라가지 못한다. 교회가 이것을 현대적 용어로 되살리는 역할이 필요하다.”
- 한국교회 안에서 정죄 하지 않는 공동체가 많다고 생각하는지?
“왜 사람들이 치유적 전통이 많은 교회에서 풍성한 용납을 누리지 못할까? 사회적 경쟁구도가 교회 안으로 침투해서 그런 것 아닐까? 교회도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있을 수 있다. 공부 잘하는 사람, 돈 많은 사람 등이 교회에서 대우를 더 받거나 그런 문제들이다. 어쩌면 번영신학이 이에 대한 결과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사회와 전혀 다른 공동체가 돼야 한다.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는 사람, 문제가 있는 사람도 교회에서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한국교회의 어떤 구습이 기독교인들을 우울증 등 정신 질환을 앓게 만든다고 생각하나?
“한국에서 교회문화가 개인의 정신건강에 긍정적 기여를 한 부분이 확실히 많았다. 그러나 과도한 죄책감, 타인과의 비교의식(특히 세상적 소유 측면에서)을 통해 자신의 삶이 초라하다고 느끼면, 이것이 신앙적인 자책(믿음 없음)으로 이어져 더욱 힘들어하는 경우가 있다. 한국교회 안에서 세속적 성공이 신앙의 잣대가 된 부분 등. 이런 잔재물로 기독교인들이 많이 낙담하는 것 같다.
가령 교회가 ‘믿음을 통해 축복 받는다’는 물질주의적이고 세상적 원리를 답습하는 경우다. 오히려 성공, 부, 권력 등이 믿음의 성공적 증거처럼 여겨지는 경향이다. 외모도 소유의 측면에 가깝다. 그러나 ‘믿고 축복, 믿고 성공’ 등 여전히 현세적 축복이 강조된다면 그러한 축복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낙심할 것이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믿음이 없거나 축복에서 배제된 게 아니다. 우리가 받은 십자가의 복음, 그 자체가 축복이다.
결국 한국교회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십자가 복음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본질적인 생명의 문제다. 이런 존재감을 격려하는 메시지가 (마음이 아픈이들에게) 근원적인 위로가 되지 않을까? 만일 교회가 세상적 원리에 귀착한다면 세상에서 실패한 자들은 이 세상에서 기댈 곳이 없다.”
- 그럼 박사님이 생각하시는 신앙적 본질이나 관점이란?
“스스로를 비참하게 바라보던 렌즈가 아니라 복음적 렌즈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 기독교 신앙은 ‘물이 반 밖에 없어? 물을 가득 채워줄게’가 아니다. ‘이미 물이 반씩이나 있구나’라는 전적인 자기 수용이다. 그래서 자족하고 감사하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존재’라는 관점이 복음이라고 생각한다. 소유에 초점을 두고 물을 가득 채운다는 신앙적 관점이 오히려 신앙과 정신을 더 힘들게 할 수 있다. 본질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존재를 긍정하고 감사를 회복하며 위로를 얻는 삶이다. 심리상담도 마찬가지다. 상황의 변화를 이끄는 게 아니다. 내 삶을 재해석하는 용기를 되찾는 과정이다. 심리상담도 결국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주는 제3자와의 대화를 통해 나의 삶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과정이다.”
- 죄적 본질을 지닌 우리가 전적으로 수용 받는다는 말이 서로 모순인 것 같은데.
“이게 바로 복음이다. 로마서 5장 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을 확증 하셨느니라’이다. 우리가 이미 죄인인 상태임에도 하나님은 예수를 내어주셔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것이다. 이 복음이 우리에게 전적인 위로다. 여기서만 내 존재감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죄인 된 나를 이미 수용하기로 결단하시고 자기 아들 예수를 희생시키셨다.”
- 이런 수용이 자칫 잘못하면 죄와의 타협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복음은 자신의 장·단점 모두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겸손이다. 물론 히브리서 12장 4절에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는 말씀도 있다. 그러나 신앙은 멀리 봐야 한다. 거칠고 자기 학대적인 부분으로 접근해선 안 된다. 언젠가 성화되고 성숙한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소망 가운데 있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존재를 온전히 긍정해야 오히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울 수 있다. 내가 살면서 죄로 휘청거릴지라도 하나님의 넉넉한 은혜의 장중 안에 있다는 대범한 신뢰가 있다면 성화를 온전히 이룰 수 있다.
회개란 자기 비난이 아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회개를 못한다. 극단적 자기비하는 ‘나르시즘’으로 튕겨져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심리학 용어로 반동형성이라 부른다. 보통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자기비하가 심하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지닌 장·단점 모두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복음을 통해 자기 수용이 강화되고 좋은 마음 밭이 형성되면 신앙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이기도 했다. 마틴 루터도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걸 발견했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존재 회복을 강조한 것이다. 자기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용납 받았다는 인식이 성화의 시작이다.”
- 보통 신앙인이 우울증을 겪으면 “믿음이 없다”는 주변 평가로 귀결될 수도 있는데.
“‘신앙인은 우울증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오히려 강박적이다. 우울증은 누구나 올 수 있다. 엘리야도 로뎀나무 밑에서 자기를 죽여 달라는 탄식을 했다. 다윗도 시편에서 그렇게 탄식으로 고백했다. 누구나 좌절과 상실, 우울의 경험을 한다. 결국 치유 목회는 우울증이 ‘믿음 없는 문제’라고 낙인찍지 않는 것이다. 목회는 그저 같이 있어주는 것, 로마서 12장 15절처럼 ‘우는 자와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네가 잘못돼서 그래’라는 상담이나 조언은 결코 우울증 치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기독교인 자살 소식도 빈번히 들리고 있다. 혹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기독교인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누구나 삶의 코너에 몰리는 순간이 있다. 당신 잘못이 아니다. 돕는 손길이 있다. 손을 내밀자. 오픈하는 순간 문제는 가벼워진다. 우울한 기분, 죽고 싶다는 생각이 ‘당신의 믿음 없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다. 삶은 아직 풀어보지 않은 선물이라는 말이 있다. 도움을 청하라. 당신의 문제가 가벼운 것은 아니다. 금방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같이 이야기하자.”
- 현재 OECD 국가 중 한국의 자살률이 15년째 1위다. 한 개인을 자살로 몰고 가는 사회적 요인이 뭐라고 생각하나?
“대한민국이라는 분단국가, 그것도 좁은 땅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아야 한다. 평생 과도한 경쟁과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야 한다. 경제적 급성장을 하면서 마음의 성장을 이룰 기회는 부족했다. 삶의 의미문제이기도 하다. 과도한 경쟁보다 더 중요한 근원적인 존재가치, 생명의 의미, 예수가 말했던 참 생명의 가치 등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교육받은 기회가 많지 않았다. 생명에 대한 교육이 같이 일어나야 한다.”
- 기독교가 자살률을 낮추는데 기여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면?
“먼저 교회가 삶의 가치 등 생명자체에 대해 숙고해본 적이 있던가? 선한 일을 행하는 것, 믿고 축복받는 것 등.… 두잉(Doing)을 강조하는 경향이 그간 있었다. 이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신앙의 본질은 존재가치다. 바로 비잉(Being)이다. 하나님께 내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창세기 1장에서 ‘보시기에 심히 아름답더라’의 회복이다.
교회가 ‘너는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실존적 존재에 대한 수용이 깊었나? 한국교회에 이런 강조점이 있었는지 지금 되물어야 한다. 교회가 너무 많은 일을 하다보니까, 신앙의 본질 곧 자기 존재의 긍정을 놓쳐버린 측면이 강하다. ‘나는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 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복음이 성도들에게 충분히 경험돼야 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선행, 봉사 등을 못해도 존재 자체로 긍정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게 바로 존재론적 의미의 회복이다.
보통 자살의 공통점은 타인과 이야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사회에서 이런 얘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공동체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교회가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공감하는 공동체로 회복된다면,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쉼터가 되지 않을까? 근원적으로 자기 삶에 대한 수용과 고민이 교회 안에서부터 확산돼야 한다.”
- 끝으로 더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 속 희망이다. 세상의 도덕·가치관 중 어디서 자기를 온전히 수용하는 가치관을 들을 수 있는가? 이런 메시지는 공교육에서도 결코 듣지 못한다. 오직 교회만이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다. 회중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느라 노력하는 목회자들이 현재도 많다. 그런 설교가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의 정신건강에 순기능을 하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목사님들이 좀 더 시간을 내서 성도들이 겪는 어려움에 공감하고 삶의 자리에 함께 있어주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머물러 주는 것만으로 그에겐 위로다. 이들을 품어주고 정죄하지 않는 따뜻한 공동체가 지금 이 시대에 더욱 필요하다. 이런 공동체가 앞으로 한국교회에 더욱 확산될 것이라는 소망이 있다. 그렇게 된다면 한국 사회의 자살률도 줄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경애 박사는
이화여자대학교 박사(Ph.D), 이화여대 외래교수, 예은심리상담교육원장, 가족상담전문가, 목회상담전문가, 한국기독교대학신학대학원협의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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