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Journey Through Southern Korea in 1889”, By George Heber Jones
‘The Korea Mission Field’ 1929년 1월호
1889년 8월 26일 월요일, 우리는 낙동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상주에서 잠시 쉬었는데, 강폭이 반 마일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인동도호부(仁同都護府) 객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역주: 조선 초기부터 중기까지 201년간 상주에 설치한 경상감영은 1592년 4월 임진왜란으로 상주성이 함락되었기에, 상주 감영은 대구 감영이 정착되어 1894년까지 존속하면서 그 지위를 잃었다. 인동도호부(仁同都護府)는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의 개정으로 인동도호부가 폐지되어 대구부(大邱府) 관할의 군(郡)이 되었다).
8월 27일, 화요일 정오경 우리는 마침내 경상도 감영 소재지이며, 그 지방에서 가장 큰 도읍 중의 하나인 대구대도호부(大丘大都護府) 성벽을 보게 되었다(역주: 대구는 선조 34년(1601)에는 경상감영이 설치되었고, 효종 9년(1658)에는 대구객사 주변에 약재시장이 개설되면서 약령시의 효시가 되었다. 이로써 대구는 영남지역의 행정·교통·군사를 통할하는 명실상부한 중심지역이 되었다).
한편 대구로 가는 길은 벼가 잘 자란 곡창지대를 통과했다. 그 도읍은 분지로 낮은 지역이었고 도읍을 감싸고 있는 성벽이 있었다. 우리는 오후 1시에 작은 성문을 통과해서 시내로 들어갔는데, 판관(判官)께서 반갑게 맞아주시며 좋은 객사를 제공해 주셨다. 그곳은 외부인들이 침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우리 명함을 건넸더니 목사께서는 ‘홍용관(洪用觀)’이라는 명함을 주셨다. 그리고 곧이어서 관리 한 분이 경상도 관찰사의 명함을 주시면서 우리 방문에 환영을 표했다. 그러나 관찰사의 아내가 얼마 전 돌아가셨기 때문에 장례 관습에 따라 우리를 손님으로 맞을 수는 없으셨다. 비록 그분을 만날 수 없었지만 우리는 관찰사의 호의에 감사를 드렸다.
너무나 기쁘게도 그날이 바로 장이 서는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조선 사람들이 장사하는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큰 도읍에서 열리는 장(markets)은 참으로 가볼 만 한 곳이다. 시장에는 물건을 교환하고 팔기 위해서 멀리서 온 많은 상인들과 주민들로 붐볐는데, 그곳에는 각종 상품들과 잡화들로 넘쳤다. 장은 매 5일마다 열린다(역주: 현재 경북에서 2일, 7일 장이 열리는 곳은 영천이다).
장터를 방문하겠다고 하자 관원 한 분을 붙여주셨는데, 우리는 그 관원과 함께 시장에 갔다. 도읍은 사람들로 넘쳤으며, 우리가 지나가는 동안 작은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장마당은 성곽 밖에 있는 큰 평지에 섰는데, 주변의 길을 따라 가판대가 즐비했다. 우리는 장마당 끝에 있는 가설물로 안내되었다. 그 가설물은 관찰사를 위해 설치된 것이며, 관찰사는 분기마다 그곳을 공식적으로 방문함으로써 그 시장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가 생동감 있는 장터를 내려다 봤다. 그곳에는 신기한 눈으로 위를 향한 얼굴의 바다도 있었지만, 우리같이 이상하게 생긴 두 사람에게는 눈길을 주지도 않고 이리저리 판매대를 찾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우리는 그 모습을 통해 다시 한번 사람들이 얼마나 그 전능한 능력을 자랑하는 ‘돈’에 눈이 팔려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돈을 붙잡으려 혈안이 되어있는 것이다.
우리 왼쪽에는 그 너머로 대구부 관아 지붕이 보이는 성곽이 보였으며, 오른쪽으로는 푸르고 기름진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광경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그 많은 판매대 앞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 중에 아무도 예수님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고난과 슬픔과 죄를 알고 있었지만 그리스도와 용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게 스치는 생각 하나는 “내가 이곳에서 설교를 하면 얼마나 좋은 자리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설교를 했더라면, 미국 공사관에서 나를 처벌했을 것이다.
관원 한 명이 앞에 서고 일백여 명의 예비 신자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우리는 다시 연단에서 내려와 시내를 잘 볼 수 있는 공원으로 안내되었다. 한국에는 미국이나 마찬가지로 어린애들이 많았는데, 한국 아이들은 그렇게 무례하지는 않았다. 미국 어린이들이 외국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용서받지 못할 정도다. 한국 어린이들 역시 호기심이 많았지만, 나는 무례하다고 느낀 적이 거의 없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가 그 도읍의 대부분을 보았다고 생각하는데, 도시 형태는 6각형이었으며, 약 7만5,000명 정도가 도성 안과 인근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장터 시장을 지나게 되었는데, 물건 가격과 파는 물건들을 알아보기 위해 몇 군데 가게에 들렀다. 그들은 아직까지 외국인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았는데, 왜냐하면 물건 가격을 그리 비싸게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른 지방에서 온 건어물부터 가까운 지역에서 잡은 피문어 등 많은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나는 군중들 사이를 지나면서 기분이 좀 이상했다. 10여 년 전이었다면 주민들은 우리를 쉽게 해치웠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군인, 농부, 장인, 상인, 승려들 모두가 우리를 존경하며 길을 터줬다.
다음날 우리는 친절하게 우리를 초청한 대구 판관을 예방했다. 그분은 한국인의 훌륭함을 대표하는 분이었으며, 우리를 정중하게 맞아주었다. 대화 도중 그분은 우리나라에 대해 물었으며, 한번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분은 틀림없이 개혁파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방에 서양식 의자를 3개나 준비했다. 어떤 수구파(conservative) 사람에게도 그런 의자를 소유함으로 인한 죄 의식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문을 마친 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바로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정각 10시에 남문을 지났으며, 거기서 남쪽으로 300리쯤 떨어져 있는 부산을 향해 나아갔다. 대구 목사께서 우리를 아침 8시 30분에 영접했는데, 이분은 미국 관리들보다 일찍 일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70리를 나아간 후 (8월 28일 수요일)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커다란 관아가 있는 청도(Chungdo)라는 곳에 묵었다. 길 주위에서 우리는 이 지방이 중요하다는 많은 증거들을 볼 수 있었다. 땅은 매우 비옥했으며, 잘 익은 곡식들이 들판에 가득했다. 이곳은 한국의 곡창 지대 중 하나였다. 경상도의 인구는 이백만 명 정도라고 기록되었다.
8월 29일 목요일, 우리는 100리를 이동했는데, 매우 길고 힘든 여정이었다. 오후 7시쯤이나 되어 가까스로 집 몇 채를 볼 수 있었는데, 그곳에서 10리 안에서는 우리가 머물 수 있는 주막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마을 원로를 만났는데, 이렇게 곤란을 당해 마을을 지나는 여행객에게 횃불로 밝혀주고 우리를 맞아줄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나 그 주막은 이미 가축들과 늦은 여행객들이 꽉 들어찬 허접한 곳이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하룻밤을 잘 보낼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었다. 그들은 우릴 위해 가축들을 밖으로 끌어낸 후 마당 가운데에 불을 피워주고, 쌀 등 여러 가지를 가져다주었다. 나는 한국인들이 참으로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것을 항상 느꼈다. 불이 꺼지자 한기가 느껴지고 으스스했지만, 우리는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그걸 느끼지 못할 만큼 곯아떨어졌다.
정오께 손을 다친 사람을 치료해줬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는 환자 5명을 더 데려왔다. 그중 한 사람은 팔에 독이 퍼졌는데, 그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지만, 그들이 하도 애원하는 바람에 나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그것은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무해한 글리세린을 발라주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이런 환자를 9명이나 더 보았다.
8월 30일 금요일, 우리는 시골을 벗어나 도시로 나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중에 말을 타고 북쪽으로 가는 일본인 상인을 만났는데, 이 사람은 우리가 서울을 떠난 후 처음 만난 외국인이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부산에서 백 리쯤 떨어진 곳이었는데, 대구를 떠난 후 계속해서 낙동강 강변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하룻밤을 보내려고 남천(Nam Chun)이라는 마을에 머물렀다(역주: ‘동래부지’ 산천조에는 남천포가 보이는데 “동래부 남쪽 20리에 위치하며 어장이 있다”고 되어있다. 부산 남천(南川)은 금련산에서 발원하여 수영만으로 유입되는 내(川)인 남천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머물 수 있는 장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는데. 간신히 한 곳을 찾았고, 말들은 다른 숙소로 보냈다).
길을 가다가 북쪽에서 직물을 지게에 지고 나르는 짐꾼을 만났는데, 그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에 의하면 그는 삯으로 10리마다 20전씩을 받고 있는데 하루에 70리를 갈 수 있으며, 그렇게 하면 140전(미화 12센트)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돈에서 각종 비용을 제해야 실제 수입이 되는데, 재수가 좋으면 돌아가는 길에 다른 짐을 맡을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8월 31일 토요일, 즉 서울을 떠난 지 꼭 15일 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350마일을 말을 타고 온 것인데, 좀 피곤하기는 했지만 긴 여정을 잘 마쳤다. 우리는 서울에서 남단에 위치한 부산항까지 지역을 돌아봤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부산에서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말은 육로로 따로 보내고 우리는 ‘쯔루가 마루’(Tsuruga Maru)호 배를 타고 9월 6일 제물포항에 도착했으며, 서울에는 9월 7일 도착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조선에서 계획한 첫 번째 순행을 마쳤다. 이번 여행은 어려움으로 시작한 난관의 연속이었다. 한 가지 마음이 무거운 것은 순행 기간 ‘설교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용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가보는 ‘정탐여행’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만족한다. 그러나 이번 여정에 전혀 열매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 순행을 통해 나는 한국말을 연습했으며, 한국이라는 나라와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일은 우리가 조사(助師)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좀 더 많은 내용을 추가해야 하겠는데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말(馬)들이 우리와 함께 어떻게 물살을 가르며 내(川)를 건넜는지, 여정 중에 얼마나 놀랄만한 것들을 보았는지, 그 이외에도 많은데, 이런 면에서 여기에 기술한 순행일기는 일종의 요약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여행 기간 내내 그 어디에서도 우리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다.<끝>
번역 리진만(우간다, 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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