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관점에서 보니 ‘고난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하니 원망했고, 나약했으니 불평했고, 고난의 목적을 모르니 두려웠고, 그래서 방황했습니다. 성장의 관점에서 보니 출애굽의 고난이 다르고, 광야의 고난이 다르며, 가나안의 고난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과 나의 잘못과 상관없이 나를 훈련하시는 고난이 분별되기 시작했으며, 각각의 고난의 때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난의 원인이 어떠하든,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하든, 어느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든 상관없이 내가 자라나도록 도우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 안전한 장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마냥 피하기 급급하던 고난을 이제는 즐겨 볼 마음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 김세연 , <아름다운 성도 룻>
메마른 우물로는 몇 사람 못 먹인다. 넘치는 강물이라야 농사도 짓고 마을도 먹일 수 있다. 생명력도 그렇다. 어중간한 능력으로 퍼주다가는 둘 다 죽는다. 살리려면 넘쳐흘러야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은 끝이 없다(골 1:17-19). 죽음도 이긴다(행 2:24). 그 안에 넘치는 생명력이 있다. 풍성하다. 그런 생명이라야 희생해도 산다. 살린다. 풍성한 생명력이 주어진 다음 단계는 자기희생이다. 남 살리는 생명력의 싹은 자기희생을 뚫고 터져 나온다(요 12:24). 죽어가는 생명으로는 희생할 수도, 남을 살릴 수도 없다.
- 송준기, <살리는 기도>
천지를 창조하신 주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자손들에게 획기적이면서도 전례 없는 명예를 내려 주었는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계약이 그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이런 계약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신들은 계약을 증명하는 존재이지 계약의 당사자는 아니었다. 인간이 감히 어떻게 신과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유대인만이 이런 기발하고 신성 모독적인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주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신성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성궤는 그 계약(모세가 산에서 갖고 내려온 두 개의 석판에 적힌 것)을 담기 위한 것이었다. 솔로몬이 건설한 신전의 지성소에 모셔진 것은 바로 그 계약이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그 성전을 파괴한 이후에도 주 하느님과 선택된 민족 사이의 계약은 취소되지 않았다. 계약의 조건들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성궤가 사라진 후 수세기 동안에 편집되고 재편집된 히브리어 성경은 대체로 그 계약을 간직하기 위해 편찬되었다. 성경을 공부하는 모든 유대인은 그 계약을 가슴속에 깊이 새긴다.
- 톰 홀랜드, <도미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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