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너 김준만, 국내에서는 다소 낯선 이름일 수 있지만 노래 3곡에 1만 유로(한화로 약 1억4460만 원)를 받는 귀한 몸값을 자랑하는 한국인 테너다.
그동안 유럽과 아시아 무대에서 종횡무진 달리던 그가 지난해 미국 캘리포니아 버뱅크에 새 둥지를 틀었다.
기자가 찾은 그의 집무실. 아스팔트 앞마당에 마중 나온 그의 첫인상은 한마디로 예술가였다. 꼬불꼬불한 머리카락에 부리부리한 눈매가 특히 인상적이었고, 몸이 악기 그 자체라는 성악가답게 크고 풍만한 체격을 지녔다. 무엇보다 20여 년간 유럽 생활을 해서인지 유럽 사람 냄새가 나는 듯했다. 세계적인 거장 움베르토 보르소를 사사하고 7개 국제콩쿠르에서 일제히 1등을 휩쓸며 일약 유럽 오페라계 스타로 등극했다.
‘테너가 평생 올라야 할 가장 높은 산’으로 불리는 주세페 베르디의 오델로 역을 주로 맡은 그는 지금까지 독창회 40여 회를 비롯해 1,261회의 공연을 줄기차게 해 왔다.
20대 후반에 고국을 뒤로 하고 홀연히 유럽으로 떠난 뒤, 동양인들은 감히 설 수 없는 북유럽의 거친 경쟁 속에서 살아 남았다. 그는 ‘오페라 계의 이단아’라고도 불린다. 관객과의 호흡을 중시하다 보니 다소 파격적인 방식을 취할 때도 있다. 노래만 부르고 들어가는 스타일도 아닐 뿐더러, 장르의 경계를 넘어 팝도 하고 재즈도 한다.
한 달에 스무 번은 여행을 하면서 살았다. 오늘은 암스테르담, 내일은 오슬로, 모레는 루마니아. 이런 식으로 전 세계를 내 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이쯤 하면 그가 얼마나 잘 나가는 테너였는지 대략 감이 잡힐 테다. 그런데 이렇게 상승 주가를 달리던 그가 돌연 찬양 부흥회를 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 화제다. 보아하니 아예 이 길로 주욱 갈 작정이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살아남기 힘들다는 유럽 오페라계를 제패했던 인물인데 말이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사연이 있길래 돌연 '찬양 사역'에 발을 들여놓은 건 지. 다짜고짜 본론부터 물었다. “뭐 때문인가요?”
그러자 그는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과거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하자면 길다. 우선 그의 집안 배경부터 들어보자. 이른바 '모태신앙', 그것도 5대째 크리스천인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장로, 할머니 권사 밑으로 줄줄이 교회 직분을 하나씩 맡은 쟁쟁한 기독교 집안이다.
여기에 오페라 가수 서혜영이 그의 외할머니, 피아니스트 박경자가 그의 어머니로 예술적 감각까지 물려받았다. 대대로 믿음의 유산을 이어갔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축복도 많이 받은 덕일까.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살림이었다.
그런 영광스러운 가문에 문제아가 하나 탄생했는데, 그게 바로 김준만이다.
흔히들 말하는 ‘건달’보다 정도가 심한 ‘마피아’로 살았으니 말 다 했다. 모태신앙이었음에도 교회하곤 거리가 멀었다. 맨정신으로 교회 갈 날이 없었다. 어쩌다 소주 몇 병을 들이키고 거나하게 취한 채 예배당 맨 뒷자석에 앉아있다 교회 어른들의 핀잔에 심사가 뒤틀린 게 한두 번이었을까.
그렇게 막장 인생을 살던 그였다.
“저 때문에 식구들이 곤경에 많이 빠졌죠.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졌어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안 좋은 일들이 굉장히 많이 벌어졌어요"
결혼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건만 아내도 그를 버리고 떠났다. 친구들도 그를 욕하고 떠나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끝자락에서 그는 얼마나 비참하고 괴로웠을까. 그 심경을 헤아릴 순 없지만, 어쨌든 그는 기로에서 자살을 선택했다.
당시 그의 나이 27세. ‘이깟 인생 살아서 뭣하나. 차라리 죽어버려야지’ 작정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죽음의 문턱을 두드린 그를 부르신 것.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라” 생생한 음성이었다. 그리고는 엘리야의 제단에 떨어졌던 하나님의 불이 그에게 떨어졌다.
이후 김준만에겐 제2의 인생이 열렸다. 성경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파노라마 같은 그림이 그 앞에 펼쳐졌고, 감화와 감동으로 내내 눈물이 앞을 적시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인생의 주체와 목적이 통째로 뒤바뀌는 체험도 이때 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주의 종이 되고자 신학교에 진학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단 돈 100만원이 없어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계속해서 앞으로의 인생을 놓고 기도하던 중, 가만히 생각해보니 태어나 지금까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주일학교 시절부터 찬양해 온 그였다. 기도의 응답으로 ‘찬양’을 받았고, 평생 하나님만을 찬양하며 살겠노라고 서원했다. 이 기도가 그 분의 마음에 합했는지 가난한 청년 김준만에게 이탈리아 유학의 길이 열렸다.
어렵사리 떠난 유학길. 가난한 유학생이었으니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 봤을 터. 그런 와중에 운 좋게도 그곳에서 귀인을 만났으니, 그의 이름은 움베르토 보르소(Umberto Borso).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도 잘 알려진 거장이다. 은퇴 이후의 삶을 보내고 있던 보르소 선생을 그는 스승으로 섬기며 가르침을 받았다.
“7~8년간 한 번도 시내에 나가지 않고, 매일같이 연습했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훈련하신 거죠.”
돈 한 푼 없는 김준만에게 보르소 선생은 매일같이 50 유로씩 밥 사 먹으라며 용돈을 주곤 했던 따뜻한 스승이기도 했다.
거목의 그늘 아래에서 오랜 훈련 과정을 거친 뒤, 이윽고 그는 세상 앞에 당당히 섰다. 한국인들이 거의 없는 북유럽 극장에서도 테너 김준만을 환대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를 비롯해 체코, 스웨덴, 노르웨이, 벨기에, 루마니아 등의 메인 무대에서 말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몸값은 노래 3곡에 1만 유로가 됐다.
“사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지금이 제일 전성기에요. 하지만, 하나님께선 세상의 부귀영화를 모두 내려놓게 하시더라구요. 그 분의 일을 하라고 저를 이곳 캘리포니아로 부르셨구요.”“자살의 문턱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앞으로 제게 하실 일을 약속하셨어요. 세상 노래, 즉 오페라를 공부한 것도 제가 만난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였죠”
그에겐 현재 콘서트 프로모터라는 직업을 가진 두 번째 아내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전에 폭력은 물론 사건 사고가 즐비했던 그의 인생이 이 아내 덕에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고 한다.
테너 김준만이 좋아하는 성구는 잠언 4장 8절이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이 말씀이 그에겐 가훈과도 같다. 산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지금까지 변함없이 마음에 새겨온 말씀이기도 하다.
요즘 그는 매주일 캘리포니아 한인교회를 순회하며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면서 노래하고 있다. 아니, 노래라기보단, 그의 마음과 오장육부가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부르짖고 있다. 물론 ‘엘리야의 하나님’이 주제곡이다. 내달 19일엔 나침반교회(담임목사 민경엽)에서 찬양 부흥회를 앞두고 있다. 앞으로 그와 함께 찬양 사역에 관심 있는 음악인들과 연대해 정기적으로 집회를 열 계획도 갖고 있다.
“1~2주에 한 번, 정해진 장소나 교회를 순회하면서 꾸준히 집회를 해 나가고 싶어요.”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난 은혜의 보따리를 신명 나게 풀어헤치겠다는 그의 '찬양 사역자'로서의 행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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