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10분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25일 모임에선 엄요한 전도사(탈북민, 총신대)가 간증을 했다.
엄 전도사는 “저는 9년 전 한국에 왔다. 북한 함경남도 바닷가 지역에서 태어나 20살에 탈북해 지금은 29살이다.
92년에 태어나서 3년 간은 그나마 괜찮게 살았다고 부모님에게 들었다. 그러나 제 기억 속의 북한의 삶은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못 먹고 새벽마다 풀을 뜯고, 해조류를 주워 아침을 해결하던 것이 어렸을 때의 기억이다. 그리고 집 잃고 부모 잃은 아이들이 아파트 베란다 밑에서 박스를 깔고 자는데 그 아이들이 죽으면 주워서 버려지고 겨울에는 묻어줄 수 없어 산에 버려진다. 나무를 줍기 위해 산으로 갔다가 보기 힘든 상황을 많이 본 경험이 있다. 어렸을 때 경험은 트라우마와 아픔밖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나이가 들면서 스스로 먹고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도둑질도 많이 했다. 그러다 보니 도둑질할 수 있는 친구들도 많이 생겼다. 점점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먹고 살아야 하다 보니 그런 친구들과 비정상적인 삶을 살게 됐다. 어려서 술과 담배를 배우게 됐다. 그렇게 한해 한해 지나가고 중학교 마칠 무렵, 아버지가 결국 가정의 어려움과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됐다. 그 후 저는 더는 집에 남아 있으면서 삶을 회복하고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전에 스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았던 2년의 세월이 있다 보니 집을 나왔다”고 했다.
이어 “집을 나와 2년 동안 방황한 동안 그래도 먹고 살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이 놓여졌다. 고향이 함경북도 언성인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이 함께 일해보자고 해 언성으로 가게 됐다. 언성으로 갔는데 그분의 할머니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막살고 한심한 삶을 살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므로 일을 게을리하진 않았다. 산속에 있다 보니 봄이면 약초도 캘 수 있고 사냥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문제가 생겼다”며 “2010년대 초반에 상당히 많은 탈북민들이 북한의 인권상황과 실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북한 정부가 국경 지역의 미거주자를 다 집결소로 모아서 강제노동하는 곳으로 보내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산에서 농사를 짓고 있지만 북한 정부가 누가 어디에 사는지 다 알고 있었다. 나름대로 살아봐야겠다는 의지가 있던 때 그런 일이 벌어져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탈북에 성공, 대한민국에 오게됐다는 그는 “국정원 하나원을 보니까 더 놀라웠다. 그때 탈북민이 이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다. 탈북민 여성이 그렇게 많은지 그렇게 알게 됐다. 그들이 수많은 고초와 수모를 겪으며 오게 된 걸 알게 됐다. 하나원 과정을 마치고 2011년 9월에 대한민국 생활을 시작했다. 집을 받으려면 대학교에 다니든지 안정적인 직업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그 전까지 쉼터에 가서 생활해야 한다고 해서 강북구 수유에 있는 천주교 쉼터에 보냄을 받았다. 그곳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됐고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니 편했다. 그렇게 잘 지내다가 슬슬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그리고 주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제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막막했다. 그때 방황의 시간이 시작됐다”며 “북한에서 배운 술, 담배가 끊어질 수 없었다. 쉼터에서 탈북민 남자들과 뭉쳐 술과 담배를 했다. 아무리 봐도 아무런 소망, 꿈, 비전이 없었다. 그냥 하루를 살았다. 그러다 마음에 ‘너무 외롭다. 힘들다. 가족들 데리고 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300만 원이면 가족을 데려올 수 있었다. 그래서 일을 알아보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됐다”라고 했다.
엄 전도사는 “방황하던 가운데 새터민 대안학교에 가서 검정고시부터 하게 됐다. 대안학교에 가고 기숙사에 들어가고 처음으로 복음을 접하게 되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처음 그분을 만나게 되고 많은 갈등이 있었다. 저는 ‘하나님 받아들일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고 했었다. 항상 그렇게 거부를 해왔는데 그분의 섬김과 사랑은 뭔가 남달랐다. 그분과 마음을 터놓기 시작하고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기도하는데 그분이 기도 제목을 적어보라고 하셨다. 기도 제목이 내가 할 수 없는 걸 적는 건데 너무 많아 적기 힘들었다. 정말 필요한 것 3가지만 적어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지 아닌지 보자고 했었다. 그래서 기도 제목에 검정고시 합격, 담배 끊기, 45분 수업시간 앉아 있기 이 모든 걸 하나님이 들어주셨다. 하나님이 제 삶을 이루어 가시는 걸 보게 하셨다”고 했다.
이어 “학교 규칙상 교회에 나가야 했다. 교회에 나가다 보니까 탈북민 청년들이 모이는 교회를 소개받게 되고 결국 황금종교회라고 하는 최광 목사님이 하시는 교회까지 가게 됐다. 교회에 가서 처음 설교를 듣고 있는데 북한 출신 하나님의 일꾼들을 세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탈북자들을 북한 땅에서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한국 땅으로 인도해 내셨다. 너희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다. 너희가 바른 삶을 살기 위해선 하나님을 믿는 것 밖에 답이 없다. 하나님을 믿으면 답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탈북자 그 이상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설교를 듣는데 그게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며 “잔잔하게 하나님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들 가운데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 보니 왠지 믿고 싶고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되는지 물으니, 통독학교를 할 것인데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을 만나면 그런 삶으로 하나님이 사용하실 것이라는 말씀에 대학교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해보기로 했다. 과거의 기억은 고난, 고통, 아픔밖에는 없고 추억이라고 말할 건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1년이라는 시간을 버린다고 해서 크게 후회될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목사님 말씀처럼 1년을 드려서 내 평생을 삶의 목적이 있는 인생으로 살 수 있다면 내가 도전해보겠다는 마음으로 통독학교에 들어갔다”고 했다.
엄 전도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정해서 믿을 수 있다면 내가 이 길을 가는 것이고 아니라면 떠나가도 그렇게 큰 후회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통독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개월 동안 아무 반응 없이 말씀이 들려지고 남는 게 없었다. 저녁에 5시간 기도하고 찬양을 해도 임재가 없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가던 중 어느 날 하나님이 찾아와 주셨다”며 “제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와 주시고 만나주시고 마음속에 쌓아왔던 기도의 제목들, 의문점들을 한순간에 햇볕에 눈이 녹듯이 사라지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걸음을 인도해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이곳까지 인도해 세우셨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고 그동안 성경 읽었던 것들이 무의식중에 들렸던 것들이 그때에야 비로소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고백하는 모세, 다윗의 이야기. 그들의 삶 속에는 고난과 아픔이 있었고 하나님을 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역경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게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을 붙잡았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고백했던 고백이 저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 되도록 이끄셨다는 것. 다윗이 인생 말년에 하는 믿음의 고백을 보면 정말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의 여정이 많았다. 성경을 통해 볼 수 있는 건 하나님은 신실하고 살아계시고 우리 삶을 붙드시고 포기하시지 않고 이뤄가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 통독을 통해 보게 하시고 고백하게 하셨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어려움은 하나님이 뜻이 무엇인지 찾아가는 시간이요. 분별하는 시간이요. 보게 하시려는 뜻이 있는 줄을 믿는다”고 했다.
엄 전도사는 “학업, 사역, 육아, 가정으로 여러모로 어렵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여기까지 인도하셨고 앞으로도 인도하실 것이다. 그 약속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욥이 승리한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다”며 “4년 전 독일, 헝가리, 체코, 오스트리아를 다녀오면서 하나님이 저에게 분명하게 주신 메시지가 있다. 북한을 알고 남한을 알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이 시대 통일의 마중물로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때,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시고 완성하시는 그 길에 우리나라와 민족을 사용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진다. 그 가운데 탈북민들 한국에 보내시고, 믿음의 동역자들과 만나서 기도하게 하시는 이유,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취될 것이고 이뤄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저도 사역과 학업을 감당하고 있다. 교회를 세운 것도 그때 세워질 교회를 준비하며 미리 이 사역을 하며 나와 같은 청년들을 다음 통일의 마중물 세대로 일으키는 길 가운데 사역을 감당해 보자 생각한 것이 작년 초이다. 코로나로 위기와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이 사역을 책임져 주시고 가정과 이 모든 것들을 책임져 주시는 것을 더 분명하고 명백하게 보는 시간을 지금도 보내고 있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실 줄을 믿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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