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 오전 10시 10분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18일 모임에선 김요셉 전도사(탈북민, 장신대)가 간증을 했다.
김 전도사는 “태어나면서부터 김일성 김정일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도 죽어도 그들을 위한 존재로 알고 엄격한 교양 밑에서 성장했다. 다섯 살 때는 다정했던 옆집 할아버지 할머니가 갑자기 보위부에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 해방 전에 예수님을 믿던 믿음의 성도들이 밤에 몰래 성경책을 보고 기도하던 것이 들켜서 끌려간 것이었다. 아버지는 어디 가서 이것을 말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종교는 있지 않은 미신을 믿어서 사람을 머저리로 만든다고 하셨다. 그때는 진짜 나쁜 줄로 알고 컸다”고 했다.
이어 “어느 날 찾아온 삼촌이 내 일기장에 적힌 ‘나는 왜 세상에 태어났는가’라는 물음을 보고 놀랐다. 삼촌은 이런 질문이 얼마나 반동적인 것인지 아느냐며 이것이 보위부에 들키면 아버지는 출당되고 옆집처럼 추방을 당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가 질문하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 원수님 품에서 태어난 행복한 존재이며 살아도 죽어도 그 품속에서 영생하는 운명을 살 존재, 북한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며 인민들의 천국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성장하면서 계속 정체성에 관해 의문이 들었다. 진화론을 배웠는데 원숭이의 새끼가 나라는 말에 놀랐다. 동물원에 가면 저 원숭이가 언제쯤 진화되어서 인간이 될까 궁금했지만 인간이 되는 걸 보지 못하고 고향을 떠났다”고 했다.
그는 “평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10대 원칙에 걸려서 출당당할 뻔 하다가 겨우 용서받고 직책에선 해임되고, 가족은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한평생을 당에 바쳐온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분노를 느꼈다. 앞으로 간부가 되어서 아버지를 음해했던 사람들을 복수하리라 결심했고, 열심히 생활해서 평양에서 대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 이후 북한사회가 급격히 기울어지는 것을 목격하며 결심이 서서히 무너졌다. 방학 때마다 지방에 내려가 보니 배급을 주지 않았다. 고난의 행군은 흔히 1994년 김일성 사망 이후 시작된 것으로 알지만 이미 그 전에 서서히 경제가 붕괴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어 “1989년 동유럽에 유학 갔던 친구들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발전된 남한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하는 소리가 이래서는 못 산다는 것이었다. 마음 속 울분이 점점 북한 정권에 대한 반항으로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당에 충성을 다하고 평생을 바쳐도 앞이 보이지 않아 닥치는 대로 김일성 김정일의 노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에도 내 삶을 지탱하고 내 앞날을 밝혀줄 진리가 없었고, 계속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북한체제의 기본핵심인 주체사상은 한 마디로 자기 자신이 주인이다. 인간의 존재를 규정할 때 사회정치적 생명체로서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로서 가치를 지닌다. 이 가치는 김일성 김정일 품에서만 영생하고 빛날 수 있다고 규정짓는 것이다. 북한에는 두 가지 생명이 있다. 하나는 부모가 준 육체적 생명으로 죽어 없어지는 것이다. 또 하나는 당과 수령이 주는 정치적 생명이다. 수령님께 충성을 다했던 사람은 인민의 기억, 당의 기억, 수령님의 기억 속에 영생한다고 기록영화를 계속 틀어주면서 당과 수령에 충성을 다할 수 있게끔 계속 유도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니 예수님의 피로 구원해준 그 영생의 삶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1997년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에 내려오니 시체가 길가의 조약돌보다 많이 널려 있었다. 집에 가니 부모님이 반가워하시는데 내놓는 건 풀죽이었다. 아버지가 있는 기업소에 종업원들이 하루에 2~3명씩 죽고, 고난행군 시기엔 150명이 죽었다. 함흥에 출장을 갔는데 한 개 구역에서 보통 11명에서 16명이 죽는다고 구역인민지도원에게 들었다.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도탄에 빠진 백성의 신음이 들렸다. 영화 임꺽정의 주제가가 유명했었는데 고난행군 시기에 그 노래가 인민들에게 다시 회자되었다. 한 번 죽을지언정 밝은 세상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얼마나 사내다운 기질이냐는 뜻이 담긴 노래였다. 남자들은 그 노래를 불렀고, 북한에 대해서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총살이 시작되었고, 한 달 동안 3천 명이 총살당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 드라마와 영화, 라디오방송을 통해 한국의 발전을 볼 수 있었다. 한국에 가고 싶었지만 영화를 통해 본 탈북자들은 남한에 가면 죽임을 당했다. 그러다가 탈북자 가족을 통해서 죽이지 않고 집도 주고 정착금을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국에 친척이 없으니 국군포로 가족을 섭외해서 함께 가면 한국 정부가 픽업해줄 것으로 생각했다. 인민군 안내에 따라 두만강을 건너 연길까지 건너간 게 2007년 1월 20일이었다. 포로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며 분단의 아픔, 민족의 아픔을 느꼈다. 그때 하나님은 몰랐지만 남한으로 가서 힘을 합쳐 통일에 이바지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저를 데려가겠다는 사람도 없고 브로커도 알지 못해서 광활한 중국 땅에 내 한 몸 숨길 곳 없이 하루하루 지냈다. 그때 저를 안내한 군인이 찾아와서 아랫동네(남한)에 가고 싶으면 십자가가 있는 건물이나 남한에서 온 목사님, 선교사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나에게 하나님을 강요하느냐고 굶어 죽고 맞아 죽을지언정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보위사령부에 체포되어서 제가 위험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아파트 5층에 숨어지내던 6월 발걸음 소리가 나니까 긴장하고 있었는데, 문 앞에 손 노크 소리가 아군이었다. 그때 목사님을 소개받았는데, 그분은 나를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셨다. 들어와서 나의 상황을 물어보더니 하나님을 아시느냐고 물었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자본주의 나라에서 마약중독자, 알코올 중독자, 교화소에서 출소한 사람들이 잡는 마음의 지주, 미신적인 존재였다. 목사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소개하며 나와 형제님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하늘에 올라가셨다고 하셨다. 살아있는 신을 섬기다가 온 내가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없었다. 목사님이 요한복음 3장 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심장에 통증이 왔다. 당신이 처한 환경을 구원하시려, 죄지은 모든 것을 피로써 씻으러 오셨다고 말씀하실 때 갑자기 제 무릎이 모이더니 이후에 보니까 무릎을 꿇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죽을 생각을 할 정도로 갈급했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겠다고 하고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너무 우니까 목사님이 손을 잡아주며 예수님의 자녀가 된 것을 축복한다고 하셨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물과 콧물을 엄청나게 흘렸다. 그렇게 예수님을 영접했고, 몸이 구름 위에 떠 있는 것처럼 평안했다. 방금까지 본 세상이 20분 후에 기도하고 보니까 다른 세상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앞으로 내 인생을 바꾸어주실 줄 꿈에도 몰랐다. 그 주일부터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예배에 참석해서 ‘나의 등 뒤에서’를 찬양할 때는 눈물이 줄줄 나왔다. 내가 내 앞길을 개척하고 내 운명의 주인인 줄 알았는데 내 등 뒤에 나를 환란 가운데서 지켜주시는 분, 내가 보지 않아도 보아주시는 분이 계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던 내가 주님을 노래하게 되었고, 마음 속에 모든 근심이 사라지면서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택했다는 음성이 마음에 울렸다”고 했다.
이어 “주님의 은혜로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2007년 12월 3일 출발해서 심양을 거쳐서 북경에 도착해서 쿠밍행 열차를 타고 2박 3일 간을 달려야 했다. 침대에 누워서 물만 마시며 기도하며 가는데 서울에서,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형제님을 위해 기도한다는 전화가 왔다. 혼자 가는 길인 줄로 알았다.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백성들이 대한민국에 찾아오는 한 분 한 분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는 줄 몰랐다”고 했다.
이어 “다음날이면 도착하는데, 갑자기 공안이 들어와서 신분증과 티켓을 확인하고 있었다. 2층에 누워 있었는데 여자 공안과 눈이 마추쳤고, 돌아누워서 기도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에 가면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다 하겠다고 살려달라고, 저 사람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가 되었다. 베개를 흔들며 깨우는 여자를 제가 ‘하울라’라고 말하면서 팔로 쳐버렸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약 다섯 시간을 기도했다. 나중에 ‘하울라’라는 말의 뜻을 알아보니 ‘됐어’라는 뜻이었다. 중국말을 모르는데 갑자기 하울라라는 말이 나온 것이었다”며 주님을 찬양했다.
이어 “한국에 들어와서 교회는 다녔지만 썬데이 크리스천이었다. 한국의 권사님, 집사님, 목사님들이 탈북민들을 기다려 주신다. 탈북민 사역을 하면서 탈북민 지원정착은 함께하는 것이라는걸 깨달았다. 저도 탈북민이지만 그들을 구출하고 지원정착을 도우면서 깨졌다. 구원해서 데려다 놓아도 감사할 줄 모르고 오라면 달아나고 찾아가면 피하고 무언가를 주면 감사할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며 저게 죄인 된 내 모습이구나를 깨달았다. 독생자의 핏값으로 구원하신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나의 못된 모습도 발견했고, 하나님은 하나하나 깨뜨려 주셨다. 중국의 목사님이 계속 전화가 와서 형제님은 평양에서 공부했고 하나님이 특별히 불러서 보내셨으니 장신대에 가서 공부하라고 하셨다. 예라고 대답하고 돈을 벌었다. 굶주린 부모님에게 돈을 조금이라도 보내는 게 내 미안함을 채우는 길이라 생각했고, 조금 보내고 나면 안도의 숨을 쉬며 밤잠을 잤다. 북한에선 김일성이 우상숭배였다면 이 땅에선 내가 우상숭배인 것을, 물질이 우상숭배인 것을 몰랐던 교만한 모습이었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계속되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보내주셨고 그분들이 저를 위해 기도해주셨다. 그때는 선교단체에서 일하면서도 나를 위한 기도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가 케네스 배 선교사님과 느헤미야 글로벌 이니셔티브 팀장으로 사역하면서 북한선교는 내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삼백만을 굶겨 죽인 악독한 독재자 김정일을 죽여 달라고, 백성들이 불쌍하지 않느냐고 기도했었다. 며칠을 기도했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어느 날 엎드려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돌아보라는 말씀을 하셨다. 눈을 감고 돌아보니 지나온 모든 노정이 생각났다. 육신의 눈으로 볼 때는 북한 땅은 믿음이 없고 죽음의 땅인데, 그 땅에 주님이 계셨다. 2천3백만의 영혼들을 아버지께서 안으시고 하늘나라에서 중보하고 계셨다”며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오늘도 북한땅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늘 오는데 갑자기 국제전화가 왔다. 북한에 교회를 세우는 것 때문에 부탁한 게 있었다. 그를 위해 잠깐 기도해줬는데 감격해 했다. 하나님께선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저를 깨우신다. 그 영혼들이 저를 향해 부르짖는 소리가 얼마나 갈급한지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였다. 십 년 전부터 복음을 계속 전했다. 라디오도 들여보내고 드라마와 성경이 담긴 USB도 보냈다. 다 제가 한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역사하신 것이지 내가 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저는 택한 종이요 도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게 얼마나 은혜이고 축복인지를 알고 삶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오늘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은 그 땅에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다. 작년에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장신대에 가게 되었다. 지금은 고향 땅에 교회 세우는 것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