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시편 46:1-11
우리 인생에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항상 돕는 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할 뿐만 아니라, 상황을 반전시킬 하나님을 기대해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위해, 오직 하나님만 붙잡아야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은혜에 감동한 기자가 주님이 행하신 놀라운 행적을 ‘와서 보라’고 말한다. 무엇을 보라는 것일까?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하나님이 대적자들을 심판해서 황무지가 되게 하셨으니 좋은 일이 생긴다. “그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9절). 여호와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전쟁 무기인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신다. 모든 무기를 잃어버린 적들이 전쟁할 의지를 상실하게 된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바이러스와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을 종식할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유럽과 미국에서도 전 세계의 전염병을 그치게 하시고 온 땅에 쉼을 허락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선포해야 한다. “와서 보라. 와서 여호와가 행하신 놀라운 행적을 볼지어다.” 성경을 보고, 역사를 보고, 우리 민족을 보라,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행적들을 볼지어다. 숱한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신 하나님이 지금의 어려움에서도 건져주실 줄 믿는다.
땅끝까지 전쟁을 그치게 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10절). “가만히 있어”라는 말은 “붙잡고 있는 것을 떠나 보낸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에서 붙잡고 있는 모든 것들을 떠나보내고 오직 하나님만 붙잡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근심과 걱정에 붙잡혀 살아갈 때가 많다. 손을 펴서 내가 붙잡고 살아온 근심과 걱정을 떠나보내고, 하나님을 붙잡으라는 것이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능하신 손을 붙잡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될 것이다.
기자는 11절에서 말한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전쟁에 능하신 만군의 하나님은 전쟁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연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겠다고 약속하신다.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근심과 두려움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을 붙들 때 승리하게 될 줄 믿는다.
종교 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시편 46편을 자주 묵상했다. 당시 교회가 성경과 너무나 멀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오직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기로 결단한 이후에, 루터가 직면한 세상은 소용돌이와 위협으로 가득 찼다. 중세 시대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던 가톨릭을 향해 개혁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루터가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고 종교개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피난처와 힘이 되시고, 환난 중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이다.
찬송가 585장 1절과 2절을 보면 루터가 매 순간 하나님을 붙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절.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루터가 마귀를 상대하면 당할 수 없다. 마귀는 강력한 존재다. 그런데 2절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2절.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할 수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이스라엘에 가보면 예루살렘에 히스기야 터널이 있다. 히스기야 터널은 주전 701년에 당시 고대 근동의 강자였던 앗수르 산헤립 군대의 예루살렘 포위를 대처하기 위해 만든 수로이다. 성안에 물이 없었기 때문에,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에서 성안에 있는 실로암으로 식수를 끌어들이기 위해 만든 것이다. 터널의 길이가 약 533m 정도 된다. 터널은 암벽을 통과하며 “S자”로 되어 있다. 두 팀이 양쪽에서 터널을 뚫기 시작해서 8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터널을 걷다 보면 물이 무릎 위에까지 허벅지까지 차오른다. 플래시 없이 갈 수 없는 좁고 긴 통로이다. 캄캄한 곳을 잘 통과하려면 앞사람이 비춰주는 빛을 의지해서 가야 한다. 나 혼자 갈 수 없다. 혼자 터널을 간다면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데 같이 가니까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때로 물이 깊어지는 곳이 있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돕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히스기야 터널을 지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히스기야가 좁은 터널을 통해 예루살렘 성에 물을 공급했던 것처럼, 우리도 좁은 길을 걷다 보면 마침내 생수가 가득한 실로암과 기혼샘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가는 길이 힘들고 외롭다 할지라도, 공동체와 함께 길을 걷다 보면 주님이 준비한 생명샘을 만나게 될 줄 믿는다.
터널을 걷다 보니까 터널 길이가 상당히 되었다. 어둡고 좋은 길을 걷다 보니 언제 입구가 나오나 생각했다. 그런데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입구가 나와 실로암 연못에 도착했다. 우리가 지금 걷는 고난의 터널은 반드시 끝이 있다. 조금만 더 견디길 바란다.
지금 우리 민족이 지나는 고난도 마찬가지다. 고난을 통해 주님이 우리 민족에게 주시고자 하는 유익이 있어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이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시편 기자의 고백처럼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연단 받고 성숙하는 우리가 되길 바란다. 때가 되면 잘 참고 견딘 사람들을 다윗과 요셉처럼 히스기야처럼 존귀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최철준 목사(지구촌교회 젊은이목장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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