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올해 6·25 70주년을 맞아 최근 서울신학대학교를 정년퇴임한 박명수 교수(한국교회사)의 논문 ‘거시적인 측면에서 본 6·25 전쟁과 한국사회’를 연재합니다.
3. 6·25 전쟁과 시장경제 체제의 도입
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가 경제구조이다. 전통봉건사회와 근대서구사회의 가장 중요한 차이는 개인의 등장이다. 개인은 자율권을 가졌고, 사적 권리는 국가가 함부로 규제할 수 없다는 것이 근대서구사회의 특징이다. 이것을 경제부분에 적용한 것이 바로 시장경제 체재라고 말 할 수 있다.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서 경제활동을 하는 것이다.
근대사회의 이런 발전은 개인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이익과 결합된다는 신념이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의 핵심 사상은 “합리적으로 이해된 개인의 이익”은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이익과 부합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건전한 도덕이 전제된다. 따라서 시장경제의 발전은 건전한 시민의식과 함께 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승만은 일찍이 그의 『독립정신』에서 이런 사회구조를 갖지 못하면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한국사회에서 제일 처음에 이 같은 경제제도가 받아들여진 것은 3·1운동 이후에 마련된 헌법이다. 1919년 4월에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는 “소유의 자유”가 명시되었다. 국가는 개인의 소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해 9월에 개정된 임시정부 헌법에는 “기업의 자유”가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일본이 일본 기업 육성을 위해서 조선인들에게 각종 규제를 부과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 것이다. 개인의 소유권과 사기업의 권리를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경제사상은 당시 강력하게 전개되고 있던 공산주의와 부딪히게 되었다. 그들은 사회적 모순의 핵심에는 개인의 소유권 때문이라고 보고,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사회는 바로 이런 개인의 소유권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이다. 이것은 당시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자유무역과 시장경제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했다. 1930년대 이후 소련은 파시즘과 맞서기 위해서 미국과 손을 잡았지만 이런 근본적인 생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는 정치제도 못지않게 어떤 경제정책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한국사회에는 막대한 일본기업과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국인들 지주가 갖고 있던 토지가 있었다. 북한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기업과 토지는 물론 한국인이 갖고 있던 토지까지 국유화했다. 물론 “토지는 농민에게, 공장은 노동자에게”를 외쳤지만 이것은 허울 뿐, 실지로는 모든 것의 소유는 국가에게 있었고, 국가는 공산당의 통제 아래 있으므로 결국은 모든 것은 공산당의 소유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면 여기에 대해서 남한 사회는 어떻게 대응했는가? 우선 당시 대부분의 인구가 농민이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직접 관련된 토지문제를 살펴보자. 해방 직후 여론은 일본인의 토지는 농민에게 무상분배를 해 주고, 한국인 대지주의 토지는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48년 헌법은 이런 여론을 반영하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여기에 맞게 토지분배가 이루어졌다. 그리해서 당시 60%가 넘는 소작농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토지 소유권은 소수의 대지주에게 있었지만 이제는 대다수의 농민들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 이들은 신생 대한민국의 국민이 됨과 동시에 당당한 토지의 소유자가 된 것이다. 이런 농민들에게 6·25 이후 공산당이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겠다는 것은 이미 가진 것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대한민국의 농민들은 자기의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서 대한민국을 선택한 것이다. 6·25 때 완장을 찬 사람들은 농민이 아니라 이런 분배과정에서 소외된 머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상당수는 월북하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기업의 문제이다. 일본은 패전과 함께 거대한 기업을 남겨 놓고 철수하였다. 이들이 남겨 놓은 적산은 해방 이후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정부의 주요 재원이었다. 미군정과 한국정부는 이런 적산을 불하해 주고, 그 수입으로 국가재정의 주 수입원을 삼았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는 상당한 기업을 국가소유로 가지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정부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 있었고, 이것을 타결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다. 당시 미국원조가 한국정부의 운영에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에 원조하는 대신에 한국의 경제구조를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미국은 기업의 국유화를 최소화하고, 이것을 대부분 사기업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원래 1948년의 헌법은 일본이 남기고 간 기업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이것은 대부분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승만도 이것을 통해서 국가가 막강한 경제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근본적으로 경제는 국가주도가 아니라 시장에게 맡겨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953년 전쟁이 끝난 다음, 미국은 헌법을 사기업 육성의 방향으로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렇게 해서 1954년 헌법은 개정되었고, 그 주요 내용은, 주요 지하자원이나 수자원도 민간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고(85조), 국제무역에 있어서 국가의 통제도 제한되게 되었으며(87조), 국방산업을 제외하고는 사기업을 국영기업으로 바꿀 수 없도록 했다(88조). 여기에서 한국은 이제 국가가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기업이 한국의 산업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서 사기업의 탄생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공산주의 체재를 이길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된 것이다.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남한과 북한은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갔다. 북한은 모든 것을 국유화해서 국가가 통제했지만 남한은 토지개혁을 통해서 농민의 자존감을 살리고, 귀속재산 불하를 통해서 사기업을 육성해 나갔다. 그러나 이런 사기업이 완전하게 사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승만 정부는 수입대체산업 육성을 통해서 경제 건설의 육성을 꾀했고, 박정희 정부는 수출주도경제를 통해서 국제무역에 박차를 가했다. 그래서 통상을 죄악시하던 한국이 이제는 수출을 통해서 살아가는 국가가 되었다. 대한민국이 이렇게 발전할 수 있게 된 원인은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제도와 이것을 작동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자유무역국가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계속)
박명수(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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