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걸어 다니셨고 지금도 걷고 계신다. 예수님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걷고 계시며, 또한 걸어 다니시며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신다. 거지, 소경, 병자, 애통하는 자, 소망을 잃은 자를 만나신다. 그분은 아직도 이 땅에 아주 가까이 계시며 낮의 열기와 밤의 추위를 느끼신다.…이 세상의 길과 사막과 거친 곳을 걷고 있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하면 겸손(Humility)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는 땅이나 흙을 의미하는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나온 말이다. 나는 계속해서 흙이나 땅 가까이에 있어야 한다. 나는 구름들을 바라보며 더 나은 세상을 꿈꾸곤 한다. 그러나 시선을 다시금 이 땅에 두지 않는다면, 함께 걷자고 나를 초대하며 길고 고된 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내 꿈들은 결코 열매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과 함께 걷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나 자신의 가난을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내면 깊은 곳의 상처, 피곤함, 무력함,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바로 거기서 나는 땅과 관련을 맺으며, 바로 거기서 진정 겸손해진다. 그렇다! 바로 거기서 나는 이 땅을 걷고 있는 사람들 모두와 하나가 되고, 나 역시 한없이 연약하지만 고귀한 존재로 사랑받고 있음을 발견한다.
- 헨리 나우웬, <예수님과 함께 걷는 삶>
이러한 모든 풍부한 신학적 진리는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장소를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관한 나머지 조항을 제시하기 위해 모세와 만나는 장소로 정하신 말씀에서 집결된다(출 25:22).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두렵고 위험천만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날 때 그 만남의 장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의 능력, 그의 계시의 말씀, 율법, 그의 언약적 신실하심, 속죄제사를 통한 그의 크신 자비와 죄 사함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가득하다. 또한 그룹들이 통로 쪽을 바라보지 않고 서로를 마주보며 증거궤를 향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만일 그룹들의 역할(상징적이든 아니든 간에)이 성전/왕궁의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께로 향하는 통로를 지키는 것이라면 그들은 율법을 통해, 그리고 속죄의 “덮개”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 J. 대니얼 헤이즈, <하나님의 임재와 구원>
본문에서는 네피림이 외계인이라거나 혼혈이라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들을 ‘이름난 사람들’이라고 설명한다(6:4). 대단한 이름을 얻는 일은 바벨(11:4)과 아브라함 (12:2)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의미심장한 주제다. 따라서 하나님이 여기에서 그저 ‘이름난 사람들’이라고만 알려진 무리를 꾸짖으신 일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 아니다. 즉 우리가 신적 존재가 땅에 내려와서 사람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았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알아낸다고 해도 창세기에서는 그보다는 네피림의 자손을 향해 이렇게 질문하는 것에 더 집중한다. “대단한 이름을 얻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 드루 존슨, <우주의 시작 : 창세기 1-11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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