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올해 6·25 70주년을 맞아 최근 서울신학대학교를 정년퇴임한 박명수 교수(한국교회사)의 논문 ‘거시적인 측면에서 본 6·25 전쟁과 한국사회’를 연재합니다.
II. 6·25전쟁이 가져온 한국사회의 변화
1. 6·25 전쟁과 대한민국의 서방 자유세계 편입
6·25 전쟁의 가장 큰 결과는 휴전선의 설치이다. 그러나 휴전선은 단지 한반도만 둘로 갈라놓은 것이 아니라 휴전선을 통하여 한반도는 두 개의 중요한 문화와의 단절을 가져왔다. 하나는 중국중심의 중화질서와 소련중심의 사회주의이다. 이 휴전선 때문에 더 이상 북방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올 수 없었다. 6·25전쟁 이후 중국은 “무찌르자! 오랑캐”의 대상이 되었고, 소련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소련에 속지 말자”라는 말이 유행하였다. 지금까지 한반도를 규정하던 두 가지 중요한 세력이 6·25 이후에는 더 이상 남한에는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중국문화는 오래 동안 한반도를 결정하는 중요한 변수였다. 물론 개항 이후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이라는 것은 상당히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중국은 한반도에 중요한 국가였다. 하지만 6·25를 통해서 중국 공산당과 싸운 한국인들에게 중국은 더 이상 우리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국가가 아니었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6·25 이후 약 40년 동안 만큼 중국과 단절된 역사를 가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 기간 동안 한반도는 중국의 공산당만이 아니라 중화질서에서도 분명하게 벗어나 있었다.
소련 역시 개항 이후 한반도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원래 동토 시베리아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고 싶었던 소련은 한반도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사실 개항 이후 한반도에 제일 큰 위협은 일본이 아니라 러시아였다. 한국이 최초로 조미조약을 맺게 된 것은 러시아를 막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러시아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 때문에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러시아에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난 다음에 소련은 공산주의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반도를 지배하고자 하였다. 소련은 주변에 모든 나라에 공산주의를 전파하였고, 그래서 유라시아의 대륙은 붉은 색으로 물들었다. 그런데 이런 호열자와 같은 공산주의를 막은 것이 바로 휴전선이다. 휴전선은 한반도를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자유롭게 만들어 주었고, 이것은 오늘의 대한민국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 것이다.
6·25전쟁을 통해서 남한사회는 중국과 소련의 정치문화와 단절되었고,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남한사회를 미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세계와 하나로 묶는 중요한 계기를 가져왔다. 6·25 전쟁이후 한국인에게 미국은 “아름다운 나라”가 되었고, 일본은 다시 일어나는 나라가 되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바로 이런 새로운 자유세계 질서 속에서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미국 중심의 서구질서가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과거 한국인들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한문을 공부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영어능력이 실력을 좌우하는 세상이 되었다. 물론 해방과 더불어서 이런 미국중심의 서구화는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6·25 전쟁이후라고 생각한다. 이제 미국문화는 서울의 엘리트에게만이 아니라 시골구석, 구석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사실, 한반도에 미국문명이 들어온 것은 19세기 선교사들의 입국에서 부터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한반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선교사들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반도가 어디 있는가도 몰랐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한반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미국인에게 낯선 땅이었다. 하지만 트루만 독트린 이후 공산주의를 막는 것이 미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된 다음에 한반도는 미국에게 공산주의와 싸워 이겨야하는 전선이 되고 말았다. 이제 남한의 성공은 미국의 성공이 되었고, 남한의 패배는 미국의 패배가 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이 한국사회를 도와야 하는 당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발전을 가져오게 하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게 형성되었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은 극에 달했다. 여기에 소련은 기름을 부었다. 소련의 국동정책의 제 1목표는 한반도를 일본에서 분리하여 이 지역에 친소정부를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친일파 숙청은 매우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한국과 일본은 다 같이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세계에 속해있게 되었고, 다 함께 공산주의를 막아야 하는 공동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반일 감정이라는 대중적인 정서와 자유세계의 공동멤버라는 국제질서 사이의 이중적인 현실에서 한국 정치는 갈등을 겪게 되었다. 여기에서 나온 해결책이 대중적으로는 반일감정을 유지하지만 정치와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국제적인 공조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은 상당한 반일 감정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정치적, 경제적 공조를 통해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던 것이다.
6·25 전쟁이 만들어 놓은 휴전선은 한민족을 갈라놓은 눈물의 분단선이다. 하지만 이 분단선 때문에 대한민국사회는 중국과 소련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고, 이런 가운데 대한민국은 미국과 일본의 선진기술을 도입하여 오늘의 정치, 경제의 대국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으로는 휴전선은 민족 분단의 철조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화질서나 공산주의의 위협에서 우리를 막아주는 울타리가 된 것이다. 이런 울타리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발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2. 6·25 전쟁과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체제의 확립
한반도가 개항이후 중화질서와 서구질서 사이에서 갈등했다면 3·1 운동이후 한반도의 또 다른 갈등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갈등이었다. 3·1운동이 일어난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국제질서는 과거 식민지 지배를 꿈꾸었던 제국주의 시대가 지나가고, 1917년 약소민족의 해방을 내세운 볼셰비키의 공산주의와 1918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한 자유민주주의가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사실 한반도의 많은 사람들은 볼셰비키의 공산주의 혁명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러시아가 한반도에 대해서 취한 태도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 윌슨의 주장에 한국인들은 환호하였다. 사실 이것은 한국만이 아니었다. 전 세계에서 식민지로 고생을 하고 있었던 수많은 나라들이 윌슨의 주장에 고무되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당시 세계에는 수많은 미국선교사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들을 통해서 미국을 보게 되었다. 당시 한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919년 3·1운동은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중심으로한 국제질서를 택한 것이다.
그러나 1919년이 지나고, 1920년이 되면서 윌슨의 주장이 비현실적인 것이라는 것이 들어나게 되었고, 결국 미국은 스스로 제안했던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다. 여기에서 미국을 믿고 독립운동을 하였던 수많은 사람들은 실망하게 되었고, 결국인 “미국을 믿지 말라”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등장한 것이 바로 공산주의이다. 미국에 실망한 사람들이 이제는 소련으로 가게 되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공산주의를 꿈꾸게 되었다.
1945년 해방되었을 때, 한반도에는 두 세력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는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민주공화국을 세우자는 주장과 다른 하나는 소련을 중심으로하는 인민공화국을 세우자는 주장이다. 결국 이 두 주장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였고, 결국에 가서는 북한에는 인민공화국이 남한에는 민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한반도에는 공산주의 보다는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북한에는 조만식이 가장 유명한 지도자였고, 남한에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이 다같이 최고의 지도자였다. 남한사람들도 대부분 70% 정도는 민주국가를 세우자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소련의 인민위원회제도 보다는 미국의 대의제도와 삼권분립을 지지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8년 5·10선거를 통해서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대한민국의 탄생은 한국인들의 선택이 아니라 국제정치의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1919년부터 한국인들의 꿈은 민주공화국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것이 해방 후 3년의 논쟁을 통해서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를 배우게 되었고, 5·10선거를 통해서 한국인들은 민주공화국을 선택한 것이다. 사실 민주주의가 강요가 아니라 한국민의 선택이었다는 것은 해방 후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월남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해방 후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은 약 150만 명에 해당하는데, 남한에서 북한으로 간 사람들은 불과 13만명 밖에 되지 않는다. 민심은 공산주의 보다는 민주주의를 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가장 강력한 반공주의자들은 북한에서 월남한 사람들이다.
6·25 전쟁은 한국인들에게 보다 실질적으로 두 체제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먼저 전쟁 직후 처음 몇 달 간은 남한사람들이 공산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시기였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믿었고, 이들은 전쟁이 시작되어 북한군이 남한에 진격하면 수많은 인민들이 나와서 환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서울에 진주한 다음에 그런 봉기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 해방 몇 년 동안 이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배우고, 그것을 선택하였다.
실지로 1950년 여름과 초가을은 남한 사람들이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전쟁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떠나 피란했지만 일부 사람들은 피란을 가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공산주의에 대한 순진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이들이 경험한 공산주의는 지독한 것이었다. 매일 학습을 통하여 공산주의를 가르쳤지만 이들은 점점 공산주의에 대해서 회의를 느꼈다. 주로 머슴들이 주동이 된 소위 완장부대들의 행패는 소위 인민재판과 인민위원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었다. 특별히 초가을이 되어서 수확에 대비해서 세금을 정할 때, 일제시대 보다 더 가혹하게 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버렸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철수할 때 자발적으로 이들을 따라 올라갔던 사람들은 불과 얼마 되지 않았다. 사람들은 농민과 노동자의 천국을 환영하지 않았던 것이다.
1950년 10월 이후에는 소위 북한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미군은 38선을 넘어서 북한에 진주하였고, 이 기간에 많은 사람들은 미국을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고, 이들에 생각하는 미국은 지금까지 북한이 선전하던 미국과 달랐다. 미국은 우선 막강한 힘을 가진 나라였고, 이들이 추구하는 민주주의는 인간의 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였다. 1950년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철 수 할 때, 미군과 더불어서 함께 철수 한 사람은 백만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흥남에서 철수하는 미군과 함께 피란 온 사람만 10만명에 이른다. 이같은 월남 피란민의 출현은 당시 북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본 두 가지 체제 가운데서 어느 체제가 좋은 것인가는 실증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반도의 전선은 또 다시 바뀌었다. 압록강 까지 밀고 올라갔던 유엔군은 철수를 거듭하여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말았다. 이제 서울사람들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다같이 경험하여 보았다. 과연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하였을까?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였을 때, 서울은 정말로 텅 비었다. 과거 공산주의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이제는 망설이지 않고 분명한 결단을 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1·4후퇴이다. 대부분의 서울사람들은 미군의 철수와 함께 남쪽으로 피란을 떠났다. 대한민국은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이 체제를 선택한 것이다.
이 같이 한국인들의 대한민국 선택은 또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졌다. 6·25 전쟁은 수많은 전쟁 포로를 만들었고, 이 포로들 가운데는 국민당정부나 남한에서 징집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보다는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선호하였다. 이들은 포로생활 가운데 자유세계가 인간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게 되었고, 이것은 이들로 하여금 민주세계를 택하게 만들었다. 미국은 제네바협정에 따른 무조건 송환을 반대하고, 자유선택에 의한 송환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이승만은 독단적으로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켜 버렸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보여주는 것이었다.
6·25 한국전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두 체제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이것을 통해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산주의 보다는 민주주의를 택하게 되었다. 6·25 전쟁은 대한민국을 반공국가로 만들었고, 사람들에게 국가체제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이 출발했다면 1950년 6·25 전쟁은 대한민국의 체제를 공고하게 해 주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계속)
박명수(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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