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강 목사(중심교회 원로)는 20세기 마지막 청교도라 불리는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 목사의 ‘로마서 강해’ 전 14권을 번역한 목회자이자 신학자다. 1976년부터 2005년까지 29년간 진행된 과업이었다. 그 때문일까. 서문강 목사의 얼굴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의 모습이 스쳐갔다. 그는 이외에도 아더 핑크의 ‘히브리서 강해’,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린도전서 강해집’과 ‘신앙와 정서’, 찰스 스펄전의 ‘설교전집’, 존 플라벨의 ‘은혜의 방식’ 등 총 70여 권의 개혁주의 저서를 번역했다. 아래는 지난 22일 진행된 그와의 인터뷰 일문일답(2편).
Q. 교인들에게 칭의와 성화의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목회적 방안은 무엇인가?
A. 성화는 칭의 받은 사람이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 안에서 그분의 거룩한 목적을 따라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생명의 시작은 성화가 아닌 칭의다. 성화는 칭의로 말미암아 주어진 영적인 화평관계가 더 풍성해지고 거룩해지는 과정이다.
칭의와 성화는 한 연장선에 있지만 이를 구분해야 한다. 이 둘은 한 몸 안에 있다. 그럼에도 몸은 여러 지체로 구성돼 있다. 머리와 가슴이 한 몸에 있지만 서로 구분된다. 요즘은 칭의와 성화를 뒤죽박죽 섞어놨다. 성화의 열매를 칭의의 조건으로 말하는 신학도 있다. 소위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말하는 자들의 주장이다. 톰 라이트(N. T. Wright), E. P. 샌더스, 김세윤 박사 등이 있다. 칭의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전적인 은혜다. 칭의를 우리 삶에서 성화의 열매로 증명하려는 것은 잘못됐다. 마치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어야 생명이 주어진다는 얘기와 같다. 이것이 옳은가? 죽은 나무에서 꽃은 안 핀다.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성화가 있을 수 없다. 만일 성화의 열매가 하나도 없다면 이는 죽은 믿음이다. 야고보서 2장에서 말하고 있다.
그럼 반대로 성화의 열매가 어느 정도 되어야 그 칭의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누가 성화의 열매 분량을 정하는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도 여전히 죄로 연약해서 넘어진다. 그렇다고 칭의의 효력이 없어지는가? 아니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속량의 은혜에만 근거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사람에게 값없이 은혜로 전가시켜주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것을 가지고 가셨고, 우리는 예수님의 것을 받았다. 칭의는 우리의 행실 여부에 따라 왔다 갔다 하지 않는다. 오직 대속의 은혜에만 의거한다.
로마서 5장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고 나왔다. 성화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이지, 성화가 이뤄져야 칭의가 더욱 견고해진다는 얘기는 말이 안 된다. 톰 라이트 같은 사람들은 유대 관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유대의 언약 관계 속에서 우리 의가 주어진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시내산 행위 언약은 하나님과의 회복을 위한 또 다른 방법이 아니다. 오히려 시내산 언약은 이신칭의 교리의 절대적 필요성을 부각시켜준다.
Q. 톰 라이트 등 ‘바울에 대한 새관점’을 주장하는 자들은, 유대 언약 관계 속에서 순종을 제대로 해야 칭의를 얻는다고 주장하는 건가?
A.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아서 값없이 은혜로 칭의된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열매를 보아야 그 나무를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열매가 좋아야 나무의 좋음이 입증된다. 성화의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들, 곧 믿기 전이나 후나 아무 차이가 없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복음의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칭의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들, 즉 죽은 믿음이다. 성화의 열매를 강조하려면 칭의의 은혜부터 강조해야 한다. 성화부터 강조하면 안 된다. 칭의의 은혜를 강조해야 그 동기 속에서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동기가 된다.
그렇다고 너무 성화를 강조하면 도덕주의가 된다. 말(칭의)이 마차(성화)를 끌어야한다. 마차가 말을 끄는 게 아니다. 성화를 동력으로 삼아서 칭의로 나아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칭의의 영광과 효력 그리고 은혜 속에서 성화의 동력이 나온다. 성화의 열매를 잘 맺는 사람은 늘 칭의의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들이다. 도덕성을 강조해야 도덕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는 율법주의고 도덕주의다. 도덕을 강조하면 열매가 나오는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한번 보기를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과 다를 바 없었다.
Q. 시내산 언약은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가?
A. 시내산 언약은 그 자체로 옳다. 율법의 요구가 그 자체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을 구원시키지도 못한다. 하나님 앞에 세울 능력도 없다. 오직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다. 시내산 언약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당시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모세는 어떻게 구원받았는가? 두 돌판을 받고 행함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다. 그도 여전히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시내산 언약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과 대치되는 개념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결국 구약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Q. ‘순종을 잘하면 복받는다’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나?
A. 복을 재정의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의 복이 최고의 복이다. 구약성경에서 순종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오벳에돔 가정에게 복을 내리셨다. 그 사람이 율법을 순종한 것은 도덕성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순종한 것이다. 그 사람이 복을 받았다는 것이 율법의 의에 기초한 게 아니었다. 결국 그리스도를 통해서 베푸신 구원이라는 은혜의 동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함으로 된 것이다. 이것은 복음에 기초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그리스도 뿐이다. 우리 선행을 중보의 근거로 삼으면 율법주의가 된다.
Q. 보통 복이라고 했을때 '이 땅에서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A. 그런 기준이라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도 잘 사는 사람들이 많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나온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누렸다. 그런데 그 사람이 복을 받은 것인가? 아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도 세상적인 방식을 따라서 굉장한 절제와 치밀함으로 부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도 복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나? 아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의 영적 관계가 없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 결국 진정한 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는 복이다.
복음의 영광으로 '아 이 사람은 복을 받았다'고 불리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을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믿음이 좋은 경우에도 고난이 뒤따르는 사람도 많다. 복을 세속적인 기준으로 말해선 안 된다. 그렇다고 세상적인 유복함이 아예 필요 없다고 말해도 안 된다. 그것도 삶의 한 방편일 수 있으니까.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삶도 필요하다. 다만 그것이 주어지면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잘 감당해야 한다.
Q.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란 무엇인가?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는 지난해 타임지에서 “신약이 말하는 천국은 하나님의 왕국의 지속적 진보(God's ever-advancing Kingdom)를 통해 피조세계가 회복되는 것에 관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A.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왕국(Kingdom of God)이다.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이뤄지는 나라다. 여기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백성들로 이뤄진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놀라우신 택함을 받고 성령의 인치심을 받아서 영화롭게 된 사람들로 이뤄진 나라다. 피조물의 회복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돼서야 이뤄진다. 오히려 로마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까지 피조물이 허무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영화롭게 되고 그리스도의 형상을 완전히 본받는 것으로 최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복을 이해해야 한다. 구속론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Q. 그러면 개혁주의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뤄지는 것인가, 아니면 죽음 이후에 이뤄지는 것인가?
A. 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이미 임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세적 표현이다. 하지만 지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있음에도 이를 대적하는 연약과 죄악성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된다. 의에 거한다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며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의미한다.
Q.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자는 운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A.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이뤄간다는 것인가? 사회정의와 평등으로 이뤄지는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 법규로 이루자는 것인가? 아니다. 이것은 자칫 전체주의이고 사회주의적인 발상이 될 수 있다.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 이상론이다. 그러나 이를 이뤄가는 인간을 주체로 상정한다면 인간 마음 속에는 여전히 부패한 죄악성이 있는데 어떻게 유토피아를 이뤄갈 수 있는가? 역사상 사회주의가 말하는 진정한 이상향을 평화롭게 이뤘던 전례는 없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리스도의 대속론을 중심으로 두지 아니한 하나님 나라와 정의는 결국 인본주의적 정의로 흘러가기 쉽다. 이것이 사회복음이다.
Q.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A.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사람 속에 임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기뻐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팔복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것이다.
팔복을 사회정의라고 가르치면 안 된다. 팔복에서 첫 계명은 심령이 가난한 자다. 이 사람이 거듭난 자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깨는 자다. 자신의 의는 하나도 없다. 거듭나게 되면 나는 빈털터리다. 그럴수록 심령이 가난해진다. 심령으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을 진실로 인식한 사람에게 복이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은혜 외에는 자신을 채워줄 것이 없다고 깨닫는 사람이다. 그래서 천국을 온전히 소유하게 된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자신의 죄적인 모습을 깨닫는 것이 먼저다.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한 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사람이다.마음 속에 일렁이는 정욕을 제어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 경건에 이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항상 팔복을 보면 정죄감만 느낀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은혜만을 의존한다고 했다. 팔복은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천국윤리다. 하늘에 속한 윤리다. 이는 내 힘으로 안 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역사하셔야 한다. 그래서 자기 의는 없다. 항상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기도하며 성령의 은혜를 힘입어야 된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8장에서 내 힘으로는 죄를 이길 수가 없다고 강조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을 해방시켰다고 말했다.
Q. 칭의와 성화 등 모든 신앙을 아우를 핵심은 무엇인가?
A. 사도는 그리스도 대속의 은혜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했다. 이를 집중적으로 알아야 한다. 이를 계속 묵상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안에 머물고 기쁨이 우러나온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팔복에 순종이 되어 진다. 이것도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다.
Q.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A. 원로목사로서 할 일은 여전히 견지해왔던 믿음·소망·사랑을 끝까지 견지하는 것이다. 그 동안 목양했던 교회가 늘 말씀으로 믿음의 정도를 걸어가도록 협력하고 덕을 세우는 것이다. 원로목사는 남은 날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따라 하나님 나라에 갈 때 까지 복음을 위해 섬기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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