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공산·자유 진영 사이의 국제전
‘애치슨라인’ 그었던 미국의 극전 참전
여러 요인 있겠지만, ‘기독교 양심’도
한반도 분단이 전적으로 외세 탓?
전쟁 중 北 치하서 피부로 공산주의 체험
‘신앙의 자유’ 찾아 많은 기독교인들 월남
‘자유민주’ 스스로 선택한 것도 같이 살펴야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자유 통일’”
올해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기쁨도 잠시, 우리 민족은 다시 참혹한 비극을 겪어야 했다. 그 참화는 과연 어떤 의미였으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국내 대표적 교회사학자인 박명수 교수와 함께 그 70년의 세월을 거슬렀다. 박 교수는 얼마 전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정년퇴임했다. 아래는 박 교수와의 일문일답.
-다소 막연한 물음일 수 있지만, 6.25는 어떤 전쟁이었나?
“그것은 국내만이 아닌, 국제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던 전쟁이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체제 경쟁, 즉 냉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때였다. 한반도는 그런 냉전의 축소판과도 같은 곳이었다. 3.8선을 경계로 분단됐던 상황은 그 자체로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다. 상대가 언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결국 6.25가 발발했다.”
-6.25는 어떻게 일어났나?
“직접적으로는 북한의 남침이지만, 그 배후에 있었던 소련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당시 소련은 동유럽 국가들을 장악해 갔는데, 미국으로서는 이를 저지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소련 역시 그런 미국이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침 김일성이 남침하겠다고 했을 때, 스탈린은 처음엔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것이 소련에 나쁠 게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미국이 참전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 할 수 있는 기회였고, 설사 참전해도 미국의 동유럽 전선 분산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계산했을 수 있다. 또 만약 중국까지 개입한다면, 그들을 친소 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도 봤을 것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모택동의 지원 동의를 받아오라 했던 건,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미국은 6.25가 일어나기 전 남한에 주둔시켰던 미군을 철수시켰고, ‘애치슨라인’이라 불리는 극동방위선에도 남한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6.25가 일어나자 유엔군과 함께 참전했는데.
“미국의 아시아 전략은 태평양을 지키는 것이었고, 그런 점에서 한반도는 물론 중요하긴 했지만, 일본 만큼은 아니었다. 애치슨라인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 미국이 참전을 결정한 데는 여러 외교적, 국제정치적 요인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기독교 국가로서 그들의 신앙적 양심의 발로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6.25 직전 남한에 미국 측 특사로 파견됐던 덜레스는, 후일 국무장관이 되는 등 정치적 실력자였는데 장로교인이었다. 그는 남한에 무수한 기독교인들과 교회가 있다는 걸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 한반도가 공산화 된다면 그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잃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이것이 미국의 6.25 참전 결정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또 복음 설교가로 당시 많은 미국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인지도가 높아 정치적 영향력이 있었던 빌리 그래함 목사가 참전을 요청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있다. 6.25가 일어나기 전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책임을 유엔으로 넘겼다는 점이다. 이는 또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즉, 애치슨라인에 포함된 일본까지는 미국이 직접 방어하겠지만 한국은 세계가 함께 지켜야 한다는 메시지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반도 상황을 단지 미국과 소련만이 아닌 전 세계적 문제로 부각시킴으로써 공산주의에 맞선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구축을 염두에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6.25가 발발했을 때, 중국은 소련의, 영연방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미국의 편에 섰다.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당시 영국은 미국이 새로운 패권 국가로서 국제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경계하던 때였다. 그런 영국, 곧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연방이 확실한 미국의 우군으로 섰다.”
-그와 같은 ‘국제전’으로서 6.25는 이후 어떤 국제 질서를 낳았나.
“결과적으로 6.25는 세계를 동서, 즉 소련이 대표하는 공산진영과 미국이 대표하는 자유진영으로 분명하게 나누었다.”
-그것이 남한에는 어떤 의미였나?
“그야말로 새로운 역사의 분기점이었다. 그 전까지의 한국, 다시 말해 조선은 언제나 중국 등 대륙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그랬던 것을 3.8선이 막아버렸다. 더는 대륙을 향해 북쪽으로 오를 수 없게 되면서, 그 방향은 자연스레 그 반대편, 즉 해양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해양 세력의 중심은 미국이었다. 이젠 한문이 아닌 영어에, 유교가 아닌 기독교에 눈을 돌렸다. 무엇보다 공산주의가 아닌 자유민주주의와 더 가까워졌다. 혁명과도 같은 대전환이었다.”
-그럼 자유민주주의라는 건 우리의 선택이었다기보다 어쩔 수 없는 현실로 수용했을 뿐인가?
“한반도의 분단을 두고 그것이 전적으로 외세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 지금 우리 민족이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진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나, 이러한 시각은 6.25를 거치면서 나타났던 당시 남북한 사람들의 ‘선택’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한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상당 부분 당시 남한 국민 스스로가 선택한 결과로 볼 수 있다.
6.25가 발발하자 파죽지세로 남하한 북한군은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국군의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그러니까 부산 등 일부 지역을 빼고는 남한 대부분이 북한 통치 아래 들어갔던 것이다. 그 치하의 현실이 어떠했는가는 ‘인민재판’이라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즉, 당시 남한에 있던 사람들은 공산주의의 잔임함을 뼛속 깊이 느꼈던 것이다. 또 북한은 남한 지역에서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에 따라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토지의 소유권이 아닌 단지 경작권만 준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승만 정권이 이미 그 전에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기조로 토지의 소유권까지 민간에 넘긴 상태였다. 그렇게 토지를 소유하게 된 농민들로선 그것을 다시 빼앗아 간 북한에 당연히 불만이 컸을 것이고, ‘공산주의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북한에 있던 사람들도 그렇기는 마찬가지였다. 국군과 유엔군이 그 유명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고,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했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퇴각했을 때, 그들을 따라 북한에 살던 이들도 대거 월남했다. 그 수가 무려 1백만에 이른다는 추정도 있다. 흥남철수 규모만 해도 약 10만이었다. 그 안에는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난 기독교인들도 상당수였다.
무엇을 의미하나? 한 마디로 공산주의가 싫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닌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고, 전체를 위해 개인을 말살하는 체제에 대한 본능적 거부였다. 이후 70년의 역사는 그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명백히 증명해 주고 있다.”
- 6.25가 기독교엔 어떤 영향을 미쳤나?
“미국의 선교사들이 대거 몰려오는 계기가 됐다. 그런 점에서 6.25는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왔던 개항 때보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로교와 감리교 뿐만 아니라 침례교와 오순절 등 다양한 교파들이 비로소 한국이라는 극동의 먼 나라를 알게 됐고, 선교사를 파송했다. 그렇게 많은 교회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전후에 학교와 병원, 여러 복지 기관들을 세우며 마치 정부와 같은 역할을 했다.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전쟁의 참화를 딛고 이 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6.25 70주년이 된 지금,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간단하고 분명하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6.25는 전 세계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진영 사이에 벌어졌던 국제전이었다. 전쟁 자체는 승패 없이 휴전했지만, 지난 70년의 역사는 자유민주주의가 마침내 승리했음을 웅변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스스로 무너졌다. 그러므로 이제 남은 건 승리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북한과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6.25 70주년의 교훈이며, 우리와 기독교에 주어진 역사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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