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구약학자 월터 브루그만의 신간 '하나님, 이웃, 제국'이 출간됐다. 착취와 폭력을 일삼는 제국의 내러티브에 대항하는 텍스트를 구약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구약 본문은 하나같이 "부와 권력이 집중된 제국 한가운데서 등장"한다. 파라오의 이집트,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는 제국의 전형이었고, 다윗 왕조의 솔로몬도 미미하게나마 이스라엘 제국을 잠시 이룩했다.
제국들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약자의 부를 착취해 강자에게 몰아주었고, 상품화 정책을 추구함으로써 인간조차도 거래되고 소비되는 상품으로 위축되게 만들었다. 또 착취와 상품화를 위해서라면 모든 수위의 폭력을 즉시 집행할 수 있도록 만반의 채비를 갖추었다.
이런 제국의 악행을 합법화한 제도는 다름 아닌 예전(liturgy). 제국의 신들은 예전을 통해 찬양 받고, 그 대가로 제국의 관행에 정당성을 보장해주었다. 각종 신들에 대한 예전 덕분으로, 제국의 억압적인 사회 질서는 정상이라 여겨졌고, 민초들마저 착취와 상품화 정책을 관례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런 제국의 양상을 구약 성경은 그대로 흡수하지 않았다. 브루그만은 구약 성경이 "제국 한가운데서 옛 이스라엘을 위한 '대항 텍스트'(countertext)가 되었다"며 "제국의 내러티브는 일상 속 상상력을 통제했지만 구약은 이에 맞서는 대안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출애굽, 광야 체류, 시내산 언약으로 이어지는 출애굽기의 해방-언약 내러티브. 출애굽기 1~15장의 출애굽 이야기는 "야웨께서 해방을 이루시고 경제적 착취를 종식시키는 이야기"로서, "야웨께서 이집트 우상들보다 우월하신 분임을 보여준"다. 또 16~18장의 광야 체류는 "모자람 없는 물과 양식과 고기 - 만민을 위한 부요함 - 라는 놀라운 선물을 통해 파라오의 약탈 이데올로기를 고발"한다. 또 19~24장의 시내산 회집에서 야웨와 이스라엘 백성이 서로에게 신실하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은, 제국의 우상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야웨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네 제물 때문에 너를 책망하지 아니한다...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것이며...'(시편 50:8~), '객이나 고아의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며'(신명기 24:17)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인간 공동체와 개개인 모두를 존귀하게 여기시고 ... 이웃의 유익을 구하신"다.
브루그만은 이러한 '제국 VS 반제국'의 대비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옛 제국과 같은 정치경제학적 기획을 도모하는 현대판 제국들, 그리고 제국을 꿈꾸는 나라들로 넘쳐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현대 그리스도인은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고 브루그만은 말한다. "제국의 신들이 합법화한 착취, 상품화, 폭력 이데올로기의 내러티브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이스라엘 전승 가운데 계신 분, 곧 해방과 언약의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이웃을 위해 성실히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참여할 것인가?"
만약 반제국적인 야웨 하나님의 해방-언약을 따르기로 결심했다면, 세 가지 덕목이 그에게 요청된다. 정의, 은혜, 율법이다. 정의란 "분배의 맥락에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전과 존엄과 행복을 누리며 살도록 보장"한다는 의미이고, 은혜는 "보응의 전제를 버리고 긍휼의 손길을 건네는 행동"이다. 또 율법(법)은 "사회의 재화, 권력, 접근성을 공정히 분배하여 약자들에게 가해지는 각종 부당한 강탈, 억압을 차단하는 것"이다.
브루그만은 이런 덕목을 신앙 안에서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기를 기대하며, "성경의 대안적 전승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제국의 울타리를 걷어내고 전혀 다른 길을 내도록 힘을 불어넣는다"고 말한다. 원제 'God, Neighbor, Empire: The Excess of Divine Fidelity and the Command of Common Good'.
하나님, 이웃, 제국 ㅣ 월터 브루그만 저, 윤상필 역 ㅣ 성서유니온선교회 ㅣ 312쪽 ㅣ 16,000원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