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손 번성의 약속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에게 주신 약속은 그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크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가돌’이다. ‘가돌’은 그 민족이 갖는 우수성이나 영향력도 포함하지만 일차적으로는 규모가 크거나 수가 많음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큰 민족이 된다는 약속은 자손의 번성과 연관된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에서 부름을 받았다. 그들의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만 있었다.
성경에서 자손 번성의 약속은 자녀생산의 불가능성과 대비되어 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으로 온 이후에도 그들은 무려 25년이나 아들 없이 지냈다. 그 기간은 하나님의 약속만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고통의 시간이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의 성취가 지연된다는 갈등도 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여성으로서의 생리적 기능도 극복되어야 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저주로서 개인적인 불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손 번성의 약속을 정상적인 사고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삭을 낳게 된다는 희소식을 전달받은 사라가 웃어버린 것도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상황을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까지 기다렸던 25년은 곧 자신의 믿음을 연단시키는 훈련의 과정이었다.
2. 아브라함의 실수 두 가지
자녀 없이 25년을 지내는 동안 아브라함은 자녀 문제와 관련하여 두 차례의 실수를 범하였다. 첫 번째 실수는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자신의 상속자로 삼겠다고 요청한 것이다.(창 15:2-3)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창 15:1)이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방패와 상급은 아브라함으로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 약속의 다른 표현이다. 이에 아브라함에게는 자식이 없이 어떻게 큰 민족을 이룰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생겼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차선책을 생각해냈다. 그것은 자신이 신임하는 종인 다메섹의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엘리에셀은 “내 집에서 길리운 자”였으며(창 15:3) 후에는 이삭의 배우자 구하는 일을 맡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창 24:2)이었다. 엘리에셀을 노예출신의 첩에서 난 아브라함의 아들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아브라함의 신임하는 종으로 보는 견해가 더 설득력이 있다. 당시 종을 양자로 삼는 제도는 누지에서 발굴된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누지 지방의 풍습에 따르면, 부부에게 자녀가 없을 경우 다른 사람을 양자로 삼아 평생 자신들을 섬기게 하고 사후 후에는 곡하는 일과 장사지내는 일을 하게 하였다. 그 대신에 그는 정식 상속자가 되어 양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 정식 아들이 태어나게 되면 상속자로서의 양자관계는 자동으로 폐기되었다.
아브라함의 요청에 대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날 아들이 정식 상속자가 될 것을 다시 확인시켜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밖으로 이끌어 내어 하늘의 별들을 보여주시면서 그의 자손이 그렇게 많아진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시각적 기능을 활용하여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확인시켜 주셨다.
아브라함은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하나님 약속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것을 이루는 방법이 양자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식 아들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을 설득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곧바로 자신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였다. 어떻게 그러한 변화가 가능했을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동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녀 생산 능력이 갑자기 회복되어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것일까? 아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확인해주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 15:6) 아브라함은 말씀이나 약속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을 믿음을 통하여 새롭게 경험한 것이다. 하나님은 자식을 낳을 수 없다는 현실적 절망을 넘어 새로운 희망으로 미래를 열어 주시는 창조주이셨다. 아브라함은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서 그 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체의 능력을 받아들였다. 그런 점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자신의 성취나 결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득에 압도되어 생긴 것이다.
아브라함의 첫 번째 실수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별 다른 문제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두 번째 실수는 그 결과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충고에 따라 그녀의 여종인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그러한 일이 생긴 것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온 지 10년이 되던 때였다. 그런 아브라함의 행동 역시 흔하게 시행되던 사회관습이었다.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자녀가 없는 부인이 자신의 여종을 통하여 남편의 자녀를 낳게 하는 일이 많았다. 이럴 경우 첩에게서 낳은 자녀는 본부인에게서 낳은 자녀보다 그 지위가 다소 낮았지만, 크게 열등한 것은 아니었다. 첩의 자녀도 가장인 아버지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었고, 재산을 상속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상속의 분량이나 가계의 계승 등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는 다소 열등한 편이었다. 후에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재산을 상속받지만 선물형식으로 일부 재산을 물려받는 것에 불과하였다(창 25:6).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얻은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때를 끝까지 기다리지 않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려고 하였다. 그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 가정에는 커다란 풍파가 몰려왔다. 아이를 잉태한 하갈은 사라를 무시하는 일이 생기고, 이스마엘은 동생 이삭을 희롱하기도 했다. 결국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쫓겨났는데, 그러한 갈등은 400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 곧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랍민족과 이삭의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갈등이 중동에서 풀어야 할 최대 현안이다.
이스마엘의 탄생으로 아브라함은 또 한 차례의 커다란 신앙적 위기를 맞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눈앞에 보이는 이스마엘에게 더 큰 기대를 갖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나이는 점점 더 많아지고 사라는 아이를 넣는다는 희망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보니 비록 여종의 몸에서 태어난 이스마엘이지만 그도 엄연한 자신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아브라함을 지배하였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 17:17)라고 하면서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8)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그러한 아브라함의 신앙적 위기를 알고 계신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하셨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이고 이스마엘은 13세가 되던 때의 일이다. 이삭이 잉태될 것이라는 소식이 있기 바로 직전이었다. 오래 동안 기다려오던 약속의 성취를 앞두고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마지막 하나님의 당부이기도 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다. 믿음으로 바라보는 하나님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압도되어 사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성경은 ‘경외’의 삶이라고 표현하다.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두려움에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에 압도되어 극도의 존경과 신뢰로 가득 찬 모습이다. 아브라함이 지난 24년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인내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경외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런 믿음을 마지막까지 지키라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한 삶은 구체적인 ‘행함’이 있어야 한다. 신앙은 말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과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하였다. 신앙 안에서 행함이 지니고 있는 목표는 완전해 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다. 여기에서 ‘완전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탐밈’으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맑고 깨끗함을 의미한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신 완전함은 깨끗하고 성결한 삶을 말한다. 영어로 표현하자면, perfect(완벽함)가 아니라 pure(순수함) 혹은 blameless(무흠함)이다. 사람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실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해도 동기의 순수성에 관하여는 비난받는 일이 없어야 한다. 동기의 순수성은 내적 성숙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이다. 지금은 완벽한 것이 아니라 하여도 마음의 순수성만 있으면 날로 새로워지는 변화를 경험할 수 있다. 그렇게 날로 새로워지는 변화가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완전한 삶이다.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경외하며 살아온 아브라함도 완벽한 삶을 산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 보려고 애쓰다가 자주 실수를 범하는 나약한 모습의 한 인간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변함없는 신뢰가 있었다. 그것이 아브라함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요청이다. (계속)
권혁승 박사(전 서울신대 구약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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