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며
「비정한 길」1
길에 진액을 다 빼앗긴
저 바싹 마른 노인
길이 노인을 밀어내는지
노인은 걷지도 못하고
길 위에서 촘촘 튄다
어찌 보면 몸을 흔들며
자신의 몸속에 든 길을
길 위에 털어놓는 것 같다
자신이 걸어온 길인, 몸의 발자국
숨을 멈추고서야
자신만의 길을 갈 수 있을거나
길은 유서
몸은 붓
자신에게마저 비정한
길은 짓밟히려 태어났다
시인 함민복이 그려내는 '힘겹게 길을 걸어가는 노인의 모습'은 지금 코로나 19사태를 건너는 우리 모습과 조금은 아니 많이 닮아있는 듯합니다. 그것도 어느 한 지역이나 한 나라만이 아닌 전 지구적으로 말이지요. 세계가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지금껏 그 어떤 것이 세계를 이렇게 휘청거리게 했을까요? 이렇게 비정한 상황을 상상이나 해 보았나요?
역사자료에서만 보던 대재난의 시간을 우리가 보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요.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고, 직장엘 가지 못하고, 교회공동체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서로 격리된 채 있어야 하는 이런 상황을 누가 예측했을까요? '4차 산업혁명이다,' '인공지능(AI)이다' 해도 바이러스 하나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목하 우리의 현실인 것을 목도하니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우리 인생 가운데 어쩌면 단 한 번도 걸어가 보지 못한 '일상'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끝나는 길이 어디일지, 언제 끝날지 모른 채 걸어가야 하는 이 막연함에 일상이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에 우리에게 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각자는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이러한 가운데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보내는 시간이면, 이 시간도 귀한 시간일 것 같습니다.
2. 고독한 존재와 사회적 존재
1) 한없이 고독하라!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겨울임에도 떨어져 있어야 하는 각자의 감옥에서 사회적 거리를 두고 시간을 보내고 있는듯합니다. 무탈하신지요? 될 수 있으면 사람 많은 곳에 가지 않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만나더라도 악수하지 않고, 마스크를 쓰고 대화합니다. 마치 악몽 같습니다. 아니 악몽을 꾸고 있는 것이면 차라리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악몽을 꾸다가 깨어났을 때 그것이 꿈인지 알고 안도감을 느낄 때가 있지요. 그런데 이것은 악몽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심해지면 가족끼리도 거리 두기를 하고 지내야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거리 두기를 하고 살아야 한다면,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삶의 방식도 고려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한 경우 더더욱 개별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제는 온라인으로 거의 모든 것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기에 몸으로 직접 만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 가능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륙 합리론 철학자 중 한 명인 라이프니츠(1646-1716)는 실체를 '단자'(單子, monad, 모나드)라 했습니다. 단자의 특징은 "창이 없다"는 것인데, 그것은 '소통 없는 닫힌 세계'를 말하기도 하지만, 소통이 필요 없을 만큼 자족적인 모습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단자같이 격리된 시기를 보내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이 시기에 '멈춤'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동차 달리는 도로에는 체증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견딘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체증 없는 도로를 달리고 싶다면 다른 시간대에 운전대를 잡으면 되죠. 그러나 그런 시간대에는 갈 곳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체증 있는 도로에 있다면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선 그런 상황에 갇혀 있다는 인식에서 오는 짜증을 지워 버리는 것, 좀 더 빨리 가고자 하는 운전대 잡은 손과 어깨에서 힘을 빼는 것,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 등 인내하며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중요하겠죠.
수많은 우리 인생의 '멈춤' 사인 앞에서는 브레이크를 밟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 그러한 때인 것 같습니다. 강제적 멈춤일지라도 자발적으로 생각하고, 고독한 영성을 길러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시대 저항입니다. 올리비에 르모는 그의 책 『자발적 고독』에서, 자발적 고독을 추구하는 이들은, 현실에 안주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아니요'라고 말하며 자신만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이라고 진단합니다.2
자발적으로 고독하며 철저히 홀로 선 존재로 살아가면서 질문하면 좋겠습니다. '존재'가 무엇인지, '인생'이 무엇인지, '일상'이 무엇인지, '삶과 죽음'이 무엇인지, 멈추어 선 듯한 달팽이도 지나간 곳에는 왜 발자국이 남아 있는지, 삼위일체 하나님은 코로나 사태 속에서 무엇 하고 계시는지,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없이 고독하게 보내는 것, 그것도 인생길 걸어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스스로 제자들과 무리와 떨어져 고독한 시간을 가지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일으키신 후에도(마 14:23),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리하셨습니다(마 26:36). 우리 주님도 고독한 시간을 자발적으로 마련하여 아버지 하나님과 잇대어 있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수도원에 있으면서 잊힌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한편으로는 두려웠지만, 모두가 자신을 잊고 산다 해도 그 시간에 "변함없이 신실하게 맞아주실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더욱더 가진다면 그 시간도 복된 시간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고독한 마음에 "하나님을 맞아들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죠.3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차이, 곁에 없는 것과 항상 곁에 있는 것의 차이가 사람과 하나님의 차이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발적 고독 가운데 서로 만나야 합니다.
2) 한없이 소통하라!
감옥에 있는 동안, 여름에는 옆에 있는 존재가 한없이 미운 존재지만, 겨울에는 한없이 필요한 존재임에 틀림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 홀로 떨어져 살 수만도 없습니다. 함께 더불어 소통하며 지내야 합니다. 고독한 가운데 소통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나드처럼 자족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창이 없으면 창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코로나 19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슬픈 상황에서도, 자기 집 창문을 열어 놓고 혹은 발코니에서 노래를 하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이들이 많더군요. 그것은 자기만의 고독한 자리에서 문을 열고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겠지요. 소통이 시작되면 주변의 이웃들도 자기들의 창문을 열거나 발코니에 나와 함께 그 연주에 참여합니다. 분리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도 소통의 방법을 찾는 것이지 싶습니다. 죽음이 가까이에 있어도 살기 위한 몸부림일 겁니다. 산 사람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그 소통이 아름다워 보입니다.
어떠신가요? 소통하고 계신가요? 전화든 인터넷이든 창문이든 열어 세상과 소통하기를 소망합니다. 소통의 매개체를 통해 연결망을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웃과 세상과 이어져 있음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엄마의 배 속에 있는 아기도 탯줄로 엄마와 연결되어 있지 않고는 홀로 살 수 없듯이 홀로만 있지 말고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도 서로 소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고 일체로 계시지 않습니까? 서로 잇대어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세상과 소통하는 모델을,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델에서 찾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내어주고, 서로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위해 빈자리를 만들어 주는 모습을 우리도 찾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소통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를 전제하고 그 존재를 존중해야 합니다. 산책하다 보면 좁은 길에서 사람들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저쪽에서 두 명이 오고 이쪽에서 혼자 가면 그동안 저쪽에서 오던 둘은 자기를 제한하는 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로 거리 두기가 시행되자 저쪽에서 오던 이들이 옆으로 피하며 자리를 내주더군요. 코로나 19는 미국 사람도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인터넷으로 소통할 때 가짜 뉴스를 만들어 퍼뜨리는 것은 악 중에도 가장 큰 악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타자를 존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타자를 왜곡시키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연결망으로 이어져 있는 사람들을 헛되게 증언하는 이들은 반드시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부작용을 잘 극복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홀로만 살 수도 없고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홀로서기와 더불어 살기를 적절히 잘 유지하는 것이 필요할 듯합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본회퍼 목사의 말입니다. "공동체 안에 있을 때에만 우리는 홀로 있을 수 있고, 또한 홀로 있을 수 있는 사람만이 공동체 안에 있을 수 있다. 이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4 홀로 선 자발적 고독자와 공동체는 서로 유기적 관계 속에 있어야 합니다.
한없이 고독한 시간을 보냅시다. 그러면서 한없이 소통하며 삽시다. 니체가 그랬습니다. "만일 우리가 거울 그 자체를 관찰하고자 한다면 결국 거울에 비친 사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가 사물을 잡고자 하면 우리는 결국 거울 표면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이 인식의 가장 일반적인 역사다."5 니체가 말한 인식에서 거울과 사물은 분리될 수 없듯이, 고독과 소통 또한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코로나 19를 견디면서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이제는 조금 나아가 우리가 속한 공동체인 '교회'를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3. 교회가 할 일
1) 바벨론 포로기 같은 현실을 견디며
코로나 19로 인해 한국 교회든 미국 교회든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도 있지만 말이죠. 이 시기가 마치 바벨론 포로기 같아 보입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 때 유다에서 사로잡아간 이들을 후대의 바사 왕 고레스가 그들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건축하게 합니다. 바벨론 포로로 살아가면서 그들은 조국을 그리워하고 성전을 그리워하고 예배를 그리워했을 겁니다. 고레스 왕의 선포로 42,360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기 시작합니다. 그 성전의 기초를 보고 그들은 대성통곡합니다(스 3:12).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무너진 성전을 다시금 짓는 그들의 감격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입니다. 그들의 뜨거운 눈물을 우리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바벨론 포로기 같은 시기를 보내면서, 교회에서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온라인 예배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다시 교회에서 예배드릴 날이 올 것입니다. 상상을 해 봅니다. 그 첫 예배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아픔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 시대의 성도들이 그런 경험을 한 후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은혜로울까요. 모이기에 더 힘쓸 것입니다.
2) 교회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를 두고 예배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예배라고 하는 것은 교회에서 드려야 하는데 그러지를 않으니 논쟁이 발생한 것이지요. 거기에 따라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도 있었습니다. 정말로 교회란 무엇인가요? 건물인가요, 아니면 우리 자신인가요? 주일 학교 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또 교회와 예배당은 다르다고 배웠죠. 예배당은 건물이지만 교회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 구분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예배는 예배당에서 드린 우리의 오래된 전통 때문에 교회와 예배당을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의식중에 예배당을 교회와 분리 하지 않고 같은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우리 자신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예배당을 교회라고 말하기 때문이지요.
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려야 한다는 것은 아마도 3세기 카르타고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가 말한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데 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답이 나올 것 같습니다. 이 명제는 오늘까지 그 영향력이 있지요. 그러나 이 말은 당시 교회 즉 예배당 밖에 이단이 득실거렸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그런 의미를 제대로 파악한다면 그 말도 맞는 말이지요.
하지만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상황이 도래하니 교회라는 것이 본질상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하게 됩니다. 교회는 우선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밖에 구원 없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교회 건물밖에 구원이 없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회에 '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더 적극적으로 '교회 안에 구원이 정말로 있는지'를 묻고 답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교회의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회/예배당보다 크십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지만,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람은 하나님을 교회 건물에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는 이들도 있듯이 말이지요. 그러나 7년 동안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하나님, 하나님께서 땅 위에 계시기를, 우리가 어찌 바라겠습니까? 저 하늘, 저 하늘 위의 하늘이라도 주님을 모시기에 부족할 터인데, 제가 지은 이 성전이야 더 말하여 무엇 하겠습니까?"(왕상 8:27)
솔로몬의 고백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지은 건물 안에 가둘 수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않으면 예배드리지 않은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들은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정해진 예배 시간에 교회라는 건물 안에 있었다는 것으로 큰 위안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가는 것으로 자신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없으면 불안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면, 그리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면, 어디서든 예배드릴 수 있는데 교회 갔다 온 것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교회 못 가면 기도도 못하고 하나님도 못 만나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은 당연하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물이 중요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면서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화면에 보이니 우리는 혼자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매주 만나 함께 예배드리던 교회 공동체가 있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외로워도 힘을 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공동체 지체들이 숫자로만 존재하지 않고 함께 신앙 생활하던 교회를 떠올릴 수 있으니 교회 공동체도 중요합니다.
부차적이지만 교회에서 예배드려야 한다는 주장을 가지고 헌금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비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겠는데, 교회가 헌금 없이 돌아가는지요. 목회자들 사례비는 어디서 나오나요? 선교비는 또 어디서 나오고요. 이 시기에 개교회는 헌금의 소중함도 깨닫고 교회 재정도 살펴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모두가 소모적 논쟁을 피하고 다시금 교회공동체와 신앙을 돌아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교회'가 무엇인지,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 '참다운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시간이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교회 밖 사회로 우리의 관심을 기울이기를 소망합니다.
3) 사회적 공감에 기반한 신학 패러다임의 전환
백종원이 <골목 식당>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식당 개선을 도와준 강원도 팥죽 할머니가 암에 걸리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훔치며 "세상 참 거지 같네"라는 혼자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할머니는 아들을 먼저 보내고 식당도 불이 나서 힘겨운 삶을 살고 계셨던 차에 백종원을 만나 도움을 받고 식당을 다시금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진단을 받은 것이지요. 그러니 백종원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할머니와 영상 통화를 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얼굴을 보여 드리지 않았습니다. 눈물을 보여 드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겁니다. 이런 탄식과 이런 눈물이야말로 '공감' 아니겠습니까?
우리 교회가 적어도 세상에 대해 이런 공감의 눈물을 흘리면 좋겠습니다. 코로나 19사태는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연대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한다면, 교회가 세상에 대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는 자명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저 세상에 대해 헌금을 보내는 것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신 이웃사랑을 다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값싼 적선밖에 되지 않을 것입니다. 더 본질적으로 교회가 공공 영역에 대해 가져야 할 신학적 교회론적 이론을 먼저 정립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19로 인해 일부 교회의 예배 강행은, 앞에서 교회의 소중함은 이미 언급했지만, 세상에 대한 공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맹목적 믿음이 드러내는 비상식적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한국 교회 신앙이 어느 정도인지를 여실히 드러낸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신앙은 자신은 순교자가 될지 몰라도, 그 증상을 타자에게 전염시키면 그것은 엄연히 타자를 죽이는 것일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면, 예배만 잘 드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바이러스에서 면역시켜 준다고 믿는 것은 참다운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하죠. 믿음이 상식적 수준만 되어도 좋을듯합니다. 질병 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병을 고침에 있어서 믿음이 그들의 전문 지식 위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 마치 게임 할 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교회가 안고 있는 것 같아 안절부절하게 됩니다.
교회의 바른 모습을 위해 기본 신앙의 밑바탕에 있는 신학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을 속된 것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을 공부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와 떨어진 그 어디가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이잖아요. 우리가 함께 호흡하는 곳이잖아요. 내가 내 쉰 날숨을 이웃이 들숨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이 내 쉰 날숨을 우리가 들숨으로 받아들이며 살잖아요.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만이 내 쉰 날숨만을 골라서 들숨으로 받아들이나요? 아니죠. 어떤 경계도 없잖아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과 경계선만 그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경계선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나가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곧 고난주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런 시국에 다시금 예수님의 성육신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육으로 오지 않으셔도 세상을 구원하지 못하시는가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구원하지 못하시는가요? 왜 굳이 인간의 몸으로 오셨는가요? 주님은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시면 겪어야 할 여러 가지 고난을 생각하지 못하셨을까요?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오신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겪을 것을 아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으로 오셔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이 땅의 고난에 동참하는 우리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4. 일상의 소중함을 기억하며
코로나 19로 인해 막연한 불안감 같은 것이 우리에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혹시나 내가 걸릴 수 있고 혹시나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걸릴 수 있기에 그러한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겁니다. 내가 걸리면 어떻게 해서든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이 걸리면 얼마나 미안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겠습니까.
그러한 고난의 시기에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다시금 그 소중한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언젠가 동네 공원에 온 가족이 나가 시간을 보내다가 해거름 질 무렵 집으로 함께 돌아올 때 느꼈던 것은 일상의 작은 행복이었습니다. 행복이 뭐 별건가요? 들숨조차 내줄 수 있는 가족과 함께 무탈하게 하루를 보내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행복이지 싶습니다. 큰 것 이루지 못하며 필부로 살아간들 행복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
제가 sns에 올리는 일상에 관한 글의 일차 독자는 아내입니다. 내가 쓰는 글을 읽으면서 때로는 서로 함께 겪은 일상이지만 자신은 자칫 흘리며 지나가는 사사로운 사건들을 남편이 글로 남겨 그런 일상을 공유하게 해 주니 그것이 좋답니다. 그리고 농담으로 그것 때문에 데리고 산다고 하네요. 허걱. 일상 속에 흘러가는 모든 것은 어쩌면 기억되지 않고 사라지기도 하지만 남긴 기록은 가족의 추억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누구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일상에 의미를 부여할 때에만 그 일상이 살아있는 삶의 요소가 되는가 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그 일상의 한쪽 끝을 잡으려 손을 내밉니다. 무엇이 스쳐 지나갈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매일매일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 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선물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선물을 준 자의 뜻이 분명히 그 속에 깃들어 있기에 그 뜻을 바르게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물도 때로는 준 자에 대한 예의를 요하지요. 매일매일 주어지는 일상이 선물이며 은혜이기에 그 일상이 글이 되게 노래 되게 해 봅시다. 그러면 이 고난이 주는 시간의 의미도 희미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겠죠.
IV. 마치며: 영원에 잇대어!
비록 시대가 불안하여, 내가 들은 대로,
어려운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만사가 잘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를
정확하게 말해 줄 당신의 안내자들이 있다.
어떤 시대나 타당한 진리와
언제나 도움이 되는 처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그들은 모든 요령을 수집해 놓았을 것이다.
당신을 위하여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 한
당신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일에 사정이 달라진다면
물론 당신도 배워야만 할 것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시로 유명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당신들이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는다고 나는 들었다」라는 시의 일부입니다.6 코로나 19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 코로나 19 이전의 신학과 이후의 신학, 코로나 19 이전의 교회와 이후의 교회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코로나 19사태를 건너면서 인간의 삶 또한 완전히 달라질 것이기에 우리는 분명 배워야 합니다.
깃발의 펄럭임을 보면 바람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시대의 방향을 알기 위해, 특히나 지금의 상황을 알기 위해, 영원에 잇대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중심은 없고 펌프질만 해대는 인생이 아니라, 중심을 잡고 견고히 가기를 소망합니다. 동시에 시대를 우리와 연결해서 사고해야 할 것입니다. 태양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이 아니라, 이 방에서 떠서 저 방으로 지지요. 대상 세계를 먼 곳에만 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필요도 있을 겁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에 대한 신정론적 질문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제기될 것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몇몇 목사들이 그 원인을 어떤 특정한 사건과 연관 지어 설교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원인-결과 답변은 설득력이 전혀 없지요. 그리고 전 세계가 고난을 받고 있으니 무엇이 그 원인이라 해야 할까요? 다만 우리 모두가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신정론을 물을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고 답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고난 중에 기도하지만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아삽의 시처럼,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시 77:8) 묻기도 합니다. 주를 믿는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약속하신 약속을 분명히 성취하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의심했던 이들이 어디 우리뿐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심 자체가 그 고난에 대한 다른 답을 가져다주지 못함을 알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다시금 하나님께 조용히 나아가 그가 하신 말씀과 그가 베풀어주셨던 은혜를 묵상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삽처럼 우리도 "주의 모든 일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행사를 낮은 소리로 되뇌"(시 77:12)이기를 소망합니다. 이는 역사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시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죠. 고난 가운데 묵묵히 영원에 잇대어 말씀에 침잠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가끔 외줄 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 신기합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 자체도 어쩌면 외줄의 폭 만큼만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외줄의 폭이면 인생길을 걷기에 족할 텐데 너무나 넓은 길을 차지하려 할 때가 많습니다. 그 넓은 길을 걷다 보면 오히려 부질없는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던가요? 그 길 자체가 자기 것인 양 걷게 되지 않는가요? 반면에 외줄 위의 인생은 신중합니다. 단 한 순간도 허튼 곳에 생각을 두지 않게 됩니다. 함부로 입을 열지 않게 됩니다. 온 힘과 정성을 다해 목표를 향해 시선을 모으고 한 발짝씩 한 발짝씩 걸어가게 됩니다. 허우적거리는 두 팔을 보세요. 누가 저 공간을 허공이라 했던가요? 두 팔 뻗어 하늘을 잡으며 균형을 잡지 않는가요? 잡을 것이 저 하늘에 있는 것이지요. 오늘도 주어진 인생길, 보다 신중히 온몸과 정성을 다해 걸어가 봅시다. 그렇게 살아가 봅시다. 그러면 외줄 위에서 각(覺)하는 때가 오겠지요.
이번 코로나 19를 건너며 한없이 고독하게, 한없이 소통하며, 영원에 잇대어 있기를 소망합니다.
박동식교수(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각주)
1 함민복,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창비, 2013), 18-19.
2 올리비에 르모, 서정희옮김, 『자발적 고독』(돌베개, 2019), 11.
3 헨리 나우웬, 최종훈옮김, 『제네시 일기』(포이에마, 2010), 97.
4 디트리히 본회퍼, 정리련, 손규태옮김, 『신도의 공동생활』(대한기독교서회, 2010), 83.
5 니체, 박찬국옮김, 『아침놀』(책세상, 2016), 255.
6 베르톨트 브레히트, 김광규옮김, 『살아남은 자의 슬픔』(한마당, 2014),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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