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故 옥한흠 목사의 생전 주요 설교를 요약해 [다시 읽는 명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현대인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로 ‘가난’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유명한 사상가의 말로 ‘가난해지지 않도록 결심 하세요 가난은 행복의 적이다.’ 이 한마디가 현대인들에 마음을 잘 대변해준다. 가난은 어떻게 보면 악 같다. 각가지 사회의 악을 키우는 온상을 가난한 자리에서 많이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가난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신다.
아마도 돈이나 부나 향락을 우상처럼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매력이 없는 말이다. 더욱이 가난이라는 말의 의미를 들어보면 헬라어로 푸토코스, 동냥하는 거지를 말한다. 성경 속 나사로가 그렇다.
이러니 가난이 어떻게 복이 되겠는가. 주님께서 부한 자는 복이 있나니로 바꿔야 될 것 같다. 우리가 본문 말씀을 접했을 때 느끼는 반응이다. 우리는 가난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력을 가지고 선언하는 말씀이라는 점이다. 무지한 인간들에게 빛이요 거룩하신 그 분이 선언하시는 것이다. 물질적으로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한다. 이 말씀 안에 구원과 행복이 있다, 우리 자신의 선입견이 하나님 말씀을 깨닫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라.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마음의 태도를 말한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심령이 가난, 즉 마음을 비워야한다. 하나님 앞에 철저히 낮아지는 것을 말한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다.
누가복음 18:9 이하에 일화로 바리새인과 세리가 나온다. 흠잡을 때가 없는 바리새인과 남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는 세리이다. 이 두 명이 기도한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남들보다 좀 더 거룩하다 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악마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영적으로 교만한 것으로 하나님은 철저히 대적하며 하나님을 철저히 대적하는 인간의 악한 마음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했다. 바리새인이 그러했다.
반면 세리는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도 없었고, 자신이 가진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철저히 자신을 포기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긍휼히 여기신다. 철저히 마음을 비웠기 때문이다.
교회를 다니지만 안타깝게도 심령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이 많다. 왜 믿음이 자라지 않는가. 주의 말씀이 깊이 터치가 없고, 기쁨과 감사가 없는가.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안 생기는가. 마음 안에 가득히 채워져 있어서 그렇다. 자랑할 것이 많다. 아쉬운 게 없고, 기대고 싶은 것이 많다. 깊이 말씀이 들어오지 못한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불행하게 보신다.
우리가 진정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출신성분을 자랑하지 말라. 내가 어떤 좋은 가문에 속해 있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사람에겐 대단해 보이지만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이만하면 선하게 살았다는 생각은 케케묵은 생각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든든 해 보 일 수 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 앞에 심령이 가난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몰랐을 때는 대단한 사람으로 자신을 보며 긍지를 가지고 살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난 이후엔 다 버렸다. 예수님 앞에 나오니 모두 가 소용없는 것, 마치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마음은 이러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비우면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 구원을 받았다. 영생을 갚 없이 얻게 되었다는 표현을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한다.
이 시간에도 주님은 영과 몸이 상한 것을 치료하고 계신다.
둘째, 우리의 심령의 예수그리스도가 임재하시고 다스리시는 상태를 말한다.
누가복음 17:21에서 천국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마음이 천국에 이르는데 우리 마음이 기쁨이 충만해진다. 로마서 14:17 우리가 진수성찬 차려 놓은 이 세상이 좋다는 모든 것에는 천국이 없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내 심령에 이른다. 천국이 임하면 의를 사랑한다. 의를 사랑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기쁨이 있다. 악을 사랑하는 자에겐 사탄의 불행이 있다. 주님이 내안에서 다스리시는 천국이 있으면 내 안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있게 된다.
여러분의 심령의 천국이 있는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평강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비우시고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의 기쁨을 안겨 주시길 바란다. 복잡하고 침체된 기분으로 나왔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란다. 심령의 가난한 자의 복은 천국이 그 마음을 소유하는 복이다.
누가복음에는 심령이라는 말이 빠져있다. 가난한 자라고 표기했다. 돈이 실제로 없는 사람을 뜻한다. 마치 가난이 복이고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한다고 하는 것 같다. 그럼 부유한 자는 복이 아니라 저주요, 부자는 천국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이면에 깔고 있는 것 같다. 누가는 실제로 가난한 자에게 말하고 있음을 얘기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가난한 자들이었다.
무리들 안에는 구약이 말하는 가난, 사회에서 돈을 벌고 부유한 생활을 하려면 부정한 자들과 타협을 해야 되는데… 선택해야한다. 이들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차라리 버리고 주를 따를 것인가.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다. 가난한 자는 부유한 자 보다 쉽게 주를 믿을 수 있다. 일본은 부흥이 정말 안 된다. 한국교회를 빗되어 설명하길 한국교회의 부흥 배후엔 가난과 고통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도 교회엔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그렇기에 주를 믿는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 원하는 것 다 얻고, 원하는 공부 다 했다면 목사가 안 되었을 것이다. 나는 가난 때문에 예수 믿게 되었다. 만약에 우리가 가난 때문에 예수 믿었다면 가난만큼 나를 팔자 좋은 사람으로 만든 조건이 어디 있겠는가.
마태복음 19:23~24에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한다. 반대로 가난한 자는 구원받기가 훨씬 쉽다는 것이다. 가난해서 예수 믿은 사람은 감사하길 바란다. 가난한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생명을 걸고 믿는다. 예수 믿는 생활은 사치품, 교양이 아니다. 생존에 관련된 것이다. “예수 없인 나는 못살아”, 세상에서도 고생하고 서글프게 사는데 예수까지 내가 믿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다면 내가 어찌 억울해서 사나. 예수 믿는 것을 죽기 살기로 믿는다.
진정한 행복은 내 속에 있다. 마음만 비우면, 천국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이 다스리도록 내 마음을 내 놓기만 하면 거기에 행복이 있다. 돈이랑 관계가 없다.
세상에 속지 말라. 천하에 행복이 여기 있다는 사탄의 말에 속지 말라. 돈이 많은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부와 돈이 주님 앞에 가는데 장애물이 되고, 나를 비우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이다.
돈은 적당히 가지면 된다. 행복은 재산이 늘어나면서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다. 선진국에 경우 물질적 포만도가 일정 수치가 넘어가면 소득상승이 더 이상 행복의 역량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즉 잘 사는 사람은 적당한 수준에 부를 가지고 있는데 그 수준 이상으로 재산을 쌓아도 행복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후진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람은 조금한 것에서 행복을 느낀다.
여러분 속지 말라. 부자가 행복한 것은 아니다. 차라리 가난한 자가 행복한 것을 믿어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장애가 되는 부를 쌓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그 대신 여러분의 마음에 행복, 천국을 소유하시길 바랍니다.
‘두손들고 찬양합니다’라는 찬양이 있다. 함께 부르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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