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은 기억하던 것을 쉽게 잊는 경우도 있지만 죽을 때 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은 누구나 있기 마련이다. 기억 중에는 단기 기억이 있고 장기 기억이 있다.
단기 기억은 잠시 동안 기억 하다가 잊어버린다. 물고기나 쥐는 기억력이 3초라고 한다. 고양이에게 쫒기 던 쥐가 3초만 지나면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은 과거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자주 잊어버리는 것 중 하나가 다른 사람의 이름(83%)이고 단어(53%) 물건 놓은 곳(60%) 조금 전 있었던 기억이나 사랑하던 사람은 잊지 않는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조심 할 질병 중에 혈압, 심장, 질환, 중풍 그리고 치매이다. 본인도 기억 장치에 이상이 보여 구청 치매 검사 센터에 들려 조사를 받아보니 치매는 아니고 “망각” 증세가 조금 있다고 해서 다행으로 생각하고 감사했다.
치매는 기억력이 없다. 사람을 보아도 누구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그런데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던 사람은 쉽게 기억한다고 한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 자신과 동역했던 사람들의 이름을 정리 하면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수없이 많았겠지만 그 중에 소중하게 기억하는 사람을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을 ‘문안’ 하라고 한다.
그 문안하는 이유를 찾아보자. ‘동역자’들이기 때문이다. 동역이란 말은 '함께 일하는 사람 혹은 돕는 사람'을 말한다. 동역자는 참으로 좋은 단어이다. 동기생이라면 3년 혹은 4년 같은 교실에서 공부 했다는 이유로 인하여 잘도 기억 한다.
“동향”이라는 말 나와 전혀 관계없어도 고향이나 본적이 같다는 것 때문에 이념과 관계 없이 표를 찍어 준다. ”동족“이란 말도 있다.
전 정부가 북한에 퍼준다는 것으로 말도 많고 구설수도 많았다. 명분은 ”동족“이라는 것 때문이다. 또한 이익을 위하여 같이 일하는 것은 동업이다.
우리 성도들은 동역자들이다. 주님을 위하여 같은 일 하는 자들이다.
바울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향하여 동역자라고 했는데 이 말은 마음이 같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같을 수 있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맞추면 되는 것이다.
죽도록 사랑하여 결혼했는데, 살다보니 못 살겠다고 야단인 부부들도 많다.
왜 그러느냐고 물으면 성격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어떻게 성격이 같을 수 있는가? 이것이 이상한 일이다. 어떻게 잘 사느냐? 맞춰 사는 것이다. 사랑은 기술이라 한다. 무슨 기술인가? 서로 맞추는 것이다. 평생 살면서 맞추어지지 않는 것일진데, 내가 한 마디 더 한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복음을 위해 서로 맞추며 살아가야 한다.
동역자라는 말은 '같이 힘쓴다'라는 의미도 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데 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고 다른 한 사람은 놀고만 있다면 동역이 될 수 없다. 같이 힘써야 한다.
현재 우리도 우리가 뽑은 지도자를 향해 헐뜯고 험담을 일삼기보다, 기도하고 밀어주는 국민이 아쉽게도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자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 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되어 있는데, 바울은 부부를 나의 '동역자들'(my fellow workers)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본문에는 아굴라 부부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자세하게 기록해 놓고 있다.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든 지도자와 생사고락을 함께 하며 지도자를 대신해 조직을 이끌 수 있는 훌륭한 동역자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은 새삼 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 하느니라."
그들은 주의 종들을 위하여 자기의 귀중한 목숨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내어 놓았다고 한다.
여기서 “목숨을 내어 놓았다”는 말은 문자 적으로 도끼 아래 자기 목을 드리웠다는 말이다. 당시의 형벌 가운데 최고형에 해당하는 단두대 처형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기록하지 않았나 추측해 본다. 바울이 어려운 일에 처했을 때 이들 부부가 발 벗고 나서서 희생을 무릅쓰고 바울을 건져 내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그의 말처럼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겼다.
누군가가? 그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자가 없었더라면 그의 사역은 오래가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여기서 목숨이란 말은 오직 하나를 가리키는 단수로 쓰여 지고 있다.
여기 두 부부는 하나뿐인 고귀한 목숨을 복음을 위해 내어 놓고 있다.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여러분의 목숨을 내어 놓으려 하고 있나?
바울이 잊혀 지지 않고 기억되는 사람 중에 고마운 사람이었다.
사람이 복되고 형통한 삶은 만남의 복이 있어야 한다. 먼저는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데 가장 어려울 때 만나 주시는 그 분을 만나야 한다.
예수 만난 분 중에는 그 누구도 불행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하나는 필요한 사람 도와주는 고마운 사람을 잘 만나기를 바란다.
운동하는 사람도 훌륭한 코치나 감독을 만나야 훌륭한 선수가 된다고 한다.
바울은 본문에서 보는 대로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고마운 사람들인가?
성공 했다고 잘 되었다고 박수 쳐주는 사람 바로 고마운 사람들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상하다. 남이 잘 되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지 않다.
이런 이들의 특징을 뭐라 표현하나? 노예 근성이라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길을 가는데 수 없이 불평을 했다. 왜 그랬을까? 선민들이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 생활을 했기에 근성이 생긴 것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고마운 생각은 전혀 없다.
뒤에서는 항상 욕을 한다. 고마운 사람이 누구일까? 가장 힘들 때 도와주는 사람이다. 제임스 다이츠는 너무나 사실적 이어서 마치 사진처럼 보이는 비행기와 승무원들의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의 작품들은 스미소니안 박물관을 비롯하여 미국에 있는 많은 항공 관계 전시장에 걸려 있다.
그 작품 중에 무명의 용사들 이라는 제목의 그림은 급강하고 있는 폭격기를 고치고 있는 4명의 정비병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제2차 대전 중 태평양의 전투에 참여 했던 항공모함의 비행갑판의 아래 밑창에 있었다고 한다.
창백하고 진지한 모습에 기름투성이인 그들을 비행기가 다시 전투에 나갈 수 있도록 지칠 줄 모르고 일하고 있는 장면이다. 우리도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는 일을 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어느 날 나에게 상 주실 것을 확신하고 복음의 동역 자가 되어 보자(골 3:23-24).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잘나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솔로보다 듀엣이 났고 듀엣보다는 트리오, 트리오보다는 합창이어야 한다.
아무 솔로가 멋있어 보여도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합창에 견줄 수는 없다.
독주도 좋지만 많은 악기들이 하모니를 이루는 오케스토의 위력은 엄청나다.
하나님 나라의 일이 그렇다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동역을 이루면서 거대한 판이 짜여지고 그 퍼즐이 맟춰 지면서 장엄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함께 할 때 나오는 에너지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갖게 되어 진다.
일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할 때 일어나는 파워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다.
바울은 탁월한 사역자였지만, 그의 이룬 업적들을 보면 그를 돕는 인물들 때문에 가능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바울의 동역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목숨을 내 어 놓을 수 있었을까? 여기에는 비밀이 있다.
3절에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걸었다. 그것을 본 동역자들의 마음은 바울을 돕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돕는 자는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데 누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을까?
세상에 그런 사람은 없다. 동역자들이 바울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 놓은 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 생명을 내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또한 마찬가지로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걸면 우리를 돕는 사람이 나타 날 것이다.
단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 할 때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붙어서 우리와 함께 하는자 가 나타난다. 5절에 보면 또 저희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 하라고 하였고 21절에는 디모데를 향하여는 영적으로 낳은 아들이이라고 했다. 바울과 함께한 동역자들은 바울이 영적으로 낳은 아들들이다.
바울의 영향력에서 낳은 바울의 삶의 열매들인 것이다. 열매 맺는 인생에서 맺혀지는 열매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으면 영적인 계보가 생겨야 한다.
계보는 결혼해서 자손을 낳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구원받고 나를 통해 영적으로 태어나 자란 사람을 낳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 바로 동역을 통해서.
뵈뵈는 사도 바울의 정신적인 그리고 물질적인 보호자 역할을 했다. ‘보호자’(prostatis)라는 이 말은 pro(앞에)라고 하는 말과 sratis라는 말이 합쳐져서 "무엇 앞에 서 있다"는 뜻이 있다.
원래 이 말은 불법 체류자나 경제력이 취약한 이방인들을 법률적으로 변호해 주거나 권리를 찾아 주고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자력갱생의 삶을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자를 부를 때 사용했던 단어이다. 사도 바울이 여성도 뵈뵈를 나의 보호자라 불렀던 것을 보면, 그녀는 바울을 비롯한 많은 성도들의 필요를 베풀어 주었던 좋은 후원자 였음을 알 수 있다.
동역자는 앞에 서 있는 자이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하든지 앞에서는 일은 매우 위험하다.
전쟁에서 제일 선두에 있는 사람이 먼저 적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험한 길을 만나도 제일 고생하는 사람은 앞장서서 인도 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가는 곳 마다 놀라운 역사를 이루었고 세계를 무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훌륭한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사실을 볼 때, 서로 돕고 협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한 어떠한 난관이 있다 해도 한국교회와 우리 민족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 되어 가는데 쓰임 받게 될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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