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아버지를 따라 나는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서울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결혼하고선 필리핀과 한국과 미국을 떠돌며 생활하다 보니 내 안에 나그네 DNA가 숨어 있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나는 가끔 고향을 떠나는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떨까 상상해본다. 그가 살았던 갈대아 우르는 당대 가장 발달한 문명을 갖춘 도시였다. 문화가 발달하고, 살기에 편리한 시설들이 충분히 갖추어져 있던 도시였다. 미국에 와 보니 미국에 정주하는 사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미국에 대한 자부심이 크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넓은 정원이 있는 주택과 안락한 자가용과 값싸게 제공하는 커다란 마켓과 편의시설, 휴양시설 등을 보면서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제국의 도시에서 사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끝없는 경쟁과 성과 지상주의는 사람을 줄 세우기 하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사회의 삶은 행복할까?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하기에 서로 갈등하고, 파당을 만들고, 싸우는 모습이 과연 행복할까?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은 깨달았다. 산업 자본주의로 물든 사회는 결국 인간의 삶을 공허하게 만들 뿐이다. 그는 새로운 삶을 찾고자 버몬트 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들어갔다. 그는 단순하고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기로 하고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자본주의에서 독립된 경제를 이루는 것, 둘째, 자신의 건강을 지키며 사는 것, 셋째, 사회를 생각하며 바르게 사는 것이었다. 그는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을 절반쯤은 자급자족할 수 있기 위하여 농사를 지었다. 그는 산골짜기 쓸모없는 땅을 개간하여 기름진 밭으로 가꾸어 채소와 과일과 꽃을 키웠다.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고 농사를 지었다. 그는 더 많은 생산과 이익을 위하여 농사짓지는 않았다. 그가 연구하고 공부하며 농사를 지어본 결과 먹고살기 위해서 6개월 농사지으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삶은 검소하였다. 그는 6개월 일하였고, 나머지 6개월은 연구, 여행, 글쓰기, 대화, 가르치기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직접 지은 그의 집은 늘 열려 있어서 많은 사람이 왔으며, 그들과 음식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았다. 그는 은행에 빚을 지지 않았고, 20년 동안 병원에 가거나 의사를 만난 적도 없었다. 그는 말하였다.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스콧 니어링이 현대 미국의 물질문명에 환멸을 느껴 버몬트 산골로 들어갔던 것처럼 혹시나 아브라함도 갈대아 우르의 물질문명에 환멸을 느낀 것은 아닐까? 아브라함이 그런 마음을 가졌든 가지지 않았든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은 나그네 삶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나그네의 삶이 복이라고 선언하셨다(창 12:1-3).
하나님께서는 창조하면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명령은 ‘땅에 충만하여라’(땅에 널리 퍼져라)였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은 모두 흩어져 살았다. 노아의 후손도 마찬가지였고, 아브라함의 후손도 동일하게 흩어졌다. 흩어지되 그냥 흩어져 떠돌며 방황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는 ‘노마디즘’(nomadism)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노마디즘을 굳이 번역하자면 유목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한 곳에 붙박여 사는 정착민이 아니라 여러 곳을 이동하며 사는 방식을 말한다. 들뢰즈는 노마디즘을 단지 이동하며 사는 삶에서 확장하여 사막이나 초원처럼 불모의 땅을 새로운 생명의 땅으로 바꾸는 것이라고 하였다.
정착민이 사는 방식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땅을 확장하려고 경쟁하며 싸우는 삶이라면, 유목민의 삶(nomadism)은 고정관념과 위계질서로부터 해방되어 기존의 세속적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그들은 불모의 땅도 마다치 않는다. 오히려 그런 땅을 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외면하는 광야와 같은 땅을 바꾸어, 사람들이 함께 더불어 살아갈 만한 땅으로 창조하는 사람들이 노마드(nomad)이다. 노마드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모의 땅을 무서워하지 않으며, 열린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이다. 노마드는 중심이 되려 하지 않는다. 노마드는 체계화와 동질화를 거부한다. 노마드는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기 위하여 창조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들뢰즈가 하나님의 뜻을 파악하여 노마드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가 노마드 사상을 이야기할 때 나는 자꾸만 성경의 인물들이 떠올랐다. 기존의 사회질서,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기꺼이 모험 여행을 떠나는 성경의 인물들이 생각났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나 나그네 삶을 살았던 것처럼 그의 후손인 이삭, 야곱, 요셉도 노마드로 살았다. 애굽의 노예로 핍박받는 이스라엘 역시 나그네로 살았다. 그들이 세울 나라도 그냥 세상 제국과 같은 나라가 아닌,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새로운 하나님 나라였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도전하였다. 너희는 이 세상 나라 사람이 아니다. 너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그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세움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 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 예수 그리스도, 바울, 베드로, 초대교회 모두가 노마드의 삶을 살았다.
오늘날 우리는 다인종, 다문화, 다언어적 환경에 살고 있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며 사상가인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 1943~) 는 21세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노마드에서 찾았다. 그는 인류 문명의 역사를 주도한 것은 노마드가 발명한 불, 언어, 예술, 그림, 바퀴, 글씨 등이었다고 하면서 정착민이 만든 것은 국가, 감옥, 군대, 세금뿐이었다고 하였다. 현재 세계 인구의 1/6이 노마드로 이동하며 살고 있는데, 그저 생존을 위해서만 움직이지 말고,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넘어 새것을 창조하는 삶을 살라고 충고하였다.
나는 세속의 학자들인 니어링이나, 들뢰즈나, 아탈리의 충고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적 지혜를 발견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은 정착민으로 공간을 확장하는 데 자기 전 생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공간이든지 그곳을 재창조하여 함께 더불어 살며 사랑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신앙을 나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노마드이다.
◈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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