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일은 언제부터 시작하였을까? 거대한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이집트의 노예들이나, 지구랏을 건설하던 바빌론의 노예들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었을까?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명백히 구분되는 고대 제국에서 안식일은 있을 수 없다. 한병철은 그러한 사회를 규율사회라고 하였다. 규율 사회에서 안식은 없다. 가해자와 지배자는 쉬고 싶을 땐 언제든 쉴 수 있지만, 피해자와 피지배자에게 쉼은 있을 수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지만, 현대는 규율 사회가 아니다. 현대인은 주 5일 근무제를 채택하고 마음껏 쉼을 허락한다. 오늘날처럼 제도적으로 시스템적으로 쉼이 보장된 때가 없었다. 그런데 현대인만큼 쉼에 대한 욕구가 강렬한 때는 없다. 사람들마다 쉼이 없다고, 쉬어도 쉬는 게 아니라고 아우성이다. 왜 그럴까?
한병철은 그의 책 ‘피로사회’에서 현대를 성과사회로 정의하였다. 성과 사회는 자신을 소진할 때까지 자신을 착취하여 결과적으로 주체가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피해자가 되는 사회이다.
“규율 사회는 부정성의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규정하는 것은 금지의 부정성이다… 성과사회는 점점 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Yes we can”이라는 복수형 긍정은 성과 사회의 긍정적 성격을 정확하게 드러내 준다.”
성과사회는 ‘할 수 있다’는 긍정 심리학을 전파하면서 개인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게 몰아붙인다. 성과를 거두지 않으면 낙오자가 되는 경쟁 사회에서 진정한 쉼은 없다. 쉴 때에도 성과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은 본래 상호 협력하며 사는 존재이지만, 성과사회는 개인을 극단적으로 파편화한다. 공동체가 함께 안식을 누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오직 개인적 쉼을 주고, 그 시간을 잘 활용하여 더 큰 성과를 거두는 발판을 만들라고 한다. 따라서 성과사회는 규율 사회보다 더 교묘히 사람을 피로하게 만들고, 쉼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월터 부르그만은 ‘안식일은 저항이다’라는 책을 통하여 인간을 쉬지 못하게 하는 파라오의 착취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한다. 그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안식일은 인간을 피로하게 만드는 성과사회의 철학과 시스템에 저항하라는 뜻이다. 모든 것을 개인화하여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회에서 개인적 안식에 저항하여 공동체적 안식을 지향하는 것이 월터 부르그만의 생각이다. 인간을 생산 수단화하는 반인간적인 관습에 저항하고, 완전한 의미의 자아(nephesh)를 되찾는 것이 안식일이다.
그런 면에서 구약의 안식 개념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안식일이 처음 등장하는 본문은 창세기 2장이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창 2:2-3).
전통에 따르면, 창세기는 모세가 기록하였다. 따라서 안식일이 실제 실천되기 시작한 것은 출애굽 이후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20장은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를 맺으면서 십계명을 주시는 데 안식일 계명은 네 번째다. 안식일 계명은 창세기 2장을 반영하면서 주었지만 내용은 매우 파격적이다.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출 20:10).
안식을 누릴 대상은 지배층뿐만 아니고 남종과 여종, 문 안에 머무는 객이나 가축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면서 그늘 밑에서 부채질하며 쉬던 지배층의 모습을 보았다. 사막의 뜨거운 태양 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던 이스라엘 노예들은 쉼이 없었다. 주인은 쉬어도 노예는 쉴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은 주인과 노예, 심지어 가축까지 쉴 수 있도록 신경 쓰라는 명령이다. 이 명령은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은 언약 공동체에 주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 계명을 주신 지 40년이 지난 후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서기 전 다시 한번 설교하고 가르치다. 주의할 것은 출애굽기와 신명기 사이에 40년 간격이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을 읽을 때 40년은 아무것도 아닌 듯 여기지만, 40년은 강산이 4번 바뀔 만큼 오랜 기간이다. 그동안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켜왔는데, 그 과정을 살펴본 모세는 안식일을 새롭게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강론한 것이 신명기이다.
신명기의 안식일은 출애굽기와 다른 점이 있다. 출애굽기는 창조 사건을 근거로 안식하라고 가르쳤다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11)
반면 신명기는 구원사건을 근거로 안식하라고 가르쳤다.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급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5).
모세는 왜 구원 사건과 안식을 연결하여 가르쳤을까?
일곱 번째 날은 단지 6일간의 노동으로부터 쉬는 날로서 6일 사역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것은 단지 쉼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분명 종이나 가축이나 나그네에게도 안식을 주라고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동안 쉼 자체만 관심을 가졌다. 그들은 타인의 쉼, 가축의 쉼까지 관심을 두지 않은 듯 보인다. 40년 동안 안식일 지키는 것을 지켜본 모세는 다른 강조점으로 안식일 계명을 가르쳤다.
“너희가 애급 땅에서 종이었더니 하나님께서 너희를 구원하였다. 그러므로 안식하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떤 상황에서 구원하였는지,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였다. 그들은 쉬려고 해도 쉴 수 없는 노예 상황에서 구원받았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개인화하지 말고 공동체화하라는 뜻이다.
월터 부르그만은 안식일은 세상의 철학과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집트나 바빌론과 같은 거대 제국이 절대 시행하지 않는 제도, 곧 안식일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확인하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서 함께 안식하므로 그들이 안식 공동체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마르바 던은 그의 책 ‘안식’에서 ‘사회적인 쉼’(social rest)을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공동체의 안식, 사회적인 쉼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없다. 개인적인 쉼과 안식은 많이 생각하지만, 나의 안식을 다른 사람의 안식과 연결하여 생각한 적이 별로 없다.
나는 주일 날, 교회 나오는 사람을 살펴보았다. 어떤 사람은 일주일 동안 생활하면서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나오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습관적으로 의무적으로 교회 나오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교회 나와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하는 분도 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일주일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기쁨으로 나오는 분도 있다.
공동체 안식은 나의 안식을 남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와 사랑과 기쁨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그의 기쁨을 피곤에 지친 다른 교인들, 회복과 쉼을 간절히 원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안식을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 공동체가 함께 안식을 누리고 회복할 수 있다. 교회 안에서마저 개인주의가 판을 치고, 각자 알아서 쉬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교회 공동체는 의미 없어지고, 공동체의 쉼도 없어진다. 그리되면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피곤한 날이 될 것이다.
세상이 우리를 경쟁 관계로 몰아가고, 성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 할지라도, 교회 공동체는 그것에 저항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은혜받고 사랑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과 행복을 나누므로 함께 안식을 누린다면, 한국 교회는 아직 희망이 있다. 안식일은 저항이다.
◈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참고도서]
1. 한병철, '피로사회', 김태환 옮김 (문학과 지성사 : 서울) 2014년
2. 마르바 던, '안식', 전의우 옮김(IVP : 서울) 2001년
3. 월터 브루그만, '안식일은 저항이다', 박규태 옮김 (복있는 사람 : 서울) 2015년
4. 마이클 호튼, '십계명의 렌즈를 통해서 보는 삶의 목적과 의미', 윤석인 옮김 (부흥과 개혁사 : 서울)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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