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는 하늘 본향에서 죄로 가득한 세상으로 이주하신 이주자이시다. 고향을 떠나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온갖 멸시와 차별과 설움을 당하셨다.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죽을 위기를 수차례 겪으셨고, 손가락질과 침 뱉음을 당하시며 수치와 모욕을 경험하셨다. 그리고 마침내 죄 많은 사람에 의해 의로우신 주님은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돌아가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자신이 나그네임을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인식하셨다.
마태는 예수님의 족보에 의도적으로 다말과 라합과 롯을 삽입해 기록했다. 그것은 순수한 혈통도 아니면서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는 메시지이다. 이스라엘은 고립된 섬에서 순수성을 지키는 국가가 아니다. 더욱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 독립 국가를 유지한 것은 겨우 500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나라로서 혈통뿐만 아니라 문화, 언어, 관습 모든 것이 뒤섞여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사회에서 살아야 했다. 모든 것이 혼재된 사회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것은 허울뿐인 명분이나 전통이 아니라 신앙의 순수성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족보에 이방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므로 예수님이 세우시려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온 천하 만물을 포용하시고 통일하시려는 뜻을 보여주고 있다(엡1:10, 4:6)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헤롯의 잔인한 권력을 피해 이집트로 강제 이주하는 경험을 했다. 나사렛에 다시 돌아와서 잠시 사셨지만, 이내 가버나움으로 이사를 하셨다. 예수님은 공생에 사역을 하시면서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 눅9:58) 고백하시므로 자신의 나그네 정체성을 분명히 하셨다. 예수님은 한 곳에 정착해 센터를 만들어 사역하지 아니하시고, 갈리리와 유대를 두루 다니시며 사역하셨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와 병든 자와 억압받는 자와 장애인과 약자와 죄인의 친구가 되신데는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자라신 갈릴리 지역도 다문화, 다인종 사회였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이방의 갈릴리라고 하였다. 이 말은 갈릴리가 이방인의 땅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유대의 땅이 분명한 갈릴리가 이방인의 땅일 수는 없다. 그것은 갈릴 리가 이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 마태 역시 이사야의 말을 인용해 ‘이방의 갈릴리’라고 함으로써, 갈릴 리가 예수님 당시에도 이방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갈릴리는 고대 세계 널리 알려진 해안도로가 있었다. 이 길은 ‘블레셋 사람의 길’(출13:17), ‘해변 길’(사9:1)로 불렸고, 로마 시대에는 ‘바다의 길’이라 불렸다. 지중해 바다를 끼고 있는 이 길은 북쪽 메소포타미아와 남쪽 이집트가 상대방을 공격할 대 주로 이용하던 길이었다. 그러므로 중간에 놓인 갈릴리는 전쟁의 피해를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다. 반대로 예루살렘은 정복하려면 최소 1년 이상 걸리는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예루살렘의 지배층은 전쟁이 벌어지면 성문을 굳게 잠그고 성 안에 숨어 전쟁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갈릴리 지역 주민이 죽거나 전쟁 노예가 되거나, 능욕을 당해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갈릴리 지역을 차별하고 멸시했다.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깔보는 말은 당시 예루살렘 유대인이 널리 사용하는 속담과 같은 표현이다. 특히 갈릴리 사람은 사투리를 사용했는데, 히브리어의 후두음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은 그들의 말투를 갖고 조롱했다.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그곳 하인들이 베드로에게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 한다”(마26:73)고 조롱했다.
해안 국제 도로가 갈릴리에 있기 때문에 피해를 봤지만, 경제적으로는 유익을 봤다.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북쪽(갈릴리)으로 보내라. 현명하기를 원한다면 남쪽(예루살렘)으로 보내라.” 유대 랍비들은 예루살렘의 학문적 전통을 자랑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했지만, 갈릴리 지역은 예루살렘이 부러워할 만큼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국제화 됐고, 다문화, 다인종 사회였음을 알려준다.
우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배경에 이러한 갈릴리의 다문화적 상황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순혈주의, 문화 우월주의, 배타적 신앙을 배격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인종과 혈통과 언어와 민족과 국가를 초월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함은 당시 국수주의적인 바리새인들에게는 충격이었고, 비판의 대상이 됐다.
예수님은 국수주의와 민족주의를 지향하는 나라가 아니라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였다. 그 나라는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를 인간으로 대접했다(눅4:18~19). 애굽의 종이 됐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면서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과 나그네를 대접하는 나라를 세우라고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가 바로 그 나라였다.
나그네였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흩어져 나그네로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셨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와 종교와 국경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하는 증인이 되어야 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주민으로 나그네로 살았지만,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하늘의 시민이었다. 모든 문화가 혼재되어 있던 사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그리스도인들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포용하는 통합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도록 부름 받았다. 이 정신을 잃지 않은 초대교회는 자신이 나그네임을 잊지 않고(벧전1:1)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나그네인가? 기득권층인가? 우리는 하나님 나라 복음을 선포하는가? 아니면 사람 귀에 듣기 좋은 성공 신화와 기복 신앙을 전파하는가?
◈ 배경락 목사는 美로고스교회 협동목사와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섬기고 있으며,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
[참고도서]
1. 알프레드 에더스하임, “유대인 스케치” 김기철 옮김 (복있는 사람: 서울) 2016년
2. Y. 아하로니, “구약성서 지리학” 이희철 옮김 (대한기독교출판사: 서울) 1993년
3. 김하연, 유대배경을 알면 성명이 보인다 (SFC출판부: 서울) 2016년
4. 마틴 헹엘, “유대교와 헬레니즘, 신약논단 17(3) 2010년, 한국신약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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