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이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다음주일은 종려주일이 되고 고난주간이 시작되고 성금요일이 다가옵니다.
이 수난주간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울었다는 이야기는 해마다 이 절기가 돌아오면 한번 씩은 듣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이야기는 고난주간의 한 가지 에피소드 정도로 넘어가고 큰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이 본문은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 역사성이 보장된 셈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성서신학자들의 주석과 목사들의 고난주간 설교에서 베드로의 눈물은 큰 주의를 끌지 못합니다. 모두가 예수님이 오늘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나를 부인 할 것이라고 하시는 예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상례이고 수난절의 한 가지 에피소드로 취급합니다.
오늘 우리는 베드로가 눈물을 흘리는 그 일과 그 일을 촉발한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치는 일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베드로가 눈물을 흘리게 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무얼까 궁금했습니다.
둘째는 그 원인에 따라 두 눈이 마주친다는 흔하디흔한 일이 일으키는 사건이 무엇인가(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적인 의미에서의 Ereignis)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첫 째,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가 눈물을 흘리게 한 원인은 닭 울음소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서구에서는 교회첨탑에 수탉을 세워 놓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느라 세상에 파묻힌 사람들에게 지금 서 있는 세상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손짓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성서학자인 브라운은 베드로를 돌이켜 물게 한 것은 수탉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눈길과 베드로의 눈길이 마주친 바로 그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R. E Brown. The Death of the Messiah. vol. 1. p. 608 cf.) 흔히 말하는 닭 울음소리가 아니라 대제사장의 뜰에 끌려가신 예수님이 돌아서서 베드로를 바라보는 그 눈을 보았을 때, 그래서 두 개의 눈이 마주칠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나가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다른 세 복음서 저자들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나서 울고 있는 베드로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22장 그 중에서도 특히 61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베드로가 통곡하는 진짜 원인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고개를 돌려 베드로를 바라 보셨다...(그 두 개의 눈이 마주쳤다)...베드로는 수탉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다"라고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났다...그는 밖으로 나가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부딪혔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예수님의 눈길이라도 나를 쳐다보는 그 눈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눈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말하지 않아도 너무 잘 알았습니다. 너무나도 잘 들렸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눈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눈들이 더 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권력자들의 부릅뜬 눈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작은 여종의 눈길 앞에서도 벌벌 떨던 베드로와는 너무 다른 베드로입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쳤을 때 무신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어도, 자세히 보지도 못했지만, 그리고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지만 도대체 무슨 사선이 벌어졌기에 그랬을까요? 이것이 존재론적인 사건이 아니면 무엇일까요?
두 번째는 그렇다면 두 개의 눈이 마주친다는 것이 무슨 큰일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눈은 인간의 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눈과 예수님의 눈,
내 눈과 하나님의 눈,
땅의 눈과 하늘의 눈,
이런 두 개의 눈이 마주칠 때에 일어나는 사건이 중심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눈이 마주쳐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눈과 사람의 눈이 마주쳤는데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도 안 됩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난(蘭)그림 또한 유명합니다. 그의 '난맹첩에 "인천안목 길양여의(人天眼目 吉羊如意)"라고 하는 화제(畵題)의 난 그림이 실려 있습니다. 이 화제에 대한 해석과 논의가 분분합니다. 그런 전문적인 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우리는 우리의 관심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여튼 하늘의 눈(天目) 과 인간의 눈(人眼)이 서로 바라보는 일은 하이데거가 말하는 하나의 사건(Ereignis)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입니다. 생명과 죽음이 오가는 사건입니다. 이런 사건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 영원한 생명이 걸린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우주론적인 존재론적인 사건입니다.
멀쩡한 두 눈을 가지고 맑고 푸른 하늘을 보고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눈뜬장님에게서나 볼 수 있습니다. 하늘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그 하늘의 눈을 내가 바라보다가 부딪히는 순간, 그 어떤 존재론적인 사건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것 또한 눈뜬장님에 불과합니다.
추사 김정희 선생 같은 사람도 작은 난 그림 한 폭을 그리면서 이런 제목을 부쳤다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는 멍하니 작은 난과 그 꽃만 보고 그리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작은 꽃에서 하늘의 눈과 인간의 눈이 마주치는 사건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일러 '인천안목(人天眼目)'이라는 무언가 일상과는 다른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는 그저 난을 그리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일상적인 일에서 하늘의 눈과 자신의 눈이 마주치면서 경험하는 그 어떤 존재론적인 것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제목을 시적으로 풀이하든 반대로 단순한 정치적인 의미부여 만으로는 무언가 2%가 채워지지 않습니다.(이성현, 추사난화- 난화에 실어놓은 조선 정치가의 메시지, 들녘, 2018. 29쪽 이하)
오늘 설교 제목을 고민하던 중에 두 개의 눈, 하나는 예수님의 눈, 다른 하나는 베드로의 눈이 마주칠 때 일어난 눈물의 사건을 함께 하자는 뜻으로 이 추사 선생의 화제가 떠올랐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눈뜨면 하늘을 바라보며 삽니다. 우리도 눈뜨면 사람을 바라보며 삽니다. 우리도 눈뜨면 우리 자신을, 그것도 모든 허울을 벗어버린 나를 바라보며 삽니다.
그런데 하물며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산다는 우리가 그 때에 막상 아무런 존재론적인 느낌도 없고 경험도 없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매일 매일 경험하며 산다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나의 눈이 마주쳤는데도 아무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창문을 통해 바깥의 하늘을 한 번 쳐다보십시다. 그리고 우리 앞에 있는 십자가를 한 번 보십시다.
거기에 무엇이 보입니까? 푸른 하늘만 보입니까?
그 십자가에 누가 보입니까?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까?
천주교회의 십자가에는 거기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있어 십자가 고상(十字架 苦像)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개신교회의 십자가상에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런 십자가를 쳐다보면서 몰트만 교수의 책 제목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보지 못한 다면 그 또한 믿음의 눈뜬장님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눈길과 베드로의 눈길이 마주쳤을 때에 베드로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왜? 무슨 눈물일까요?
이 사건은 Brown신부교수의 말처럼 닭의 울음소리를 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눈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염없이 울고 또 우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단순히 후회스러워서 울었다고 하면 너무 얄팍하지 않을까요?
베드로가 우는 모습은 '남자는 울지 않는다'는 말이 무색했습니다.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던 베드로는 남자가 아니었을까요? 베드로는 어부생활을 했던 남자 중에 상 남자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 중에서 수제자 소리를 듣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 수난서 기록을 승자의 역사라고 쉽게 말해 버릴 수 없다면 우는 베드로의 모습도 패자의 눈물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만은 없습니다. 베드로가 울고 또 우는 것은 예수님의 눈과 자기의 눈이 마주쳤을 때에 일어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자신을 경험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예수님과 눈이 마주치는가요?
우리는 매일 십자가를 보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한국 교회의 목사들과 성도들은 매일 예수님과 눈을 마주 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하루에 몇 번인지 조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마주칩니다.
그런데 도대체 거기에 무슨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가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는가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가요?
아예 예수님과는 눈을 맞추지 않고 있는가요?
아예 눈도 바로 마주치지 못하고 외면해 버리는가요?
모르긴 몰라도 베드로처럼 예수님과 눈이 마주쳤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늘의 눈인 예수님의 눈과 인간인 우리의 눈이 마주쳤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할 텐데, 한국교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짜 예수님의 눈과 나의 눈이 한 번도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또 묻습니다.
만약 나의 눈과 예수님의 눈과 진자 제대로 마주쳤다면 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를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울었을까요? 예수님을 만난 반가움 때문에 웃었어야 할까요?
운다면 베드로처럼 예수님 앞에 한없이 초라하고 죄인 된 자기 모습을 보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웃는다면 우리는 진짜로 예수님의 눈을 피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의 눈과 마주쳤을 때에 울어야 할 사람은 누구이며, 또 웃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좋아서 눈물이 난다는 말이 있지만 우리가 눈물이 흐르도록 운다면 무엇 때문일 것이며, 웃는 다면 그것은 도 무엇 때문일까요?
베드로를 바라보던 예수님의 눈빛은 어땠을까요? 감히 나를 배신하다니...하는 진노의 눈이었을까요? 그래 연약한 너를 이해한다는 너그러운 눈이었을까요?
말이 필요 없는 예수님의 그 눈빛을 보았을 때에 베드로는 무엇을 보았을까요? 진짜 무엇으로 보였을까요?
베드로는 순진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생각할 것 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눈물은 개인적이면서도 그 누구도 비켜 갈 수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이 베드로의 눈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새로운 존재가 되어 흘리는 하나님의 눈물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모르긴 몰라도 우리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는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한 번도 제대로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매일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고 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도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살려고 하지만 그러나 한 번도 제대로 나의 눈과 예수님의 눈은 마주치지 않앗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아무런 존재론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가톨릭 평신도 신학자인 김근수 교수는 이 장면에 '베드로의 배신'이라고 제목을 부쳤습니다. (가난한 예수, 580쪽 이하) 따지고 보면 베드로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런 배신자입니다. 배신자가 있다면 바로 우리가 배신자입니다. 다른 사람이 배신자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을 배신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배신이 아닙니다.
진짜 배신은 하나님, 예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베드로의 부인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바르트, 신학묵상, 기독교서회. 216쪽) 그러니 우리가 바로 진짜 배신자입니다, 내가 나에게 배신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예수님 앞에서는 두말 할 것도 없는 진짜 배신자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한 번 배신했습니다. 그러고도 역사에 두고두고 배신자의 원흉이 되어 버렸습니다. 베드로를 배신자라고 해야 한다면 그도 한번 배신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 번이나 배신했습니까?
한 번인가요? 두 번인가요? 세 번인가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가요? 그러니 우리는 누가 배신자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부인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인 자기 자신을 부인해서 남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렇게 배신해서 세상을 모두 가진다고 해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마 16:26)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를 두고 하시는 것입니다. 참된 자신을 잃어버리면서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가진다고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성공이라고, 출세라, 승자라, 힘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은 바로 그 손에 쥔 것들이 모래 늪으로 빠지면서도 나는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 중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안 되었으면 모를까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목사가 되었고, 장로가 되었고, 총회장이 되었고, 감독이 되었고, 학장이 되고, 총장이 되었었다면 예수님을 배신하고서는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배신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안다면 자금이 바로 내가 울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국가적으로나 민적사적으로나 올해 이렇게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사순절에 너도 나도 한국교회의 '베드로'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인천안목'의 하늘 사건을 경험하기를 기도드립니다.
베드로의 울음소리가 수난설화 속의 하나의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얼마나 권력에 약한지를 말해 줍니다.
지금은 너나 가릴 것 없이 하염없이 울고 또 울어야 할 때입니다. 하늘의 눈과 한번이라도 마주친 사람은 모두 울어야 할 때입니다. 특히 지도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울고 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종교계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더욱 더 울고 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온 나라의 남자들은 울고 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온 나라의 여자들도 울고 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라도 울지 않으면 언제 하늘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 칠 때가 있을 것인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지금이라도 울지 않으면 언제 다시 예수님의 눈과 나의 눈을 마주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 온 나라 사람들이 울고 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이것은 나라도 아니고, 교회도 아니고, 사람도 아닙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지금은 울고 또 울어야 할 때입니다.
하늘의 눈과 한 번이라도 마주치지 않은 사람은 울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과 한 번이라도 마주쳤다면 울고 또 울어야 합니다. 이런 눈물이 메말라 빠진 나라와 민족, 교회와 목사들에게 언제 다시 기회가 있을까요?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는 우는 척하고, 뒤돌아서서는 웃는 사람들은 아닌가요?
지도자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 나아가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런 사람이 아닌지 묻고 또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과 나의 눈이 마주쳐서 존재론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3월 18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사순절 다섯 번째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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