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최근에 세계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 소위 이슬람을 연구한 무슬림 학자들이 발표하는 논문들을 보면 한결같이 이슬람을 최대한 미화 시켜 말하고 있다. 이를 대하는 독자들은 혼동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눈앞에 벌어지는 현상은 매일 무슬림들의 테러로 온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데 무슬림 학자들은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고 주장을 하니 이 두 견해 사이의 괴리를 해결해 줄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우선은 이슬람이란 종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알아야 하는데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람들이 귀동냥으로 듣고 하는 말들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사실인양 받아들여 미화된 이슬람의 자료들을 대신 홍보해 주는 어처구니없는 사례들이 비일비재한 현실이 안타깝다. 우선 이슬람의 정체를 알려면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의 정체를 알아야 한다.
이슬람과 마호메트교(무함마드의 종교)
* 이슬람은 복종의 종교
필자가 어렸을 때만해도 교과서에 이슬람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다. 다만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이 사람들이 믿는 '마호메트교'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데 이들은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꾸란을!" 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죽이는 이상한 종교라고 배웠다. 사실은 그 말이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한민국 교과서에 그 말을 모두 사라지고 마치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이며 평등의 종교인 것처럼 미화시켜 놓았다.
이슬람이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만든 종교로서 그가 했던 모든 말과 행동은 이슬람의 교리와 율법이 되어 모든 무슬림들이 지켜야하는 모델이 되어 버렸다. 이를 이슬람에서는 우스와 하사나(Uswa Hassana)라고 하는데 무함마드가 했던 모든 행동들을 그대로 따라해야 한다는 교리다. 이슬람의 율법을 샤리아라고 하는데 샤리아(Shariah) 라는 것은 양들이 목자를 따라서 물 먹으러 가는 길을 말한다. 양들은 목자가 가는대로 묻지도 않고 고개를 숙여 앞에 가는 양의 꽁무니를 따라 무조건 앞으로 간다. 거기에 생각해보고 따져보고 물어보고 따라가야 할 이유와 명분을 찾는 일은 무의미한 행동이다. 이슬람이란 아슬라마(aslama)라는 '복종'이라는 아랍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혹자는 이를 살람(salam:평화)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미화된 거짓말이다. 무슬림이란 복종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샤리아에서 규정한 것은 묻거나 따지거나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다.
* 샤리아(이슬람의 율법)의 구성요소 꾸란과 하디스
이슬람의 율법의 구성요소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꾸란과 하디스인데 꾸란은 이슬람의 경전이지만 하디스란 무함마드의 언행록을 말한다. 무함마드가 생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무슨 행동을 했는지 또는 어떤 사건을 보면서 무슨 반응을 보였으며 누가 질문했을 때 무슨 대답을 했는지 등등...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했던 그의 말과 행동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의 말과 행동을 태어났을 때부터 일기를 쓰듯이 따라다니면서 누가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이 전해 준 이야기를 수집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하디스는 누가 수집했느냐에 따라서 그 신뢰도가 천차만별이다. 그 중 모두에게 그 권위를 인정받는 6대 정통 하디스가 유명하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1: The Sahih of Bukhari (194-256 A.H.)가 수집한 7,275개 하디스
2: The Sahih of Muslim (202-261 A.H.)가 수집한 9,200개 하디스
3: Abu Duad (202-275 A.H.)가 수집한 888개 하디스
4: Tirmidi (279 A.H)가 수집한 892개 하디스
5: Nisai (215-303 A.H.)가 수집한 915개 하디스
6: Ibn Majah (209-273 A.H.)가 수집한 886개 하디스
만일 이슬람에 하디스가 없었다면 무슬림들은 지금처럼 메카를 향해서 일어났다 앉았다 엎드렸다... 하는 식의 기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제각기 메카를 바라보며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했을 것이다. 만일 하디스가 없었다면 이슬람식 기도 전에 무슬림들은 우두(wudoo: 세정의식)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만일 하디스가 없었다면 소위 무슬림들이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이슬람의 다섯 기둥"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므로 꾸란만으로는 이슬람을 이해할 수 없고 하디스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이슬람에서의 하디스의 위상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무함마드의 행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경건하고 아름답지 못했다. 우리나라에 소개되는 하디스는 무함마드의 언행록인 하디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윤리적이고 훌륭한 것들만 발췌하여 소개하기 때문에 무함마드는 인류가 본받기에 전혀 문제가 없는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전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주변에 살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불쌍한 사람에 불과했다.
* 무함마드는 누구인가
무함마드는 주후 570년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의 하쉐미(Hashemite)가문의 꾸라이시(Quraish) 종족에서 가난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가 6살 때 어머니(Aminah)가 죽고 할아버지(Abdul Mutallib) 손에 맡겨졌다가 8살 때 할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시고 8살부터는 아부 딸립(Abu Talib)이라는 삼촌이 맡아 길렀다. 그는 학교에 다니며 공부할 여유가 없었다. 가난한 삼촌을 따라 잡일을 도우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가 그가 25세 때 대상무역 상단을 경영하는 부유한 40세 과부인 카디자(Khadijah)와 결혼을 하게 되어 경제문제가 해결되었다. 삶의 여유가 생긴 무함마드는 종교 문제에 심취하게 되었고 며칠 씩 동굴에 들어가 기도하는 일이 잦아졌다.
* 무함마드의 첫 번째 계시
그러던 중 주후 610년 첫 번째 계시가 내려왔다고 주장했다.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메카에서 알라(Allah)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자신이 알라의 메신저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많지 않았고 자신의 아내 카디자 그리고 조카 알리 등 몇 사람 외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다. 메카의 꾸라이시 족장들은 그의 메시지가 상업을 주로 하는 메카의 다신교도들의 신들을 인정하지 않아 그들의 반감을 사면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핍박했다. 그 때 무함마드는 추종자들도 별로 없었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우상 숭배자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려고 노력했다. 어려울 때마다 그의 힘과 방패가 되어주었던 삼촌과 아내가 죽자 그는 더 이상 핍박을 견딜 수가 없었다.
* 메디나로 이주한 무함마드
그가 핍박을 피해 몇몇 추종자들과 메디나로 옮겨 간 622년까지는 평화공존을 말했다. 그러나 그가 메디나에 와서 1년6개월 만에 총통치권을 획득하고 난 후에는 그의 계시의 내용은 180도로 달라졌다. 이제까지 힘이 없었을 때 외치던 이웃과의 평화는 없어지고 623년부터 무함마드의 삶은 돈과 좋은 상품들을 싣고 사막을 횡단하는 대상무역 상단들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세력 확장과 경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웃을 점령하러 가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무함마드가 직접 진두지휘해서 참여한 전쟁이 27회라고 한다. 무함마드는 전쟁을 치를 때마다 아름다운 여인들을 하나 둘 씩 자신의 몫으로 챙기다보니 아내들의 숫자가 자신이 정한 4명을 훨씬 넘고 말았다. 이에 대해서 무슬림들이 수근대는 것을 알게 된 무함마드는 자신에게만은 숫자에 관계없이 아내를 얻어도 된다고 하는 특별한 계시가 내려왔다고 주장했다.(꾸란33:50) 그래서 그는 하루에 9명의 아내들의 방을 꼬박꼬박 방문하면서 즐겼다. 무함마드는 632년에 죽었는데 그는 630년 자신의 고향이었던 메카까지 점령하고 타북 전투로 마지막 전쟁을 치른 후 632년 사랑하는 아내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지상의 삶을 끝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이 그려지지 않는가? 623년부터 630년까지 8년 동안 27회 전쟁에 참여했다면 해마다 3~4회 정도의 전쟁을 치렀다는 말이다. 무함마드가 치렀다는 전쟁은 아래와 같다.
1. 와든(Waddan)공격(623년8월)-부카리 하디스4:52:256,
2. 부와트(Buwat)공격(623년10월)-무슬림 하디스42:7149,
3. 둘아시르(Dul Ashir)공격(623년12월)-이븐 히샴, 이븐 이삭의 무함마드 전기
4. 사프완(Safwan)공격(623)-이븐 히샴, 이븐 이삭의 무함마드 전기
5. 바드르(Badr) 전투(624년3월)-꾸란8:47, 꾸란68:25, 꾸란8:6...)부카리 하디스 4:53:369
6. 사위끄(Sawiq)공격(624년)-이븐 히샴, 이븐 이삭의 무함마드 전기
7. 까이누까(Qaynuqa)공격(624년2월)-꾸란8:58, 꾸란3:118, 무슬림 하디느19:4364
8. 알 쿠드르(Al Kudr)공격(624년 5월)- 이븐 히샴, 이븐 이삭의 무함마드 전기
9. 티아므르(Thi Amr)공격(624년9월)- 꾸란5:11, 부카리 하디스5:59:458
10. 바흐란(Bahran)공격(624년) 이븐 히샴, 이븐 이삭의 무함마드 전기
11. 우후드(Uhud)전투(625년3월)- 꾸란8:36, 꾸란3:122 부카리 하디스3:30:108
12. 아사드(Hamra al-Asad)전투-(625년3월)-꾸란3:172~174 부카리하디스5:59:404
13. 나디르(Banu Nadir)전투(625년8월)-꾸란59장 꾸란2:256 부카리하디스3:39:519
14. 리까(Dhat al-Riqa)전투(625년10월)-꾸란4:101, 무슬림하디스 4:1830
15. 바드르(Badr)공격(626년)-꾸란3:173-176, 부카리 하디스5:59:627
16. 잔달(Dumatul Jandal)공격(626년7월)이븐 히샴, 이븐 이삭의 무함마드 전기
17. 참호(Trench)전투(627년2월)-꾸란33;10-13, 부카리 하디스5:59:435
18. 꾸라이자(Banu Qurayza)공격(627년2월)-꾸란33:26, 꾸란33:9 부카리4:52:68
19. 라히안(Banu Lahyan)공격(627년9월)-무슬림 하디스20:4672
20. 피닥(Fidak)정령(628년5월)-꾸란59:6-7, 무슬림 하디스19:2961
21. 카이바르(Khaybar)공경(628년5월)-꾸란48:20 무슬림 하디스19:4450
22. 와디(Wadi al Qura)공격(628년5월)-타바리 전기
23. 메카(Mecca) 점령(630년)-꾸란12:91-92, 꾸란34:49
24. 후나인(Hunayn)공격(630년)-꾸란9:25-26, 부카리 하디스4:53:370
25. 아우타스(Autas)전투(630년)-부카리 하디스5:59:612
26. 타이프(Ta'if)전투(630년) 부카리하디스5:59:615
27. 타북(Tabouk) 전투(630년10월) -꾸란9:49, 꾸란9:29 부카리 하디스5:59:702
그 당시의 전쟁은 말이 전쟁이지 사막을 횡단하면서 장사를 하던 대상무역 상단을 공격한다든지 조용히 살고 있는 주변 마을을 공격하여 점령한 것이다. 소위 이슬람의 선지자라면 전쟁을 할 때도 최소한의 윤리와 도덕을 준수하려고 노력하는 부분이 보여야 하는데 그가 평생 이끌었던 전쟁에 도덕적 개념이나 보편적으로 인정될만한 윤리적 배려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를 확인하고자 한다면 인터넷 구글 검색창에 알 아즐(Al azl)을 찾아보면 쉽게 확인될 것이다. 이는 부카리의 하디스와 무슬림의 하디스에 그 증거가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슬람의 역사적 자료이며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의 근거가 되는 자료이다.
그 중의 가장 정확한 하디스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부카리의 하디스 중 하나만 인용해 보자.
이븐 무하이리즈(Ibn Muhairiz)가 전하기를: 내가 모스크에 들어가면서 아부 싸이드(Abu Said Al-Khudri)를 만나서 그 옆에 앉아서 그에게 '알 아즐'(성교 시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 사정 직전에 성기의 삽입을 해제하는 행위)에 대해서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부 싸이드는 "우리가 알라의 사도(무함마드)와 무스탈릭 족속의 가즈와(Ghazwa of Banu Al-Mustaliq)에 갔을 때 아랍 포로들 중에 아랍 여인들을 배당 받았었죠. 우리는 성욕을 참기 힘들어 '알 아즐'을 했지요. 그러다가 우리 중에 알라의 선지자께서 계시는데 그분께 물어보지도 않고 '알 아즐'을 하면 되겠나 싶어서 알라의 선지자께 물었더니 '너희가 정말 그렇게 했다는 것이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의 날까지 태어나기로 예정된 자들은 어쨌든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어요.(부카리 하디스5:59:459)
* 이슬람의 윤리는 전쟁윤리
이슬람의 윤리는 대부분 전쟁윤리다. 전시의 윤리는 일반 윤리와 다르다.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죄악으로 여기지만 전시에는 적을 속이지 않으면 이길 수 없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라 전략이라고 부른다. 가장 확실하게 적을 속이는 것은 적을 이기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간음하는 것 역시 이슬람에서는 포로를 성폭행하는 것은 승리자의 권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가장 큰 죄악으로 여기지만 전쟁 때는 많은 적을 죽이는 자는 훌륭한 군인으로 평가된다. 그래서 9.11 테러를 통해서 3천명의 많은 사람들을 죽인 행위를 통해서 이 사건을 계획하고 실천한 오사마 빈라덴은 지금까지도 무슬림들에게 존경받는 영웅이다. 이것은 이슬람의 윤리의 기준은 전쟁윤리라는 것을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다. 전쟁윤리는 십계명의 대인계명을 완전히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다.
사실이 이렇고 이슬람의 교리가 이를 정당화하고 있는데 이슬람의 영성을 말한다면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가?
이슬람의 타끼야 교리
타끼야(Taqiyya) 교리를 모르면 이슬람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슬람에서는 알라를 위해서, 무함마드를 위해서, 이슬람을 위해서, 꾸란을 위해서, 이슬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하는 거짓말은 죄가 되지 않는다는 교리다. 무슬림들은 이런 교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이것은 꾸란과 하디스에 근거를 두고 있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이슬람의 교리다. 예를 들면 꾸란 2장225절에 "너희가 맹세를 했을지라도 진심으로 한 것이 아니라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최영길 역에는 "너희의 맹세 속에 비의도적인 것에 대해서는 책망하시지 아니하시나 너희 심중에 있는 의도적 맹세는 책망시시니라. 알라는 관용과 은혜로우심으로 충만하심이라."라고 번역하고 있다. 꾸란 16장106절에도 "마음은 이슬람에 대한 믿음이 가득하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배교한 것처럼 한 것을 제외하지만 이슬람을 배교한 자는 가혹한 징계를 받으리라"고 했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무함마드는 "사람들 간에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좋은 말로 꾸며대는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부카리하디스3:49:857) 또한 "전쟁 시 또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기 위한 목적이나 아내를 기쁘게 하기 위한 거짓말은 허용된다"고 했다.(부카리하디스 4:1:1939)
따라서 소위 무슬림 학자들은 마음 놓고 선지자 무함마드를 통해서 허락된 거짓말을 통해서 각자의 환경에서 이슬람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화시켜 가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미화된 이슬람
타끼야 교리 덕분에 이슬람은 한없이 미화되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어떤 부분이 거짓인지 분간하기가 매우 난감한 상황이다. 혹자는 이슬람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기 위해서 무슬림 강사를 초청해서 강의를 듣기도 한다. 그 때야 말로 듣는 이들의 머릿 속에 온통 거짓으로 도배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이슬람의 교리를 관용적이고 평화적인 교리로 바꿔놓는다. 필자는 이슬람권에서 20년을 살면서 그들의 강연과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 귀를 의심할 정도로 살벌한 이슬람의 실체를 꾸란과 이슬람 학자들의 강연을 통해서 확인하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귀국해 보니 한국의 이슬람이 너무나 미화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발행되어 중고등학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교과서에도 이슬람은 평화와 관용의 종교로 미화되어 있고 신문과 방송은 물론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을 번역할 때도 어김없이 타끼야로 미화시키는 것을 잊지 않는다.
* 여성 인권에 대한 타끼야
예를 들면 이슬람의 여성은 인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일반상식이 되어 있는데 소위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이슬람 학자라는 사람이 번역해서 출판한 책에 이슬람 원리와 개론(무함마드 A. 수하임 교수 지음 최영길 역:도서출판알림, 2007)이라는 책에 보면 "이슬람에서의 여성은 이슬람 이전의 그 어떤 국가와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슬람에서 여성이 누리는 명예는 다른 종교에서, 그리고 교리나 법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로마의 대회의에서 여성은 생명이 없는 존재로 결정되었고... 그리스 아테네에서의 여성은 쓰레기나 시장에서 사고파는 일반 상품처럼 취급되기도 했으며 혐오스러운 사탄의 작품으로 묘사되었다. 인도의 고대법에서는 여성은 역병, 죽음, 지옥, 독사뱀의 독이나 불보다 못한 존재였으며 남편의 죽음과 동시에 여성은 불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꾸란에 ...또한 여성도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갖노라...(꾸란2:228)라고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있다..."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른 문화를 비하 경멸하고 있으며 이슬람에서만은 여성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존재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이슬람에서 여성들은 남성의 절반만 상속을 받아야 하며(꾸란4:11) 법정에서 증언을 할 때도 여성 2명의 증언은 남성 1명의 증언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꾸란2:282) 또한 어떤 사람이 기도할 때에 그 사람의 끼블라(메카를 향한 기도 방향) 쪽에 개나 당나귀나 여자가 지나가면 그 기도는 무효가 된다.(부카리 하디스1:9:490) 여성은 개나 당나귀와 동등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의 거룩한 예배의 장소인 모스크에서는 여자는 남자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가 없다.
* 꾸란의 근거
사실 이 책에서 여러 번 인용한 "여성은 남성과 동일한 권리를 갖노라"는 말은 꾸란의 구절이라는 근거로 꾸란 2장228절이라고 적어 놓고 있지만 이 책을 번역한 동일한 사람이 번역한 한글 꾸란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다.
이혼한 여성은 삼개월을 기다리게 되나니 이는 알라께서 태내에 창조한 것을 숨기는 것을 막고자 함이라 만일 그들이 알라와 내세를 믿어 남편이 돌아올 의사가 있을 때는 남편은 이 기간에 돌아올 권리가 있으며 또한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권리가 있으나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나니 알라는 만사형통하심이라(꾸란228 최영길 번역)
이 구절은 교묘하게 미화된 부분이 여러 군데 보인다. 가장 첫 부분에 '이혼한 여성'이라고 번역한 부분이 있는데 이것은 '이혼 당한 여성'으로 번역해야 맞는다. 이슬람에서 이혼할 권리는 남자만 있다. 이혼을 의미하는 아랍어 탈락(Talaq)이라는 단어는 남자만 사용할 수 있는 단어다. 남자는 이혼을 한다. 이혼을 준다고 말할 수 있지만 여자는 이혼을 받는다. 이혼을 당한다고만 사용할 수 있다.그런데 여기서는 이혼한 여성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 구절은 이혼이 너무 쉬운 이슬람권에서 갑자기 이혼 당한 여성이 태내에 잉태되어 있는 상태에서 이혼을 당하면 아이의 소유권이 남편에게 있기 때문에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혼 당한 상태에서 세 번의 생리를 볼 때까지 남편의 집에서 임신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이 기간을 이따(Idda)라고 하는데 이는 이혼녀 임신확인을 위한 대기기간이다. 이런 기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여성들을 아이를 생산하는 도구로 전락시키며 이미 이혼을 당한 상태에서 오직 임신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집에 3개월을 거거하면서 의식주를 제공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수치스럽고 곤혹스런 상황인지를 이해한다면 이 기간이야말로 여성이 인권을 짓밟히는 굴욕적인 기간이라고 보인다. 이 기간 동안에 여자가 의식주를 제공받을 의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동등한 권리라는 말을 사용한 것처럼 번역하고 있다. 이 구절에 "여성과 남성이 똑같은 권리가 있으나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나니"라고 번역된 부분이 보인다.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도 이미 남성이 여성보다 위에 있다고 증명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권리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구절을 번역한 무신칸 역 꾸란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이혼 당한 여성은 세 번의 생리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노라. 그들이 알라와 종말의 날을 믿는다면 알라께서 태중에 창조하신 것을 숨기는 것은 합당치 않느니라. 그 기간 중에 남편은 화해를 원한다면 (이혼당한 아내를) 다시 불러 올 더 낳은 권리가 있노라. 아내는 (생활비를 제공받는 등) 남편(복종과 존경을 받는)과 비슷한 합당한 권리가 있으나 남편은 아내보다 위에 있노라. 알라는 전능하고 지혜로운 분이시라(무신칸 역 꾸란228) 이해를 돕기 위해서 영문 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And they (women) have rights (over their husbands as regards living expenses, etc.) similar (to those of their husbands) over them (as regards obedience and respect, etc.) to what is reasonable, but men have a degree (of responsibility) over them. And Allah is All-Mighty, All-Wise.(무신 칸 번역)
이 구절의 자기 멋대로 번역한 부분의 일부를 여성이 남성과 똑같은 권리가 있다는 꾸란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정말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다.
* 꾸란의 어떤 한글 번역본도 정직하게 번역되지 않았다.
한국에서 인용되는 모든 이슬람에 대한 정보들은 대부분이 이슬람의 일차 자료인 꾸란으로 확인해 봐야 하지만 한글로 번역한 꾸란 자체를 거짓으로 미화 시켜 놓았으니 소위 지성인이요 학자요 대학교수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국민을 속이고 있는 이들의 정체를 알리는 일이 시급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미화되었는가를 아는 일이 또한 시급하다.
알라(Allah)는 아브라함이 섬기던 신인가?
소위 이슬람을 조금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이슬람의 알라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아랍 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종종 듣게 된다. 이들의 주장을 듣고 이슬람을 모르는 사람들은 전문가들의 견해라고 그들의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거짓말을 대신 홍보해 준다.
* 알라는 하나님과 같은 신이라고 속이기 위한 네 가지 타끼야
이들이 이슬람의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거짓말이 크게 나누면 4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지능지수가 2자리에서 머무는 단순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만든 간단한 거짓말이다. 즉 한국어로 하나님, 중국어로 쌍띠,일본어로 가미사마, 헬라어로 데오스, 이것을 아랍어로 알라(Allah)라고 하는 것이다. 언어가 달라서 그렇지 뜻은 모두 동일하다는 거짓말이다.
둘째: 개중에 지능지수 3자리수를 자랑하는 소위 똑똑한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서 만든 버전이다. 즉 중동에는 엘(El) 또는 엘라(Ellah) 혹은 일라(Illah)라는 창조주 절대자 전능자 유일신을 지칭하는 신의 명칭이 있었는데 이것이 성경에 등장하는 바로 그 엘(El)하나님이다. 사무엘(하나님이 들으신다), 다니엘(하나님은 나의 재판장이시다), 요엘, 엘리야, 이스라엘... 이 신의 명칭에 아랍어의 정관사,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알(Al)자를 붙이면 알엘 혹은 알일라(Al-illah)혹은 알엘라(Al-Ellah)가 되는데 이것이 줄어서 알라(Allah)가 되었다는 주장이다.(계속)
* 위 글은 한국이란인교회 홈페이지(4him.or.kr)에서 가져온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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