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攝理)는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고 보존하는 방식을 말한다. 성육신과 함께 세상의 제한 속으로 들어오신 예수께서는 섭리의 계시 속에서 구원의 은총으로 나아가기 위한 생애를 사셨다. 즉 하나님 섭리의 영역도 하나님의 창조 세상의 영역에서 구현된다는 면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계시를 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섭리는 하나님께서 결코 세상을 무심하게 방치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즉 하나님과 세상을 동일시하는 범신론(汎神論)이나 하나님의 섭리를 부정하는 이신론(理神論)적 접근은 성경적이지 않다. 또한 우연이나 운명론적인 접근도 섭리의 영역이라 볼 수가 없다. 세상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권능 가운데 준비되고 계획된 영원한 예지와 예정 가운데서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 대단히 중요하다. 박해경 박사(백석대)도 칼빈의 섭리론에 대해 논하면서 “섭리론은 엄밀한 의미에서 창조론의 한 부분이요 칼빈은 섭리를 아는 것이 가장 큰 복이라고 할 정도로 섭리론을 중요하게 보았다”고 했다. 그럼 예수께서 말하신 섭리의 요소들에 담긴 계시를 살펴보자.
(1) 보존
보존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존재와 행동을 그것들에게 부여하신 특성과 능력과 함께 후원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 유지 사역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보존은 세계를 계속 창조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손을 떼시되 파괴하지는 않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예수는 물질세계의 자연 은총은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차별 없이 베풀어지는 선물이라고 설교한다(마 5:45). 자연을 통한 예수의 계시는 주변의 익숙한 사물을 도구 삼아 비유로 나아간다. 지극히 작은 참새조차 하나님의 장중에 있으며(마 10:29)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머리털 하나도 기억하시는 분이다(눅 21:18).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을 기르시고 보존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세상 염려를 맡기고 자유 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마 6:25-34). 예수의 자연을 통한 계시는 이렇게 자연스럽게 보존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만든다.
(2) 협력
보존은 하나님이 하시나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과 협력한다. 이 말은 미리 정하신 만물의 작용 법칙에 따라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적 질서대로 정확히 행동하게 하는 신적 능력의 작용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의 행동에 동반하시며 효과 있게 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역할을 분담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선과 악의 모든 행위 속에 역사하시되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다. 인간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고 하나님께 맡겨야 되는 동시에 모든 범사에 대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책임을 다함으로 하나님께 협력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인형처럼 여기지 않으셨다. 예수 제자들은 오히려 세상일은 세상에 맡기고 예수 사역에 적극 협력해야 했다(마 8:22). 즉 기독교에서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섭리적 역사란 있을 수 없다.
(3) 통치
통치는 하나님이 신적 목적에 따라 만물을 목적론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지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은 만물이 자기 존재의 목적에 응할 수 있도록 그들을 지속적으로 다스리신다. 하늘과 땅 즉,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는 각각 다르게 통치되나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다(마 28: 18). 이 통치는 보편적이며 특수적인 동시에 하나님의 지배를 벗어나지 않는다. 예수는 예수 제자들과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하며 예수 제자들은 그 통치자의 명령과 약속 아래서 사역해야 한다(마 28:19-20). 이렇게 예수의 주권적 통치는 우주적이고 종말적이고 미래적이다.
(4) 비상 섭리
하나님의 섭리는 단순한 보존과 협력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의 통치는 필요하다면 자연에 대해 권능적 간섭을 한다. 예수의 이적들은 바로 그러한 초자연적 방법의 간섭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궁금증을 우리 인간들에게 제공한다. 자연에 직접적 가시적 권능적으로 간섭하는 이 같은 비상적 섭리는 왜 필요한 것일까 하는 점과 이 같은 비상 섭리는 계시의 책 성경이 완성된 이후에는 종결된 것일까 하는 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판단 속에 계신 분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그의 이적 사역에 대해서도 함부로 단정을 내리는 것은 위험한 판단이다. 예수가 비록 내재(內在) 속으로 오셨으나 자신은 내재에 묶인 존재가 아님을 증거 해야 한다. 즉 자신은 내재 속으로 온 초월자(超越者)임을 증거 해야 했다. 예수가 자연 속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 이적을 통해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한 것도 결국 일종의 비상 섭리로서의 ‘초월자 선포’라고 볼 수 있다(요 2장). 그 초월자 선포로서의 비상 섭리는 성경적 이적과 섭리로서 충분하고 완전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경우가 있기는 하다. 아직 성경이 그 지역 언어로 번역 되지 못했거나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 되지 못하고 있는 ‘창의적 접근 지역’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따라서 때로 자연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비상 섭리에 대해 인간은 어떤 속단도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