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승오 교수
안승오 영남신대 선교신학 교수

에큐메니칼 그리스도 이해가 선교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아마도 구원의 범위 확장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선교는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사역이었다. 전통적인 선교가 전하고자 하는 것은 주로 영적인 구원이었고, 이 영적인 구원에 육적인 차원의 구원이 수반되는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구원 이해로 말미암아 선교는 육적인 면보다는 영적인 차원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했다. 물론 육적인 차원을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많은 선교사역이 병원, 학교, 고아원, 복지 기관 등을 세워서 사람들의 육체적 차원의 향상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최종적인 관심은 영적인 구원이었다. 육적인 차원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영적인 구원을 얻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연스럽게 육적인 차원에 대한 소홀로 나타날 수 있게 되었고, 구원이 저 세상만의 구원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의 그리스도 이해는 전통적인 그리스도 이해가 가져올 수 있는 축소된 구원 이해의 폭을 넓혀주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이해로 말미암아 선교는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 위주의 선교가 아니라 삶의 총체적인 구원을 위한 통전적인 사역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선교는 영혼만을 위하고 저 세상만을 위한 사역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사는 삶의 모든 차원에 참된 구원을 가져다주는 사역으로 이해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확장된 구원 이해는 그 커다란 기여점과 함께 약점도 지니고 있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 장점 자체가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1. 구원 개념의 혼선 가능성

확대된 구원 개념은 구원 개념의 혼선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인 신학에서는 구원개념이 매우 단순 명료하였다. 구원받았다는 것이 무엇이며, 구원을 어떻게 받는 것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있었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구원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었으며, 그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였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는 성경 특별히 바울의 가르침 가운데 분명하게 나타나며, 개혁자들의 핵심신학이었다. 그러나 확대된 구원 개념에 의하면 모든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런데 어떤 억압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난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만이 억압 아래 있을까? 부자들 역시 수 많은 굴레에 매여 있지 않는가? 부자들 역시 물질 문제, 질병, 정신적인 고뇌 등에 매여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근 들어 많은 사회 저명 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많이 발생하는데 이런 것은 부자나 권력을 지닌 자들 역시 고통의 굴레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 중 그 어느 누구가 모든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그리고 도대체 어디까지 해방을 받는 것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들이 여전히 노예의 신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구원받은 성도로 생각하면서, 주인을 잘 섬기라고 권면하였다 (엡 6:5, 딤전 6: 1-2). 방콕의 구원 이해에 의하면 이들은 노예 상태에 있고 해방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록 노예였지만 분명히 예수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개념이 명확치 않으면 그 사역은 효율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에큐메니칼의 확대된 구원이해는 그 넓은 포괄성으로 인해 불명확한 개념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러한 불명확한 구원의 성취를 목표로 삼는 선교사역은 자연히 그 사역의 효율성이 낮아질 가능성이 많다.

2. 구원을 복지사회건설로 축소시킬 가능성

확대된 구원 이해의 두 번째 문제는 구원을 자칫 복지사회건설 정도로 축소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방콕의 구원이해는 어떻게 하면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해방시킬까에 주된 강조점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방콕은 선교단체들이 현지에서 사회 정의 구현을 위한 사역을 하지 못하는 한 철수하라고 권면함으로써 에큐메니칼이 추구하는 선교는 전통적인 구원이 아니라 해방운동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류 사회에 가난한 자들이 사라지고 억압받는 자들이 모두 해방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곧 구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방콕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모든 억압으로부터 해방이 되는 것이 과연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접어두고, 모든 인간이 다 해방되어 잘살게 된다 해도 그들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자신들만의 힘으로 교만하게 사는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나라라면 막시즘이나 인권운동가들이 이루려는 사회와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보쉬는 “요약하면 구원과 복지는 비록 그것들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 기독교 복음은 현대의 해방 운동들의 의제와 동일하지 않다”고 설파한다. 휫트비가 이미 지적한대로 “..... 이 세계의 슬픔의 근원이 영적이어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삶의 차원으로서 침투해 들어가셔야 이 세계의 치유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확대된 구원이해는 자칫 구원의 핵심을 놓쳐버리고 막시즘이나 인권운동가들이 말하는 구원의 의미로 축소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깊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계속)

※ 좀 더 자세한 내용과 각주 등은 아래의 책에 나와 있다.

현대선교신학
현대선교신학

안승오 교수(영남신대)

성결대학교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M.Div)에서 수학한 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으로 신학석사(Th.M) 학위와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총회 파송으로 필리핀에서 선교 사역을 했으며, 풀러신학대학원 객원교수, Journal of Asian Mission 편집위원, 한국로잔 연구교수회장,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선교와 신학』 및 『복음과 선교』 편집위원, 지구촌선교연구원 원장, 영남신학대학교 선교신학 교수 등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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