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로빈 슈마허(Robin Schumacher)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이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기독교 신앙은 완전히 맹목적인가?’(Is the Christian faith completely blind?)를 10일(현지시각)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기독교가 반지성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무신론자들과 종교 비판가들이 암기할 정도로 익숙한 성경 구절이 있다.

요한복음 20장 26~29절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이후 도마는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나타나시자, 도마는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며 믿음을 고백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한복음 20:29).

이에 대해 회의론자들은 “보라! 기독교의 ‘믿음’이란 증거 없는 맹목적 신앙을 의미하며, 심지어 예수님조차 이를 긍정하셨다. 하지만 나는 증거를 기반으로만 믿는다. 체크메이트!”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들은 히브리서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며 이러한 주장을 보강하려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이러한 주장에 대해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앙이 이토록 모든 것 위에 높이 평가될 때, 필연적으로 이성, 지식, 그리고 인내심 있는 탐구는 신용을 잃게 된다. 진리를 찾는 길은 금지된 길이 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예수님과 히브리서 저자는 아무런 근거 없이 믿으라고 가르친 것일까?

신앙과 진리

먼저,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정의되는지 살펴보자. ‘믿음’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약 400번 등장하는데, 히브리어로 아만(אמן, aman) 이며 이는 ‘확고한, 신뢰할 만한, 안전한’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스어로는 피스티스(πίστις, pistis) 라고 하며, 이는 동사 페이소(πείθω, peitho) 에서 유래했는데, ‘설득되다’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피스티스’는 신뢰, 확신, 확고한 신념, 신뢰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단순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확고한 근거를 바탕으로 한 신뢰를 의미한다.

또한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존재한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faith that)’과 ‘~을 신뢰하는 믿음(faith in)’ 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믿음 that)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믿음 in)” (히브리서 11:6).

예를 들어, “나는 아내를 믿는다”라고 말할 때, 이는 아내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성품과 말이 신뢰할 만하다고 믿는다는 의미다. 이는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그동안 함께한 경험과 근거를 바탕으로 형성된 믿음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 믿음은 어떤 의미일까?

도마 이야기의 핵심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흔히 도마가 믿음이 부족한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사실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부터 확신한 제자는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여러 차례 예고하셨음에도(요한복음 2:19-22, 누가복음 18:33-34, 마가복음 9:31-32),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이후 낙담하고 있었다.

실제로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지 않고 믿은 유일한 인물은 요한이었다. “그때에 다른 제자가 먼저 무덤에 와서 보고 믿더라.” (요한복음 20:8)

요한은 빈 무덤을 보고 믿기 시작했으며, 이후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활이 연결되면서 그의 믿음이 확고해졌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예수님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는 말씀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말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대상은 이미 오랜 기간 그분을 알고 있었으며, 그분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는 나를 더 잘 알았어야 했다’라는 의미였다.”

즉, 예수님은 맹목적 믿음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충분한 증거와 관계 속에서도 의심하는 태도를 책망하신 것 이다.

히브리서 11장이 의미하는 ‘믿음’

히브리서 저자가 말하는 믿음 역시 증거 없는 맹목적 믿음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을 읽어보면, 저자가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기독교 철학자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William Lane Craig)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저자가 설명하는 믿음은 과거 또는 미래의 사건들을 감각적으로 직접 경험할 수 없지만 신뢰하는 것이다. 그는 미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말하고 있으며, 그의 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그러한 신뢰를 가질 이유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진 믿음과 연결된다. 우리는 아직 구원의 완성을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증거들을 바탕으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

결론: 신앙은 맹목적 믿음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도, 히브리서 저자도 근거 없는 믿음을 강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을 강조한 것이다.

존 맥아더(John MacArthur)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믿음이 의미를 가지려면, 반드시 그것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을 가져야 한다.”

이제, 이에 대해 반박할 사람이 있을까?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크리스천포스트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