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복음과공공신학연구소 황경철 박사
황경철 박사.

2024년 2월 정부는 인구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 증가 및 공공의료서비스의 확대를 위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 정책을 발표하였다. 의사들은 자신들과의 충분한 의견 수렴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에 반발하였고, 10,034명의 전공의가 사직서를 제출했고, 이 중 9,006명이 근무지를 이탈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부와 의료인 각자가 자신만 옳다고 주장하면서 양측의 입장은 좁혀지기는커녕 갈등은 심화되었다. 마침내 응급환자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몇 개의 병원을 돌아다녀야 할 만큼 심각한 의료대란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백스터의 공공신학적 통찰로 조망한다면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백스터가 모든 직업에서 강조하듯이 그 직업의 최고 목표와 소명이 무엇인지 다시 새길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의사들은 정부의 일방적 의료 개혁이 의사들의 현실을 무시하는 것 같고, 급격한 의대 증원이 무모한 탁상공론으로 비치며,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자신들을 범죄자로 몰아가는 언론의 프레임에 분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가치보다 사람의 목숨과 건강을 구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 되게 하라고 백스터의 권면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물론 대부분의 헌신적이고 소명 의식이 투철한 의사에 비하면 일부분일 수 있겠으나, 사직서 제출과 같은 집단행동은 직업을 통해 공공선을 추구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우선적 가치가 무엇인지 묻게 한다. 다른 한편, 정부 입장에서는 의료 개혁의 동기와 방향이 아무리 옳고 선하더라도 그 개혁의 중심에 선 의사들과 소통이나 공감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한 것은 절차에 있어서 민주적이지도, 공공선에 부합하지도 않다. 2,000명 의대 증원이 시행되면 의대생 교육에 대한 현실적 대안은 무엇인지, 의대 증원이 필수 의료분야(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확충과 지방 의료시스템 개선에 직결되는지 숙의 과정이 선행됐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나타난 의료대란이라는 파국은 ‘의료 개혁’과 ‘국민의 생명’ 사이에 어느 것이 더 큰 선이냐고 따지는 백스터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핵심은 각 진영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보다 공적 유익을 염두에 두고서 그것에 이바지하는 쪽으로 소통과 절차와 결과를 이끌어 내는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4) 통치자와 공공선

흥미롭게도 백스터는 신앙적으로 비국교도(청교도)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왕정을 지지하고 예전과 감독주의를 용인하는 보수적 입장이었다. 윌리엄 에임스의 「신학의 정수」(The Marrow of Sacred Divinity)를 읽은 후 백스터는 국교회에서 안수 받은 것을 한탄할 정도로 국교회의 비성경적 요소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했다. 다만 교회의 하나 됨이 깨지는 것에 마음 아파하여 일평생 교회 연합을 도모했던 그의 노력이 이러한 보수적 입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의 확고한 청교도적 신앙 탓에 1685년 제임스 2세가 왕위에 오른 후 백스터는 ‘신약 성경에 대한 해설’(Paraphrase on the New Testament)에서 국교회 체제를 비난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일체의 청교도주의를 증오한 제프리 대법관은 백스터를 “세상을 키더민스터의 교리로 타락시키는 늙은 악인”, “국교회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지만 이를 거부한 교활하고 고집 세고 미친개! ”라고 불러 다섯 달이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백스터는 통치자를 위한 순복과 기도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당신의 통치자를 불명예스럽게 하려고 그의 악을 폭로하거나 과장하지 말라. 그의 명예는 공적인 선을 위해 필요하기 때문이다.
-통치자의 어떤 악도 당신으로 하여금 그 직분이 가진 위엄을 잊어버리게 하지 말라. 죄악된 통치자의 권위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므로 복종해야 한다.
-기도가 없다면, 선한 통치자는 지금보다 더 적을 것이며 나쁜 왕은 더 나빠질 것이며 적어도 지금보다 교회에 더 많은 해를 끼칠 것이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가시적 통치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나라를 세운다는 명목으로 왕들에게 반역하고 그들을 끌어내리려는 것보다 하나님이 임명하신 직분자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를 증진하는 게 더 합법적이고 평안한 방법일 것이다.

백스터의 정치적 관점이 왕정주의를 격렬히 반대하는 당시의 수평파나 회중파 및 재세례파의 분리주의 입장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백스터의 관점이 정치적 보수를 지지하면서도 어떻게 성경적 안내를 따를 수 있는지에 대한 통찰을 주기도 한다. 일례로, 백스터는 왕정주의를 지지했으나 왕권의 남용을 비판하며, 입법적 견제 장치를 제시하였다. 통치자가 자신의 권세를 백성의 동의 없이 행사한다면 전제정치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공적인 승인 없이 만들어진 것은 법이 아니라고 역설했다. 통치자의 권력이 스스로가 아닌 최고 권세자 하나님에게서 주어짐을 분명히 했고, 그가 다스리는 법은 하나님의 법에 기초한 자연과 성경에 나타난 법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다.

백스터의 주장이 현대 한국 사회 정치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첫째, 백스터는 위정자에 대한 기도와 순복을 강조하되, 공공선의 관점에서 권력남용 방지를 위해 견제의 목소리를 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극심한 이념과 진영논리의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어느 한쪽이 100% 옳거나 100% 틀릴 수는 없을 텐데, 구체적 정책이나 개별 사안에 대한 숙고와 검토 없이 진보냐 보수냐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선택하려는 추세가 뚜렷하다. 상대 진영을 향한 경청과 존중, 상생과 협치의 자세는 찾기 힘들고, 확증 편향적으로 보일 만큼 상대를 적대적으로 대하고, 프레임을 씌워 배척하려는 모습에서 갈등의 골은 깊어진다. 특별히 일부 극우 성향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우파 지도자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은 성도를 하나님의 백성인 동시에 국가의 성숙한 시민으로 방출할 책임이 있는 교회 지도자로서의 책무를 되짚어 보게 한다.

둘째, 백스터는 의회파 군목으로도 활동했지만, 왕정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상호존중의 입장을 견지했다. 제임스 패커의 지적대로 백스터는 왕정과 국교회의 예전과 감독주의를 여전히 인정한 비국교도주의자였다. 그는 왕정을 지지했으나, 청교도에 대한 맹세를 버리라는 왕의 명령을 거부하여 추방당했다. 김상봉의 말대로 이제껏 한국 정치 역사는 상대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정립하려는 정쟁(政爭)의 반복이었다. 상대를 적(敵)으로 규정하고 시위와 촛불과 탄핵으로 끌어내렸으나, 새로운 지배 권력에는 상호주체성도,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기 철학도 없다. 왜냐하면 상대를 무너뜨림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수립하려는 정권은 결코 온전한 의미에서 보수와 진보 모두의 나라를 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회파이면서 왕정주의를 지지하고, 비국교도이면서 감독주의를 용인한 백스터의 어정쩡한(?) 스텐스는 정치나 종교적으로 어느 한 입장이 정해지면, 다른 모든 사안에 대한 입장이 도미노처럼 결정될 수도 없고, 결정될 필요도 없음을 일깨운다. 짐 월리스의 예리한 지적처럼 진보측이라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만큼이나 태아의 생명을 존중하여 낙태에는 반대할 수 있어야 하고, 성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는 만큼이나 가정의 붕괴를 정책적으로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보수측도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만큼이나 저소득층의 세제와 복지에 힘을 쏟아야 하고, 전쟁에 찬성하는 기조를 철회하고 가난한 자와 평화를 위한 복음적 가치를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대한 공적 논의가 진영논리가 아닌 복음적 가치와 공공선으로 재편될 때, 상호존중과 협치를 위한 공통 분모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양측 모두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쪽은 개인의 행동 변화를 촉구하고, 다른 쪽은 사회 프로그램 개선을 촉구하는 식의 논쟁은 상호배타적이지 않고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상호존중을 통해 한국 사회는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양자택일적 선택을 넘어 제3의 선택지를 모색하는 충분한 공간을 마련한다.

셋째, 백스터는 사회가 존재하는 궁극적 목적이 공공선(public good, common good)임을 강조하였다. 공공선의 원리는 개인, 가정, 교회, 국가라는 동심원으로 놓고 볼 때, 그 원이 확장됨에 따라 꾸준히 강조되고, 실천되어야 한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영국의 노예제도를 폐지한 기독 정치인이었지만, 그 사상적 토대는 이미 백스터에게서 발견된다. 목회자는 자신의 교회를 넘어서 지역사회와 호흡하고, 신실한 교인이자 성숙한 시민으로 성도를 세우며, 국가가 공공선에 부합하도록 자신의 목회와 설교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5) 성도의 일상과 공공선

백스터는 「기독교 생활지침 5: 사회윤리」에서 10장부터 34장까지 성도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공공선을 구현할지 구체적 지침을 제시한다. 채권과 채무(10장), 스캔들(12, 13장), 대화, 권면, 책망(16장), 계약 체결(19장), 억압에 대처(20장), 사치와 낭비(21장), 소송(22장), 비방과 비판(23, 24장), 신뢰와 비밀 유지(25장), 이기심 극복(26장), 이웃, 신자, 원수를 사랑하는 법(27-29장), 자선(30장), 보상(32장), 자기 점검(34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각 항목을 자세히 다루지는 못하지만, 백스터가 설명한 주제들을 일람할 때 얼마나 신자의 삶과 깊숙이 맞닿아 있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채권과 채무에 있어서는 ‘공적인 선’을 ‘하나님의 명예’와 대등한 지위에 놓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재산을 맡기시듯 상대에게도 그리하셨기에, 그 신뢰를 깨는 것은 청지기 위치에서 하나님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요, 이웃의 재산뿐 아니라 영혼에까지 해를 입혀 공적인 선을 깨뜨린다는 것이다. 타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방과 성급한 비판을 삼가야 하는데, 이는 우리가 서로의 영혼에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에 악성 댓글이 무성하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고 극단적 선택까지 하는 이 사회는 백스터의 권면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들(비난하는 사람들)은 성급하게 어떤 것을 믿고, 사람들이 자신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지 않거나, 그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하지도 않고, 일반적으로 무죄한 자들을 정죄하고, 선을 악이라고 부르며, 빛을 어둠으로 바꾸고, 의로운 자에게서 의를 제거한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진노로 저주하신다… 비난하는 것은 쉽게 감염되는 죄다.

백스터는 공공선을 강조하면서도 가장 탁월한 자선은 이방인과 무신론자를 회심시키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복음 전도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키더민스터에서 전도와 교리와 심방에 중점을 둔 헌신적인 목회가 이를 증명한다. 또 하나님께 죄를 고백한 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피해자에게 사과와 원상복구 할 책임까지 면책되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다양한 경우에 따른 보상의 대상, 방법, 정도, 시기와 구체적인 원상복구의 기준을 제시한다.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께 죄 고백에서 받은 용서를 남용하여 피해자에 대한 상식적인 사과나 보상까지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백스터의 공공신학 원리는 기독교인의 이러한 미숙함을 교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당신이 원상 복구하거나 보상해야 할 때, 그것이 그렇게 크지 않다면, 비용이나 고통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하나님과 양심에 거스르지 않게, 신실하게 원상 복구와 보상을 하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당신 가슴에 가시를 둔 것 같으며, 그 가시는 뽑힐 때까지 계속 당신에게 고통을 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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